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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자매'에 맞서다 죽은 이탈리아 실업가

[해외리포트] 사망 51년, 석유메이저에 대항한 마테이 사건의 전모

등록|2013.10.27 11:59 수정|2013.10.27 16:32
해마다 10월이 되면 이탈리아인들에게 기억되는 특별한 인물과 사건이 있다. 요즘처럼 경제불황과 정치혼란을 함께 겪는 이탈리아에서는 더욱 그렇다. 텔레콤(이탈리아 통신국), 알리탈리아 항공사(이탈리아 국영 항공사) 등이 속속 해외자본에 넘어가고, 백화점 업계에까지 앵글로색슨 자본이 투입되고 있다는 소식까지 더해져 죽은 인물에 대한 향수를 더한다. 

해당 사건은 1962년 10월 27일 비행기 폭발사고로 암살당한 엔리코 마테이(Enrico Mattei)와 관련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국영석유기업 ENI 초대총재였다.(ENI는 현재 골드만삭스 소유다.)

마테이는 2차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경제 기적을 이뤄낸 입지전적인 인물로, 케네디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이탈리아 친구"라고 표현했던 사람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실업자이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2차 대전이후 패전국 가운데 가장 큰 경제부흥을 이룬 국가는 일본과 이탈리아다.)

미스터리한 '마테이의 죽음'

▲ 마테이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다룬 영화 <마테이 사건>의 한 장면. ⓒ 마테이 사건


마테이 암살사건은 영화 <마테이 사건(Il Caso Mattei')>(프란체스코 로시 감독, 1972년 제작)로 만들어져, 칸과 베니스 영화제 등에서 황금종려상과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62년 사건 발생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마테이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영화감독 로시의 부탁으로 이 사건을 밀착 취재하던 언론인 마우로 데 마우로(Mauro De Mauro)는 "마테이사건의 배후를 드디어 알아냈다. 이탈리아를 발칵 뒤집을 특종감"이라는 전화를 마지막으로 1970년 9월 16일 자신의 숙소에서 실종됐다(암살추정). 그의 실종을 추적하며 수사하던 특수경찰대의 수석지휘관 카를로 알레르토 달라 끼에자(Carlo Alberto Dalla Chiesa)는 마테이사건을 비롯해 1978년 납치, 피살된 알도모로(Aldo Moro) 이탈리아 총리의 배후를 동시에 밝혀내는 '어떤 서류'를 목격했지만 공교롭게도 그와 그의 가족 모두 무참한 총격을 받고 살해됐다.

(이탈리아에는 1960년대에는 마테이 사건이, 1970년대에는 현직 판검사들의 연이은 총격암살사건이, 1978년에는 우파정당인 기독민주당이 공산당과 연정을 추진하던 중 알도 모로 총리가 납치 피살되는 사건이, 1980년대에는 베네치아 귀족들이 주도한 글라디오 사건(나토의 반공비밀조직) 등이 있었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전격적인 마피아 소탕작전과 그들과 연루된 정치인들을 처벌하는 '깨끗한 손(Mani Pulite)' 수사를 탄생시켰다.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는 줄리오 안드레오티(G.Andreotti) 총리(2013년 사망)가 거론되고 있다. 안드레오티는 베를루스코니를 정계에 입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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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마테이는 1906년 이탈리아 중부인 마르케지방 페사로 도시 외곽의 가난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의 바람대로 공업기술학교에 진학했고, 금속공장에서 노동견습공으로 살았다. 마테이는 틈틈이 회계를 공부해 자신이 일하던 공장의 회계업무를 보다가 그 업체의 사장으로 발탁된다. 밀라노로 자리를 옮긴 그는 화학업 중개상을 했고, 30세에는 무기거래상이 된다. 그는 2차대전 당시에는 시민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던 그는 1944년 기독민주당 간부 자격으로 3일간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고, 그후 죠반디 론키(G.Rochi, 1955~62년 이태리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1945년 그는 북부이탈리아 민족해방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국영석유기업체이던 AGIP(Azienda Generale Italiana Petroil)을 맡게 된다. AGIP는1953년에 새로 창립된 국영기업체 ENI(Ente Nazionale Idrocarburi)에 편입돼, 마테이는 ENI의 초대총재가 된다.

7자매와 맞서 싸운 마테이

당시 유럽 국제석유 메이저는 로열더치쉘(Royal Dutch Shell. 네델란드계이나 영국자본가인 로스차일드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과 브리티시 페트롤륨(British Petroleum. 현재 BP+미국 아모코(amoco)가 합병)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에는 미국 영향력이 확대돼 유럽에는 앵글로색슨업체들이 메이저가 된다. 해당 미국 업체들은 다음과 같다. 

'스탠더드 오일 캘리포니아(Standard Oil of California.현재의 셰브론). 스탠더드 오일 뉴저지(Standard oil of Newjersey. Exxon의 모태. 현재 엑슨모빌).  텍사코(Texaco inc.). 소코니 버큠(Socony vacuum. 모빌의 모태이며 현재의 엑슨모빌). 걸프오일(Gulf Ol Company. 현재 셰브론(Chevron corp) 일부)' 

이 5개는 모두 록펠러 스탠더드 트러스트에서 분리된 업체들이다. (엑슨과 모빌은  자산규모에서 현재 세계최대의 에너지기업이고, 원래 한뿌리에서 탄생했던 기업들이다. 록펠러는 정유사업을 시작으로 그외 무기, 금융산업으로 분야를 넓혔는데, 로스차일드의 도움으로 사업확장을 해낸다.)

유럽의 두 업체와 미국의 스탠더드 계열 석유회사는 1928년 서남아시아의 석유 이권에 대한 '아크나카리 협정'(Achnacary Agreement)'을 시작으로 국제석유산업에서 그들만의 카르텔을 맺게 된다. 그러다 2차대전 이후 미국석유회사가 추가 편입, 확대되면서 국제석유시장에서 그들은 범국가적 파워를 공유하게 된다.

이들 7개 업체들은 모두 앵글로색슨계열기업이고 이들은 상호출자, 합작 등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7개 업체들에게 마테이는 '7자매'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그가 이들 앵글로색슨 카르텔을 맹공격하는 비상함과 수완을 보여주자, 미국 정보부로부터 '미국의 이익에 대한 위협을 가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긴급히 취하겠다'는 경고를 받기까지 했다.

또한 마테이는 이들 '7자매'외에도 프랑스 최대에너지기업인 CFP(Comanie Francaise de Petroles)와도 맞서야 했다. CFP는 7자매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이란,이라크 석유이권과 밀착관계를 갖고 세계석유시장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 이탈리아의 실업가인 엔리코 마테이.(오른쪽) 그는 국영지주회사인 에니사의 초대 총재를 지냈으며, 에너지 자립을 위해 힘을 쏟았다. ⓒ 위키피디아 공동자료 저장소


당시 유럽국가들은 필사적으로 해외에 유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1차대전 이전부터 페르시아 지역에서 원유가 생산됐기 때문에 유럽은 자연스럽게 중동지역에 눈을 돌렸다. 마테이 역시 그러했지만, 그는 석유업계 카르텔에서 철저히 고립돼 이탈리아만의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당시 그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메이저업체들이 외면하던 소규모 유전이나 노후유전 확보에 주력한다. 그 결과 이집트, 이란, 리비아, 모로코, 수단 등과 협상을 해냈고 소련의 원유를 사들였다.

둘째, 유전확보를 위한 광구매입과 개발 및 송유관제공, 공정가격거래 등으로 윈윈 방식을 채택한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 신생독립국가들과 소련에 그들이 생산하기 힘들었던 송유관을 제공하며, 이익분배를 기존의 동결금액 50:50에서 75:25로 조정해 시추국가들에게 공정가격을 제시한다.

시추국가들은 당연히 마테이를 신뢰하며 그와 거래를 원했다. 심지어 기존의 앵글로섹슨업체들을 내쫓고, 마테이의 ENI와 재계약을 원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란이다. 1951년 이란은 모하메드 마사데크(Mohammed Massadeq) 총리가 들어서자 석유산업에 대해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에 분개한 영국정부가 이건을 국제사법위에 제소하지만 기각되었다. 그리고 마사데크는 마테이와 기꺼이 오일허용권을 체결했다. 영국의 분노와 시기를 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테이 암살사건과 이라크 카셈의 기자회견 

그후 마테이 암살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된 '이라크 유전 확보' 싸움이 벌어졌다. 이탈리아의 이라크 유전 확보는 2010년 6월 이후에야 공개됐다.(발표자는 베니토 리 비니( B.L.Vigni)로, 그는 보스턴 케네디자료실과 아이젠하워 도서관 보유자료 이탈리아 무솔리니정권 국회자료를 토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공식발표했다. 그는 마테이의 수석개인비서이기도 하다. 아래 내용은 베니토 리 비니의 발표문을 참고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이미 1934년에 이라크로부터 유전산업 위탁을 받아 합작회사(Mossul Oil Field)를 만들었다. 그리고 1935년 이탈리아가 에디오피아 원전에 눈을 돌릴 무렵 영국 처칠 정부는 이탈리아를 협박해 이라크 사업지분의 재협상을 요구했고, 영국 정부의 보복이 두려웠던 무솔리니는 이라크 원전에 대한 권리를 깨끗이 모두 포기한다.( 무솔리니정권 외무부장관 증언자료 참고)  이런 과거사를 모두 알고 있던 마테이는 이라크로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1958년 마테이는 이라크 왕권를 축출하고 들어선 카셈(Khassem) 정권과 접촉했고 그해 8월 카셈은 이탈리아와 계약체결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 카셈은 이라크 석유사업 재정비작업에 들어갔으며, 마테이는 카셈에게 법적인 전문자문단과 기술진들을 제공했다. 그 결과 카셈은 60개 앵글로색슨 사업체 중 이라크에 그나마 공정거래를 한 업체는 3개뿐이란 사실과, 그들의 교묘한 착취를 알아채게 된다. 결국 카셈은 앵글로섹슨업체들을 이라크에서 내쫓았고, 대신 이탈리아 ENI에게 이라크 석유산업 공식파트너를 제안했다.

1962년 9월 16일 이라크의 카셈은 기자회견을 통해 그 모든 사실을 공식발표했다. 그 기자회견 발표와 함께 어쩌면 마테이 암살은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테이를 향한 암살경고는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알제리와 협상을 성사시켰다.암살당시 마테이는 알제리와 사인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해 12월에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의 만남이 약속돼 있었다. 

한편 마테이는 이탈리아 국내에서도 거침없는 행보로 상당한 정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두 인물을 축줄한 일이었다. 시칠리아 세력을 휘하에 둔 판파니(1954~87년까지 5번 총리 및 대통령 역임. 부인은 한국 **교 이탈리아 명예회장)와 미국정보원 역활을 한 세피스(마테이 사망 후 ENI 회장이 됨)다. 두 인물을 제거해 정치적 지지세력이 없던 마테이는 오히려 수많은 적을 만들게 된 것.

의문의 사고, 그리고 2005년에 내려진 결론

1962년 10월 27일 마테이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AGIP회의를 주재하고 밀라노로 돌아오던 중 밀라노 근교 공항에서 전용기가 폭발해 사망했다. 정부는 비행기의 정비불량으로 인한 사고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목격자들은 공항착륙 이전 상공에서 비행기가 폭발했다고 증언했다.

비행기 폭발 후 로마주재 미 정보부 책임자 '토마스 카라 메신스'는 소리 없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사건을 둘러싼 카라 메신스의 보고서 및 기타 자료들은 미국 정부의 거부로 아직까지 자료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석유 메이저회사들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마테이가 암살되었고, 그 임무를 수행해낸 것은 정치권과 깊숙이 연관된 시칠리아 마피아 세력일 것이라는 추측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마테이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7자매'는 2004년 이후에 '4자매(엑슨모빌, 쉘, 비피 아모코, 셰브론텍사코)'로 남았다. 또한 이들은 새롭게 불어온 '자원 민족주의' 추세에 밀려 점점 경쟁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들이 누리던 자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이란 국영석유회사, 러시아 가즈프롬, 중국 석유가스집단,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베네수엘라 PDVSA, 브라질 페트로브라스 등에 넘어가고 있다.

마테이가 이끌던 ENI는 1995년 주식시장에 상장되었고, 1998년 이탈리아 정부는 주식의 과반수를 개인투자자에게 넘겼다. 그후 2004년 ENI는 골드만삭스 소유가 됐다.  2005년 마테이 사건은 재수사가 시작돼 마테이와 조종사의 시계 및 유품, 파편들을 조사해 200파운드의 폭발물이 부착돼 있었던 사실을 밝혀졌다. 그리고 마테이 사건은 사고가 아닌 '암살'로 결론 났다.

한편 당시 마테이의 전용기가 있었던 시칠이아 카타니아지역 군 공항은 나토(NATO)가 관리하던 공항이었고, 10월 18일부터 사고당일인 27일까지 군 당국의 명령으로 모든 비행 및 접근이 금지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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