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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9.13 11:05 수정 2020.09.13 11:05
 

자신이 받은 평론가 점수를 자랑하는 와인들 미국 및 유럽의 와인 매장 홈페이지에는 판매하는 와인마다 평론가 점수가 상세하게 적혀있다. 그만큼 소비자들이 신뢰하고 참고한다. ⓒ 임승수



사진의 두 와인은 평론가로부터 받은 점수를 한껏 뽐내고 있다. 한 놈은 마치 WBC 슈퍼미들급 챔피언 벨트인 양 허리춤에 평론가 점수를 두르고 있고, 다른 한 놈은 마라톤 우승 월계관 쓰듯 주둥이에 로버트 파커 94점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사실 그럴만하다. 나 역시 와인을 고를 때 로버트 파커, 제임스 서클링, 잰시스 로빈슨 등 쟁쟁한 와인 평론가의 점수를 수시로 참고한다. 미국 및 유럽의 와인 매장 홈페이지에는 판매하는 와인마다 평론가 점수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만큼 소비자들이 신뢰하고 참고한다는 의미다.

특히 얼마 전 은퇴한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 Jr.)는 점수 하나로 와인 업계를 뒤흔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이다. 100점 만점 평가제를 처음 도입해 대중화시켰으며, 대부분의 와인 평론가가 1982년 빈티지의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저평가할 때 로버트 파커만이 역대급 빈티지라고 절찬했다. 결국 로버트 파커의 판단이 맞았음이 판명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어쨌든 초반에는 평론가 점수가 높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구매했다.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다가 이마가 몇 번 터지고 나서야 점수를 참고할 때 유념할 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점수가 높다고 항상 내 입에 만족스럽지는 않더라. 그렇다면 평론가 점수는 무시해도 좋을까? 그럴 리가! 엄청난 지식과 경륜을 쌓은 이들의 평가인데, 오히려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고?
 
와인 고를 때, 평론가의 점수 따지는 법
 

평론가 점수가 크게 차이나는 두 와인 (좌측 사진)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M. Chapoutier Cote-Rotie La Mordoree) 2006이다. 로버트 파커(RP) 96-98점, 와인 스펙테이터(WS) 95점으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측 사진) 샤토 보날그(Chateau Bonalgue) 2008이다. 와인 스펙테이터(WS) 90점이다. 준수한 점수지만 라 모도레에 비교하면 5점이나 낮다. ⓒ 임승수


위 사진 왼쪽의 와인은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M. Chapoutier Côte-Rôtie La Mordorée) 2006이다. 로버트 파커(RP) 96-98점, 와인 스펙테이터(WS) 95점으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른쪽 와인은 샤토 보날그(Château Bonalgue) 2008이다. 와인 스펙테이터(WS) 90점이다. 준수한 점수지만 라 모도레에 비교하면 5점이나 낮다. RP나 WS 점수에서 5점 차이면 신분이 달라지는 수준이다. 점수 차이를 반영하듯 가격도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가 네 배 이상 비싸다.   

둘 다 마신 나는 어느 쪽 와인이 더 맘에 들었을까? 평론가 점수가 5점이나 낮은 샤토 보날그가 훨씬 인상에 남았다. 맛과 향이 너무 맘에 들어서 몇 병이나 더 구입해서 마실 정도였다.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 2006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아 기억도 잘 안 난다. 왜 그럴까?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M. Chapoutier Cote-Rotie La Mordoree) 2006 ⓒ 고정미


  

샤토 보날그(Chateau Bonalgue) 2008 ⓒ 고정미


 
100점 만점인 RP나 WS 점수는 기본적으로 절대평가이다. 95점이면 다른 와인과 비교해 더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95점짜리 와인이라는 의미다. 세상 모든 와인이 똑같이 맛있어지면 모두 똑같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RP나 WS나 기본적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니 (구질구질한 뒷거래가 없다면) 꽤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다만 여기서 염두에 둬야 할 지점이 있다.
 
와인은 품종에 따라 맛과 향의 성격이 천양지차이며, 설사 같은 품종이더라도 재배지가 프랑스 보르도냐 미국 캘리포니아냐에 따라 또 다르다. 그러하다 보니 예를 들어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피노 누아 품종 와인과 미국 캘리포니아의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같은 범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100점짜리 피노 누아와 100점짜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수학 100점과 국어 100점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이다.
 
로버트 파커(RP) 96-98점, 와인 스펙테이터(WS) 95점을 받은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는 프랑스 론의 코트 로티에서 재배된 쉬라 품종으로 만들었다. 와인 스펙테이터(WS) 90점의 샤토 보날그는 프랑스 보르도의 포므롤에서 재배된 메를로가 주된 품종이다.

애초에 코트 로티의 쉬라과 포므롤의 메를로는 같은 범주가 아니다.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가 높은 점수를 받은 이유는 프랑스 론 지역 쉬라 품종 와인의 특성을 잘 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인과 보르도 포므롤 와인의 점수를 비교하는 것은 물리 95점을 국사 90점과 비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와인의 품종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강렬한 맛과 향의 쉬라를 선호하지만, 다른 이는 섬세하고 우아한 피노 누아가 맘에 쏙 든다. 쉬라 품종의 드센 특성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고득점 와인조차 인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 점수가 다소 낮더라도 선호하는 품종의 와인이 더 기억에 남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 경우, 점수가 훨씬 낮은 샤토 보날그가 더욱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품종 때문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와인을 마시면서 쉬라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물론 몇몇 쉬라 와인들은 꽤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확실히 여타 품종과 비교해 만족감을 느끼는 확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니 점수만 보고 구입하기 전에 내 입맛에 맞는 품종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내는 것이 소비자로서 현명하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현명하지 못해서 맨땅에 헤딩을 많이 한 덕택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지만.

평론가들이 와인 산업에 끼치는 영향
 
일반 애호가뿐만 아니라 평론가 역시 입맛이 제각각이다. 평론가의 취향이 격돌한 가장 유명한 예는 샤토 파비(Château Pavie) 2003 빈티지를 놓고 벌어진 로버트 파커와 잰시스 로빈슨의 논쟁이다. 로버트 파커는 해당 와인에 98점을 줬는데, 잰시스 로빈슨은 형편없는(ridiculous) 와인이라며 12점(20점 만점)이라는 낙제점을 줬다.

이 큰 점수 차이가 논쟁으로 이어져 서로 인신공격이 오갈 정도였다. 이래저래 뒷말도 많았지만 잰시스 로빈슨이 여전히 샤토 파비 2003년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확신한다니, 어쨌든 두 와인 평론가의 취향 차이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와인마다 점수를 살펴보면 대체로 평론가 사이에 점수 차이가 그렇게 크지는 않은 편이다. 하지만 4점 이상씩 벌어지는 경우도 의외로 적지 않은데, 샤토 팔머(Château Palmer) 1983 빈티지의 경우 로버트 파커는 98점인데 반해 와인 스펙테이터는 90점을 줬다.

그러니 하나만 참고하기보다는 여러 평론가의 점수가 고루 높은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평론가 사이에 점수 편차가 크다면 취향을 타는 와인일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참고로 평론가들의 점수는 와인 서쳐(Wine-Searcher) 앱을 사용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평론가들이 와인 산업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특히 로버트 파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어서 그에게 100점을 받은 와인은 가격이 몇 배로 급등하고 순식간에 완판된다. 반면 아무리 전통 있고 뛰어난 와이너리도 파커에게 낮은 점수를 받은 해에는 경제적 치명타를 입는다. 이렇다 보니 파커에게 고득점을 받기 위해 그의 입맛에 맞춰 와인을 만드는 현상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와인 컨설턴트들(대표적으로 미셸 롤랑)이 와이너리에 로버트 파커에게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제조법을 권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아니한가. 로버트 파커가 세계 와인의 맛을 자신의 입맛대로 획일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파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저 입맛대로 소신껏 평가하고 그 평가가 소비자들의 지지를 얻어서 영향력이 커졌을 뿐인데, 무슨 악의 축인양 비판받으니 말이다. 이게 다 대중의 취향과 싱크로율이 높은 자신의 코와 혀 탓(덕)인 걸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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