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7 11:15최종 업데이트 20.08.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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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4일 레바논 베이루트 폭발 현장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EPA

 
지난 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한 바닷가 창고에 보관 중이던 2750톤의 질산암모늄이 폭발해 160명 이상의 사망자와 6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고 직후 폭발의 형태, 규모 등이 흡사 테러공격을 떠올리게 했지만 현재까지는 인재사고로 정리되는 듯하다. 대개의 테러 사건과 달리 이번 사고의 경우 의심 대상국이나 단체들이 모두 관련 가능성을 부인하고 나선 상태다.

그리고 얼마 후 비난의 화살은 일제히 레바논 정부를 향했다. 거대한 위험 물질이 너무나 허술하게 방치되어 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더구나 2013년 이후 수차례 해당 지역 세관이 위험을 경고하고 위치 이동을 요구했지만 묵살됐다는 게 드러나면서 레바논 정부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레바논 내각은 총사퇴와 조기총선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심판' '레바논 정부 향한 국제사회의 변화 요구'. 사고 후 한 주가 지나면서 이번 사건을 보는 국제사회와 언론들의 시각이다. 하지만 균열의 원인은 흔히 외부에서 온다. 사회의 기강이 무너진 데 대한 정부의 책임, 이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정부가 바뀜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면 모를까, 근본적 원인이 외부에 있다면 정권교체로는 해결이 만무하다. 만약 문제의 핵심 또는 그 일부가 정부를 흔들기 위한 목적과 관련이 있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러한 예들을 우리는 서아시아에서 너무나 많이 봐왔다.

'계획국가' 레바논의 탄생

지중해를 접한 아시아 국가는 셋, 레바논이 그 중 하나다. 나머지 둘은 레바논 남쪽의 이스라엘과 북쪽의 시리아.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이미 많은 설명을 담고 있다. 19~20세기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지역 가운데 유럽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 이곳 팔레스타인-레반트 지역이다.

수 세기 동안 오스만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은 1차 대전이 벌어진 20세기 초 잠시 독립의 꿈을 꾸기도 했다. 자신들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이 더 큰 싸움판에 휘말리자 이 지역의 피지배자들은 그 때를 해방의 기회로 삼은 것. 고래싸움이 때로는 새우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준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이 끝나면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한 고래가 가고 다른 고래가 올 뿐, 포식은 이어진다.

서아시아의 강자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하면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영국과 프랑스에 넘겨준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 불리는 밀약을 통해 오스만제국이 내쫓긴 빈자리를 자의적으로 분배 점유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의 관할권이 프랑스로 귀속된다. 군정 통치로 이 지역 지배를 시작한 프랑스는 1923년 아예 강대국들만의 리그인 국제연맹(Ligue of Nations)에서 셀프 승인을 거쳐 레바논을 직속 통치지역으로 전환한다. 물론 지역민들의 의사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변화라면 단지 지배자의 이름이 오스만에서 프랑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레바논 지역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교가 절대적인 서아시아에서 기독교도들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4~5세기에 활동한 레반트의 기독교 수도자 마론을 따르는 이들이 무슬림의 박해를 피해 레바논 산맥에 모여 공동체를 이룬 것이 지금에 이른다. 20세기 중반 피지배 소수민족들의 독립 열기가 거세질 때 프랑스는 해안지방의 기독교 마론파 공동체 지역에 내륙부 무슬림 지역을 편입시켜 이들을 하나로 묶을 계획을 세운다. 분열을 조장해 독립을 향한 단합된 힘을 저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1943년 독립한 지금의 레바논이다.
 

레바논 반정부 시위대가 2020년 8월 9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의회와 가까운 지역에서 보안군과 충돌하고 있다. 베이루트 폭발에 책임이 있는 모든 관리들을 교수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지 하루 만에 시위대와 보안군 사이의 충돌이 다시 발생했다. ⓒ 연합뉴스

 
프랑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계획국가(?) 레바논의 국민 구성은 그렇게 철저히 계산된 비율에 따라 이뤄졌다. 1913년 당시 80%에 육박하던 기독교인 구성은 프랑스에 의해 국토가 재조정되던 당시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 됐다. 기독교인이 과반을 살짝 넘는 수준으로 안정적 기독교 지역을 유지하되 단합된 힘을 모으기는 어려운, 교묘한 인구구성이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컨페셔니즘(confessionism, 종파권력분담주의)이라 불리는 레바논의 독특한 정치제도다.

이-팔 분쟁의 한복판에 놓이다

한국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단일체제 국가는 하나의 중앙정부가 지방의 곳곳까지 거의 대부분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반면 미국, 독일 등 연방국가에서는 중앙정부가 외교, 국방 등의 권력을 행사하고 교육행정, 조세행정 등은 지방정부의 고유 권한 하에 놓이게 된다. 이들 두 체제는 다소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인종, 종교 등을 불문하고 다득표 원칙으로 선출직 공직자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지자체장 또는 주지사, 국회의원, 대통령 등 모든 헌법기관에서 무조건 다득표 선출 원칙이 적용된다.

반면 레바논의 경우 각 종파의 인구구성비율에 따라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등의 자격이 미리 정해져 있다. 대통령은 법에 따라 마론파 기독교도 가운데서 나와야 하고, 총리는 이슬람교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교 시아파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수니파의 한 정치인이 아무리 대중적 인기가 높아도 총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대통령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행정의 달인이라도 기독교인이라면 총리는 될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국방장관, 군사령관 등 주요 공직자들의 보직은 특정 종파에 모두 분담이 돼 있다.

이러한 컨페셔니즘 체제의 레바논은 다원주의적 합의체라는 원리를 지키면서 건국 후 30여 년 간 비교적 안정된 국정을 유지해 왔다. 심지어 레바논을 '중동의 스위스', 베이루트를 '중동의 파리'라고 부르는 서구식 찬사까지 따라붙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이 되면서 레바논의 사회적 대타협은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1970년 동쪽의 요르단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거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레바논의 인구구성 합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스라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무장저항세력이 레바논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자 이스라엘의 적대감은 커지고, 역시 위기의식을 느낀 마론파 기독교인들마저 민병대를 결성하면서 레바논은 걷잡을 수 없는 내우외환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1975년부터 종파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끝없이 이어졌고, 1982년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위협을 구실로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국가분쟁으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에 위협 받는 이슬람세력'. 이 프레임은 무슬림의 더 큰 봉기로 이어졌고, 이들 이슬람 민병대 가운데 시아파 출신의 한 저항세력이 힘을 키워 가는데 이것이 바로 '헤즈볼라'의 탄생이다.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란은 같은 시아파인 헤즈볼라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고, 막대한 자금과 전술적 지원으로 레바논 내에서 이들의 세력 확산에 결정적 공헌을 한다.

작은 민병대에서 시작된 헤즈볼라는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시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레바논 정규군보다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 티브이 등 매스 미디어까지 갖추면서 레바논인들의 눈과 귀까지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국민들의 파격적 복지향상까지 약속하면서 이제는 레바논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발돋움 했으며, 심지어 기독교와 이슬람교 수니파 등 타종교 신자들로부터도 지지를 얻기에 이르렀다. 결국 2018년 5월 치러진 총선에서 헤즈볼라와 지지 세력은 과반을 넘어서는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이례적인 움직임... 비극의 반복인가

레바논의 정치상황이 이렇게 되자,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들의 후견인을 자처해온 프랑스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기독교 세력은 소수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고 그나마 아랍 국가들 가운데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지를 받는 수니파 세력마저도 대폭 약화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란의 비호를 받는 헤즈볼라가 레바논 정치의 핵심으로 들어선 지금, 프랑스는 물론이고 다른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은 어떻게든 이 지역의 판을 흔들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때 마침 터진 사건이 4일 있었던 베이루트 대형 폭발사고다. 그것은 분명 인재 사고였다. 그리고 무기력한 현 레바논 정부의 안일한 국가운영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쨌든 프랑스 정부가 현 체제 하의 레바논이 겪고 있는 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사고 이틀 만에 휴가까지 반납하고 현장에 달려온 마크롱 대통령의 재빠른 움직임은 그렇게 이해돼야 한다.
 

에마뉘엘 마크롱(앞쪽 가운데) 프랑스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항구의 대규모 폭발 참사 현장을 방문, 피해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마치 선거 유세 현장을 방불케 하는 그의 행보를 국제사회는 "이례적"이라고 표현했다. 와이셔츠 차림으로 현지 정치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현장을 점검한 마크롱 대통령은 "당신들 문제가 곧 우리 문제"라면서 "레바논을 외롭게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레바논을) 도울 것이지만 그 원조가 부패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게 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은 분명하다. 헤즈볼라가 지배하는 현 레바논 체제를 뿌리부터 바꾸는 것. 그런 마크롱 대통령의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많은 외신들은 이것이 레바논의 민심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한 노련한 정치인 출신 고위공직자 후보가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청문회에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야당 청문위원의 지적에 '우리 국민도 지켜보고 있다'고 맞대응 했던가. '국민'과 '민심'은 정치인에게 만능키 역할을 한다. 지적하는 것도 국민이고 방어하는 것도 국민이다. 정부에 성난 것도 민심이고 야당에 성난 것도 민심이다.

마크롱 대통령을 에워싼 레바논 민심은 헤즈볼라의 지지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서구 사회가 현 레바논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기독교 세력이 다수가 되는 국가를 세워주기 바라는 민심이다. 그들은 그렇게 마크롱 대통령을 뜨겁게 맞았다. 반면 서구세력이 레바논을 서아시아 거점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경계하는 레바논 민심은 마크롱 대통령의 주변에 모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둘에 속하지 않은 또 다른 민심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레바논 위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기억하는 민심,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한 서구세력이 현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은 고려하지 않은 채 지도 위에 자 대고 국경선을 그어댔던 역사를 직시하고 있는 민심, 그 국경선 상하좌우로 종파가 뒤엉켜 민중의 삶을 비극의 현장으로 내몬 현실을 개탄하는 민심. 그 민심은 폭발사고 보도에서도, 프랑스 대통령의 느닷 없는 방문 보도에서도, 정부타도 시위 보도에서도, 그 어느 보도에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대규모 폭발참사가 발생한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나흘째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11일(현지시간) 시위대가 돌을 던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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