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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납치한 소년, 그게 접니다
[선감도의 비극⑬-1] 김지철 선감학원 피해자 이야기
2018년7월25일 (수) 이민선 기자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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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김기철 씨와 그의 아내. ⓒ 이민선

실없는 농담이라도 한마디 건네면 시원하게 웃어 줄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저렇게 해맑아도 되는 것일까? 아마도 천성이리라. 말씨도 부드러워 금세 친근감이 들었다. 방금 만났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오랜 시간 고객을 상대해서 그런 것일까?

김기철(62)씨 첫인상이다. 그를 지난 18일 오전 그의 일터(인천 산업용품 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점포를 4개나 운영하는 꽤 규모 있는 산업용품점 '사장님'이다. 고무 패킹(packing) 종류 도매점으로는 수도권에서 빠지지 않는 규모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함께 일하는 부인도 웃음기 있는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그의 아들 또한 명랑한 성격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 달에 얼마나 버세요?'라고 묻자 "에이 얼마 안 돼요, 그냥 밥술 뜨고 삽니다. 세금 잘 내고 있고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프로 사업가다운 절제된 답변이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몸 어디에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숨어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몇 살에 붙잡혀 가셨어요?'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때서야 선감학원의 기억이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그의 영혼을 지금도 갉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외삼촌 집에 엄마 있다고 소리쳐 봤지만,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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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씨 선감학원 원아대장 ⓒ 이민선

선감학원은 일제 강점기에 세워져 군사독재 시기인 1982년까지 운영된 소년 강제 수용소다. 지금은 방파제 등으로 연결돼 육지처럼 됐지만, 선감학원이 운영될 때만 해도 그곳은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힌 섬이었다. 당시 그 곳에서 엄청난 고문, 폭행, 강제 노동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는 경기도가 맡아서 운영했는데, 일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폭압적인 방법이 동원됐다. 국가는 부랑아 단속이라는 이름으로 소년들을 강제로 끌어가 수용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경쟁적으로 소년들을 붙잡았다. 그러다 보니 멀쩡히 부모가 있는 아이를 데려간 경우도 부지기수다. 유괴를 한 것이다.

소년들은 그 섬에서 질병, 폭력, 굶주림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죽은 소년들은 변변한 장례식도 없이 섬에 있는 공동묘지에 암매장되듯 묻혔다. 그 공동묘지에서 매년 위령제가 열린다. 살아남은 이들이 한때 동료였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사다.

소년 기철은 서울 창신동 외삼촌 집 근처에서 1967년께 경찰에 붙잡혔다. 그의 나이 10살 즈음이었다. 왜 붙잡혔는지는 모른다. 가난해서 남루한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게 유일한 이유였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 경찰을 만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를 왜 잡아갔느냐'고 따지고 싶은 게 기철씨 심정이다.

느닷없이 허리띠를 잡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저~기 외삼촌 집에 있다"고 소리쳐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얀 차에 던져지듯 실렸다. 억울했지만 항의할 새도 없이 파출소를 거쳐 시립아동보호소로 넘겨졌다. 기철씨의 고아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후리가리(일제단속)를 당한 거지요. 집을 찾아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숫자(할당량) 채우기에 급급했던 거죠. 아동 보호소에 있을 때 집이 천호동이라고, 엄마 아버지(새아버지)가 그 곳에 있다고 수차례 말했는데, 돌아온 건 매밖에 없었어요.

집 주소는 정확히 몰랐지만, 사는 곳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거든요. 잡혀 가기 전 살던 곳이 천호동이었어요. 사이다 맛이 나는 약수터가 있는 동네입니다. 성인이 된 다음에 두 번이나 찾았어요. 한번은 혼자서, 한번은 아내와 함께. 그런데 어머니는 못 만났어요. 이미 돌아가셔서."

막사 문 여는 게 지옥 문 여는 것만큼이나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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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씨, 그가 판매하는 물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이민선

선감학원은 일 년 가까이 있었던 시립아동보호소라는 지옥과는 차원이 다른 지옥이었다. 우선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힌 섬이라는 게 공포 그 자체였다. 바다가 육지와 부딪히면서 내는 '철썩' 소리와 바람이 바닷물을 스치면서 내는 '쉬익' 소리가 마치 '절대 도망 칠 곳은 없다'라는 엄포처럼 들렸다.

매질도 시립아동보호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더 지독했다. 첫 날부터 시작된 매질이 1년 365일 중 300일 가까이 지속됐다. 매질은 주로 막사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래서 막사 문을 여는 순간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 짧은 순간에 느낀 두려움은 지금도 기철씨 뇌리에 생생하다. 바늘 하나 잃어버린 죄로 겨우 대여섯 살 많은 반장한테 엉덩이, 손바닥, 종아리를 50대 넘게 맞고, 밥까지 한 끼 굶어야 한 그 참담함은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잊히지 않는 억울함이다.

정말 괴로운 것은 원치 않아도 남을 때려야 하는 일이다. 누군가 탈출하다 붙잡혀 오면 식당 앞에 세워놓은 다음 몽둥이로 한대씩 치게 했는데, 살살 때리면 엄청난 보복이 뒤따랐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내려 쳐야 했는데, 소년 기철한테는 자신이 맞는 것보다 더 고통이었다.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꽁보리밥에 국이나 곤쟁이젓이 반찬의 전부였지만, 반찬 투정을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마저도 늘 부족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산에 있는 풀이나 맹감나무 씨로 허기진 배를 달랬는데, 많이 먹으면 항문이 막혔다. 그럴 때마다 나뭇가지로 서로 항문을 뚫어주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밀물에 떠밀려 온 마가린 찌꺼기까지 끓여 먹었지만, 소년들의 배고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허리 펼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는 노동도 어린 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뽕잎 따고, 누에 똥 치우고, 누에한테 밥을 주기 위해 잠을 못자는 경우도 허다했다. 밭도 매야 했다. 선생님 집 청소하고 물 길어주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종처럼 부려 먹으면서 돈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때 선감학원이 누에를 팔아서 얼마나 벌었는지 알아보는 게 그의 소원이다.

이보다 훨씬 더 힘든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단 한번이라도 엄마 얼굴을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소년 기철은 늘 괴로웠다. 낳아주지는 않았지만 친절했던 새아버지 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엄마를 만나면 친아버지가 누구냐고 꼭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그가 친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것은 성이 '김'이라는 것뿐이다. 그를 낳을 때쯤 어머니는 그의 친아버지와 어떤 이유에선지 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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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씨가 선감학원에서 받은 양잠반 졸업장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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