20.07.22 14:24최종 업데이트 20.07.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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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권력 관계가 급속히 뒤바뀌고 있다. 기득권에 억눌려 지냈던 다양한 세력들이 기존의 편향된 가치관에 도전장을 내미는 흐름이 격렬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기존 가치관을 돌아보면, 그간 당연한 것인 듯이 부지불식간에 스치고 지나간 편향된 가치관들이 한둘이 아니었음을 절감하게 된다. 특히 역사기록물(사료) 속에 그런 것들이 산재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라게 된다. 


탐라국은 제주도에서 상하이 앞바다까지의 동아시아 해상을 무대로 강렬한 발자취를 남겼다. 498년에 동성왕의 백제 군대가 지금의 광주에 접근하자 탐라국이 당황해 화친을 서둘렀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이나, 광주 서남쪽 나주에서 탐라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군이 발견된 사실은 탐라국이 한때는 해상뿐 아니라 육지에서도 상당한 영역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탐라는 독립정권을 유지하면서 고려왕조와 사대관계를 맺었다. 조선왕조에 편입되기 전까지 이 나라는 독립정권의 형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육지 사람들이 남긴 역사기록물은 탐라를 제외한 채 한민족 통일을 서술한다. 탐라를 배제한 채 통일신라시대를 말하거나 남북국시대(발해+신라)를 말한다. 또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운운한다. 육지 중심의 편파적 시각이 한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기록물 속의 편파적 시각은 이 외에도 다종다양하게 나타난다. 한국사의 경우에는, '육지 중심' 외에 '남성 중심', '지주 중심', '유교 중심', '지식인 중심', '농경문화 중심(반유목문화)' 같은 가치관들이 공정한 역사 인식을 방해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남성 중심'이라는 편견 하나만 중점적으로 살펴봐도, 이런 껍데기들이 공정한 역사인식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절감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 남아 있는 역사기록물 대부분은 고려시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역사 기록을 담당한 이들은 남자 선비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평가 역시 남자 관점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 속 인물에게 결점이 있더라도 그것이 남성의 이익을 해치는 게 아니면 그냥 무시되기도 했다. 남성 인물이 첩을 많이 두는 일, 정치적 야망을 위해 여성을 악용하거나 배신하는 일, 여성 노비를 부당하게 착취하는 일 등은 대수롭지 않게 묘사되곤 했다.

남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평가하다 보니, 여성 위인의 숫자도 실제 이하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남자 사관들은 여성 위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거나 자기 시대의 도덕적 관점으로 과거의 여성 위인을 재단하는 일도 있었다.

또 여성 위인에 대해서는 그 사생활을 지나치게 파헤치는 경향이 있었다. 남자 위인의 경우에는 '생활이 호방했다'고 표현하고 넘어가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한 치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 예가 많았다. 여성 위인이 이혼을 했다, 재혼을 했다, 애인이 있었다 등등을 과도하게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들이 색안경을 끼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 위인은 업적보다는 성적 스캔들을 통해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경우가 많았다.

천추태후는 타락한 여성?

이런 불공정한 역사 서술로 인한 피해자 중 하나가 고려 천추태후(헌애왕후, 964~1029년)다. 고려 건국 46년 뒤에 출생한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제7대 목종 임금의 어머니다. 그리고 성씨는 황보다. 왕건의 손녀가 황보 씨가 된 것은 그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천추태후는 목종 시대(997~1009년)의 실권자로서 사실상 군주 역할을 했다. 그의 정치는 강력하면서도 진보적이었다. 귀족을 견제하고 신진세력을 많이 등용했다. 당시 귀족들은 노비와 토지를 대거 보유하고 국가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에 해당할 만했다. 따라서 천추태후의 정치는 재벌을 견제하고 경제민주화를 추구하는 정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과거급제자를 증가시켰다. 실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해 귀족과 기득권층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외교도 잘했다. 북중국의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사이에서 적절히 중립을 지키며 국익을 챙겼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나라가 안정되고 전쟁도 발발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천추태후는 유능한 통치자였다. 
 

조선 초기의 남성 유학자들이 서술한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에는 그를 타락한 여성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장치들이 담겨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하지만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에는 이런 사실들이 부각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남성 유학자들이 서술한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에는 그를 타락한 여성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장치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독자들이 천추태후의 역사적 업적을 알려면 <고려사> 여기저기는 물론이고 중국 역사서까지 참고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이 얼마나 편파적인지는 열전의 맨 앞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천추태후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왕태후 황보씨는 대종(戴宗)의 딸이며 목종을 낳았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응천계성정덕 왕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 목종의 나이가 18세가 된 뒤에도 태후가 섭정하고 천추전에 거처하였으므로 세상이 그를 천추태후라고 불렀다."
 
위와 같이 프로필을 소개한 뒤 천추태후 열전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본론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그는 김치양과 사귀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정하려고 했다."

인적 사항을 소개한 부분이 끝나고 본론이 시작되자마자 김치양과의 이성교제부터 대뜸 언급했다. 또 여기서 생긴 아들을 차기 군주로 앉히려 한 사실을 거론했다. 선입견을 조장하기 쉬운 서술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김치양과 사귀어'가 <고려사> 원문에는 '여김치양통(與金致陽通)'으로 돼 있다. 여(與)는 영어 with와 같은 의미다. '사귀다'에 해당하는 원문 글자는 '통(通)'이다. '통'이란 글자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이를 불법성을 풍기는 '간통'이란 한국어로 풀이한 번역서들이 있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마찬가지다.

'통'을 '사귀다'로 번역하든 '통정하다' 혹은 '간통하다'로 번역하든, <고려사>를 읽는 독자들은 천추태후의 업적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이성 관계에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인물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하기가 힘들게 돼 있는 것이다.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려 했다는 서술도 오해를 일으킬 만하다. 자세한 설명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 독자들은 천추태후가 남자에 눈이 멀어 왕씨의 나라를 김씨의 나라로 만들려 했다는 인상을 갖기 쉽다.

하지만, <고려사> 천추태후 열전과 더불어 목종세가(목종 편)을 종합해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 자체는 별다른 법적 문제점이 없었다. 고려 초기의 왕실 풍습은 신라 왕실과 유사했다. 신라에서는 사위를 양자로 입양한 뒤 아들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이 '아들과 사위의 왕위계승에 차별을 두지 말라'는 취지의 유언을 남긴 사실과 남해왕의 증외손이자 석탈해의 손자인 벌휴왕이 등극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는 공주의 피를 이어받은 외손도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왕실의 풍습을 계승한 고려 초기 왕실에서 천추태후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의 <고려사> 필진과 오늘날의 <고려사> 번역자들은 그 속에 뭔가 부조리가 있었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유교적 관점으로 고려 초기 왕실의 결혼 풍습을 임의로 재단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천추태후가 역사에 끼친 영향보다는 그가 남긴 사생활 흔적에 더 많은 관심을 할애할 가능성이 있게 된다.

위와 같이 여성 위인의 이성 관계는 뭔가 문제가 있는 듯이 서술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남성 위인의 이성 관계는 자연스럽게 서술되는 경우가 참으로 한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성 편력에 관한 서술이다.

주몽과 무측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이 임신한 첫 부인 예씨를 버리고 동부여에서 도주한 뒤 소서노라는 권력자와 재혼하고 그 힘을 빌려 고구려를 건국한 다음에 소서노마저 배신하는 사실관계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 기록을 읽고 '주몽은 나쁜 놈'이라는 인식을 갖는 독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가까운 여성에 대해 책임과 도리를 지키지 않는 주몽의 행동보다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고구려를 세우는 주몽의 정치적 활동이 훨씬 더 선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필진이 김부식을 비롯한 남성 유학자들이었기에 이런 서술이 가능했던 것이다.

주몽에 대해 관대함을 보여준 김부식은 선덕여왕이나 당나라 무측천에 대해서는 너무나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무측천은 당나라 황후 출신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어 주나라(무주)를 15년간 경영했지만, 측천무후라는 황후 타이틀로만 후대에 기억되고 있다.

또 그가 세운 주나라도 '없었던 나라'가 돼버렸다. 무측천의 주나라 건국 때문에 당나라는 690~705년 기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당나라가 618~907년 기간에 끊김 없이 존속했던 것처럼 '처리'했다. 
 

김부식 영정(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 한국학중앙연구원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편에서 김부식은 바로 그 무측천을 선덕여왕과 한데 묶어 평가하면서, 사관답지 않게 자기 의견을 불필요하고 장황하게 기술했다. 다음은 김부식의 사견 중 일부다.
 
"하늘의 이치로 말한다면,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럽다. 인간의 이치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낮거늘, 어째서 할머니(姥嫗)들이 규방을 나와 국가 정사를 논단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신라가 여자를 세워 왕위에 앉힌 것은 정말로 난세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주몽의 비인간적 행위들을 자연스럽게 서술했던 김부식은 선덕여왕과 무측천을 '할머니들'로 부르며 그들이 여성이라는 점 자체를 문제 삼았다. 신라 지배층이 합의해서 성사시킨 선덕여왕의 등극에 대해 김부식이 자기 마음대로 부정적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서들 속에는 공정한 역사인식을 가로막는 다종다양한 껍데기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런 껍데기들을 뜯어내고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한 노력이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역시 역사바로세우기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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