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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하는 글을 쓰고 싶다"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 만해문학상 수상작가 이인휘 그리고 정태춘
2017년4월5일 (수) 글:조호진 | 편집:박정훈
살자, 그래 살아보자! 그래, 다시 일어서자!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인생에 지친 이웃에게 용기를 나눠준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등불을 켠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공동체를 가꾼다. 가난하고 슬픈 이웃들을 위로하며 사랑을 베푼다. 이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은 월 1회 연재한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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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인휘는 남한강이 흐르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관덕마을에서 아픈 아내와 함께 산다. ⓒ 조호진

그의 아버지는 노가다였고 나의 아버지는 노점상이었다. 술 취해 돌아온 피난민 아버지가 북녘 오마니 그리워 잠든 자식의 얼굴을 부비면 아버지의 눈물보다 수염이 아파서 깼다. 왜 어머니들은 사랑과 호사도 없이 자식들을 낳았을까. 벽제와 응암동에서 유명한 만신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남의 아픔은 씻겨주면서도 제 서러움은 어쩌지 못해 눈물로 작두를 타야 했지만 항구도시로 떠나 술집을 차린 나의 어머니는 신내림 받기를 거부해 한동안 열병을 앓았다.

개도 물어가지 않은 가난이었다. 응암동 개천 옆 하꼬방에서 자란 그는 어머니 지갑에서 돈을 빼오라고 시킨 넷째 형과 함께 신영극장과 도원극장에서 영화 몇 편을 봤다. 악당이 죽으면 환호했고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가슴을 졸였다. 신정동 뚝방 하꼬방에서 자란 나는 영등포 서울극장과 남도극장 주변을 서성이다 어른들의 손을 잡고 무료입장해 동시 상영 영화를 보고 또 봤다. 그와 나는 영화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가난해서 허기진 세상과 육성회비 독촉하는 빚쟁이 같은 학교를 버리고...

그는 봉투 쌀로 허기를 때웠고 낱장 연탄으로 겨울을 났다. 담임선생이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중학교에 가야한다고 했지만 눈물의 졸업식에서 받은 우등상장과 졸업장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에 태우고 개눈박이 형이 공장장인 실공장에 들어갔다. 서러운 가난과 눈물은 참을 수 있겠는데 중학교 교복 입은 친구들의 부러운 모습은 못 잊겠더라. 그들처럼 교복을 입고 싶어 공장 불빛 아래서 몰래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다 공장 촉새 형에게 뺨이 붓도록 맞았다.

"어디서, 쥐뿔도 없는 새끼가 건방을 떨어. 공돌이 새끼가 공부는 무슨 공부냐고..."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촉새 형도 질렸는지 모른 척했다.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려고 월급을 모았다. 허기를 참으면서 이 악물고 1년간 모은 돈을 둘째형이 가지고 튀었다.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준 이는 월남전에서 돌아온 셋째형이었다. 형의 목숨값으로 야학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해 대학에 들어갔다. 그렇게 눈물 젖은 밥을 먹으며 향학의 불을 태우며 대학생이 됐지만...

사람들아,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를 들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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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에서 만난 소설가 이인휘. 그는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 조호진

그를 처음 만난 건 1980년 말 구로동 산동네 혹은 가리봉시장 어디서쯤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의 광주 학살을 알게 되면서 받은 충격으로 대학을 그만둔 후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다 구로동에 정착한 그는, 분신자살한 노동자 박영진 추모사업회를 만들고 <활화산> 등의 노동소설을 쓰면서 노동자 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었다. <삶이 보이는 창>은 그의 헌신 덕분에 노동 문예지로 한층 성장했다.

구로공단 프레스공인 나는 노동시를 쓰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이내 허공에 종 주먹질하고 말았다. 노동해방의 깃발이 찢겨지고 노동문학이 곤두박질치면서 그와 나는 패잔병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찢긴 깃발보다 더 위태로운 건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삶이었다. 그는 아픈 아내를 부여안고 시골로 떠났고 나는 무너진 삶의 잔해더미에서 생존의 몸부림을 쳤다.

밤새도록 우짖는 새야
어둠을 가르려고 부리에 피 흘리는 새야
무엇을 잃어버렸니 무엇을 기다리는 거니
바람도 네 슬픔을 피해 가는 이 밤
생을 다한 유성이 빛을 뿌리며 사라지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사라질 것을
노래를 불러주리 내 노래를 들어 보렴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를 들어보렴

(이인휘의 장편소설 <건너 간다> 중에서)

다시는 부르지 못할 줄 알았다. 부르긴 했으나 흘러간 노래라고 무시당했다. 폐허의 가슴으로 부른 노래는 강을 건너지도 못한 채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한 사내가 저문 강을 건넜다. 겉은 화려한 것 같으나 속은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 패역의 강을 건너면서 밤새 우짖었다. 내 노래를 누가 들어주랴, 통한으로 가슴을 치던 사내의 노래가 파문을 일으켰다. 문학 동네의 흘러간 옛 노래, 다들 거들떠보지도 않던 노동자와 민중들의 이야기가 깃을 치며 날개짓한 것이다.

지난해 가을, 이인휘(59)의 소설집 <폐허를 보다>(실천문학사)가 제3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그의 작품을 만장일치로 선정한 심사위원회는 "<폐허를 보다>는 오늘날 1980년대와 본질에서 달라진 바 없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억압적 정치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낸 소설집으로, 기존 노동소설의 경직된 형식이나 교조적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사실과 허구의 절묘한 배합을 통해 절절한 감동을 안겼다"고 높이 치하했다.

만해문학상 수상 이전까지 그는 병든 아내와 사는 관덕마을의 불우한 이웃에 지나지 않았다. 외지인인 그를 주목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고 말았다. '만해문학상이 그렇게 큰 상이여?', '엄청 큰상인 게비여!' 수상 소식을 들은 부론면 정산4리 주민들이 만해문학상 수상을 경축하는 플래카드를 읍내와 마을에 내 걸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경축할 일은 상금 3천만 원으로 아내의 병 치료 때문에 진 빚의 일부를 갚은 것이다.

"이대로 살다 죽을 것만 같아 내가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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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아내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호떡공장을 다니던 소설가 이인휘. ⓒ 이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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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공장에서 호떡을 굽고 있는 소설가 이인휘 ⓒ 이인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관덕마을, 남한강 언덕배기에 집 한 채 지어 놓고 아픈 아내를 간병하며 시골 공장에서 호떡을 뒤집으며 살던 그는 소설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병으로 빚은 쌓이고 세상은 더 나빠졌으며 게다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다. 이대로 폐허에 묻혀 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시들어 버린 가슴, 활화산처럼 뜨겁던 가슴은 어디로 갔나.

그는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아내를 낫게 해주지도 못하고, 악덕 사업주에 시달리는 공장 아주머니를 구해 주지도 못할 뿐 아니라 노래도 부르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어느 날, 고물 자동차를 운전하며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는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찢기는 통증이 차오르고 숨이 막히면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건 눈물이 아니라 통곡이었다. 그는 폐허의 가슴을 뒤흔드는 노래를 부여잡고 다시 글을 썼다. 날자, 날자, 한 번은 날아보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훠이, 훠이.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 '의 일부)

그는 <폐허를 보다>(2016년 실천문학사)와 <건너 간다>(2017년 창작과비평사)를 쓰면서 자신의 해묵은 상처를 씻고 싶었다. 짓물러진 상처의 진물을 닦아내면서 스러져 간 죽음들과 착취로 신음하는 이들의 아픔을 씻어주면서 폐허의 땅에 붉은 꽃을 심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 혹은 민중문학은 재미없다는 편견도 깼다. 그는 만해문학상 시상식에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문학상이라는 걸 받습니다. 나는 소설을 잘 못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상을 주시니 민중이라는 말을, 노동자라는 말을 더 멀리 전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의 심장에 오롯이 새겨진 두 단어는 노동자와 민중이다. 비록 상을 받았지만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세상, 더 빼앗기고, 더 당하기만 하는 착한 이웃들을 괴롭히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더 커졌다. 만해문학상 수상으로 달라진 게 있다면 목을 조르는 빚의 일부가 느슨해지면서 아픈 아내의 얼굴이 밝아진 것이다. 집 앞 꽃밭에 핀 노루귀 꽃이 앙증맞게 피었다며 환하게 웃는 아내가 고맙다. 노동문화운동에 미친 듯이 투신하느라 가정을 등한히 한 남편으로 인해 7년간이나 병에 시달린 아내의 병이 호전되고 있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이인휘와 정태춘의 합작품 <건너 간다>... 우리는 건너가야만 한다, 이 아픈 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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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휘의 <건너 간다>(창작과비평사) ⓒ 창작과비평사

그는 <건너 간다>를 쓰기 위해 공장을 그만두었다. 최소한 한 달 100만 원은 있어야 생활과 병원비가 해결되는데 막막했다. 그의 딱한 처지를 눈치챈 벗이 300만 원을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3개월간 버티며 초고를 끝냈다. 그런데 돈이 또 떨어졌다. 출판사(창작과비평사)와 계약하면서 300만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탈고를 거듭했다. 작품을 쉽게 털어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작업이 예상보다 1년이나 길어졌다. 아내 몰래 집문서를 저당 잡혀 대출을 받았다.

전업 작가로 먹고 살려면 팔리는 소설을 써야 한다. 어떤 출판사도 돈이 안 되는 작품은 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흥미와 재미라는 교태를 부릴 자신이 없다. 쓰고 싶지 않은 소설은 써지지 않으니 어쩌면 좋으냐. 서릿발 같은 각오로 목숨을 걸고 쓴 것은 그 때문이다. 날 선 언어로 엮은 밧줄 같은 문장, 그는 그 밧줄에 목을 매고 글을 썼다. 문예 노동자인 그가 지향하는 작품의 방향과 투쟁의 각오를 들어보자.

"화려하게 꾸민 문장보다는 생명의 숨결이 파도치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 나의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너의 아픔을 느끼고 나와 너를 아프게 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저항하는 글을 쓰고 싶다."

<건너 간다>는 그가 살아온 아프고 고단했던 생을 펼쳐놓은 글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작품을 나누고 싶어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은 것보다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들의 삶을 들려주고 싶어서다. 특히, 젊은 독자들이 읽기를 고대한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흘러간 노래가 아니다. 저주받은 시절이 아니다. 다시 부르고 새겨서 나아가야 할 세상이다.

"내가 다시 쓰기 시작한 최근 소설의 화두는 '폐허'였다. 그건 단순히 폐허라는 절망의 상태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폐허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뼈아픈 각성을 해야만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절박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이 세계의 희망이라는 거대 담론은 제쳐두더라도 내가 품고 살 수 있는 작은 희망을 찾고 싶었다. 폐허를 넘어서 희망을 건져 올리듯 소설을 쓰면서 내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건너 간다> 78쪽)

그는 <폐허를 보다>와 <건너 간다>로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두 작품에는 가슴이 아팠고, 처절했고, 찬란했던 사람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너 간다>는 그냥 읽을 소설이 아니다. 패배하고, 도망가고, 쫓겨났던 처절한 시대를 다시 불러와서 만져주고 위로하면서 우리, 이대로 주저앉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거리와 공장과 그 어두운 곳에서 죽은 우리들의 꿈과 희망을 우리가 일으키면서 다시 부를 부활의 노래다.

"내가 다시 쓰기 시작한 최근 소설의 화두는 폐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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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3일 구로아트벨리에서 열린 '이인휘×정태춘 북콘서트' ⓒ 조호진

그의 소설의 배후인 가수 정태춘이 <건너 간다>를 읽고 문자를 보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새 작품, 잘 읽었구먼. 같이 아프고 같이 분노하고... 전작들의 성과를 뛰어넘는 리얼리티와 밀도나 집중력, 글의 진정성과 힘... 수고 많았네."라고 문자로 축하했다.

그리고는 지난 3월 23일 '이인휘×정태춘 북콘서트'를 마련했다. 500석의 객석이 꽉 찼다. 정태춘은 이 자리에서 <건너 간다>의 마지막 문장 "하태산(정태춘)의 노래가 강으로, 장엄한 촛불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라고 희망을 제시한 것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건 두 사람의 다른 것 같으나 다르지 않은 시대 진단이었다. 진정성을 그대로 나누는 그들의 교감 방식이었다.

"<건너 간다>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다. (이인휘 작가는) 소설을 마무리하면서 하태산을 통해 낙관적인 결론을 내렸는데 안타까웠다. 내가 썼다면 낙관적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12일) 광화문 촛불 집회에 나간 것은 낙관적인 전망 때문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현실과 변하지 않은 세상이 여전히 절망스럽다. (이인휘 작가는) 나를 통해 낙관적으로 세상을 봤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불만을 참은 것은 이인휘가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광화문에 나가서 ('92년 장마, 종로에서') 한 곡만 노래하고 준비된 글만 읽은 것은 내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희망을 만들고 싶은 작가의 선의와 내 생각은 다르지만 박수 치고 싶다. 나는 대중을 믿지 못해 노래를 만들지 못하지만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작가의 선의와 노력에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인휘 작가의 책이 많이 팔려서 인세를 많이 받았으면 좋겠고 여건이 되는 만큼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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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관덕마을에 사는 소설가 이인휘. ⓒ 조호진

우리 곁을 떠난 그리운 가객 정태춘이 북한강 강물처럼 잔잔한 말을 마치고는 후배작가 이인휘와 관객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 진정한 사람의 말과 노래는 상한 마음을 이렇게도 절절히 씻겨주는구나. 진보든 보수든 할 것 없이, 동지든 배신자든 할 것 없이, 부자든 빈자든 할 것 없이, 기독교든 불교든 할 것 없이 다들 욕망에 미쳐 날뛰는 이 세상 어디에서 이런 진실한 말과 노래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랴. 눈물 나는구나, 사람아, 참 사람아!

게다가 정태춘과 이인휘는 이 아름다운 무대를 한 푼의 출연료도 받지 않았다. 돈 독(毒)에 오르지 않은 어떤 돈 있는 이가 북콘서트 비용을 대준 덕분에 우리들은 최상의 공연을 거저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두 사내에게 염치없이 청원한다. 부디 진실한 노래와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시라. 아픔에 귀가 멀고 눈이 멀어버린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 세례를 베풀어 주시라. 세상은 우리를 또 다시 속이겠지만 억척같이 일어나 새 노래를 불러주시고 새 작품으로 우리를 뜨겁게 해주시라.

그대, 고마울 따름이다. 그대들의 노래로 인해 막혔던 피가 돈다. 갑자기 쓰러져 119 구급차에 실려간 그날 저녁, 응급실에서 촌각을 다투던 그해 겨울, 혈관 하나만 막혀도 끝장나는 게 목숨이란 사실을 깨달으면서 세상 별것 없으니 피 토하지 말고 살자던 냉소의 가슴에 피가 돈다. 고마운 그대여, 우리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  다시 만나면 소주 한 잔 대접하리다. 피 돌게 하는데 소주만한 술이 어디 있으랴.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시다 견딜 수 없으면 그대를 부둥켜안고 춤을 추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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