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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이 '노가다 목수'를 하는 이유

['노가다'전] '노가다 목수' 임영웅 목사 이야기

등록|2017.08.17 07:14 수정|2017.08.17 09:32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죽으면 지옥불에 떨어지는 무신론자'다.

중·고등학교 시절 3년 정도 교회를 다녔다. 그땐 집안 형편이 나락으로 떨어져 하나님에게 향해야 할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지만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오직 내 상념은 '지독한 가난이 어찌해서 나에게 떨어져야 했는지'만을 향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나를 교회로 이끌었던 어머니는 쌀도 외상으로 사고, 김치도 없는 밥상을 서글프게 차려야 하는 형편에도 주일 아침이면 내게 500원을 쥐여주었다. 교회 헌금용이었다. 용돈이라는 말은 들어는 봤어도 받아 본 적이 없던 나는 어느 주일부터는 하나님에게 가야 할 헌금을 꼬불쳐서 학교 매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에게 500원이 왜 필요한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한창 커야 할 나이에 당장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내겐 더 절실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말하지 않는 '노가다 목사님'

기독교 전도 1993년 11월 1일, 행인들의 발길이 잦은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전도하고 있는 기독교인. ⓒ 연합뉴스


성인이 돼서도 나는 신을 믿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한국 주류기독교가 인류가 지닌 보편적 가치의 종교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인식에 동의했다. 사람들 붐비는 인도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팻말을 높이 들고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사람들을 볼 때는 공포까지 일었다.

마음에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게 왜 죄가 되어야 하는지, 왜 지옥에까지 떨어져야 할 일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물으면 인정사정 없이 혼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은 결기 어린 표정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함께 잘 지내던 언니와 재미나게 놀다 집으로 온 초등학생 딸아이가 두려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빠, 언니가 그러는데 예수님 안 믿고 교회 안 다니면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대. 그럼 나도 지옥에 가는 거야?"

지옥에 떨어지기 싫어 '열심히' 다니는 그 언니에게 교회는 무엇이고 지옥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옥에 떨어질까 무서워 교회를 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며칠을 고민했을 딸아이에게 교회는 무엇일까를 나는 생각했다. 누가 그 어린것에게 성령 충만한 교회 문의 첫발을 공포심으로 내딛게 하려 했을까. 왜 교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오직 성령으로 인도하지 않고 죄와 공포로 끌어들이려 하는 걸까.

가까이에 '노가다 하는 목사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거룩한 목사님과 천박한 노가다라니. 일반의 상식을 뒤집는 문장 앞에 두 눈이 번쩍였다. 적어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내 눈 앞에 들이밀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신뢰가 불쑥 솟았다.

지인을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예상은 반반이었다. 즉시 온 답은 거절이었다. 재차 요청을 넣었다. 즉시 와야 할 답이 몇 주를 미루어지다가 '하겠다'는 답이 왔다. 결정이 바뀔까 두려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 집 근처라는 전북 완주군 봉동읍 카페에서 만났다. 평범한 키에 다부진 체격. 넉넉한 웃음 뒤에 단단한 인상을 감추지 못했다. 노가다 하는 목사님이란 말이 금방 수긍이 갔다.

▲ 3년 전 서재에서 ⓒ 임영웅


노가다 목수로 일하는 임영웅 목사

이름 임영웅. 전라북도 전주시 소재 (한국기독교침례회)주양교회를 신학대학원 동기 목사와 함께 이끌고 있다. 1962년생, 한국나이로 56세. 아내와 열여덟, 열일곱 연년생으로 남매를 두었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북 여산과 충남 논산 등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바람을 폈고 가정을 팽개쳤다. 전라북도 김제가 고향인 어머니 혼자 2남 3녀를 키워냈다. 장남이었던 그는 어머니의 모진 고생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랐다.

크리스천 집안은 아니었다. 어머니 기억으로 다섯 살 무렵 가까이 지내던 이웃집 삼촌 등에 업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그만큼 궁금한 게 많았다. 교회 목사님이 무조건 믿으라고 말할 때 알고 믿으면 더 좋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국기독교의 현실을 조망하고 진단하는 목사인 그의 시선과 기독교 밖에서 외부자로 살아가는 내 시선이 제법 비슷한 곳에 위치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대에 들어갔지만 한 달 만에 그만 두고 이듬해인 1981년 대전에 있는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일 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어머니 혼자 힘으로 동생들 대학등록금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기초훈련을 마치고 대북응징보복부대로 차출되었다. 이른바 '북파부대'였다. 투입되기로 한 건 서쪽 휴전선 머너로 비밀리에 침투하여 특정된 지역의 지점을 때리고 거둔다는 일명 '망치작전'이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훈련을 받았다. 몇은 사선을 넘어 돌아오지 못해 죽었고, 몇은 사선 경계를 오가는 동안 미쳐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때 겨우 살아남은 동료 중 하나가 후에 임 목사를 노가다 목수의 길로 인도했다.

제대를 했지만 복학할 수 없었다. 너무 가난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 할 형편이었다. 대전에서 서울에서 작은 회사 사무원으로 전전했다. 동생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칠팔 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어느새 서른의 나이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다니던 교회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였다.

대학시험을 다시 치루고 오래 전 복학할 수 없었던 대학에 재입학했다. 전도사를 하는 아내의 도움이 컸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큰 교회 전도사로 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목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였다. 전도사 면접을 볼 때 교회에서 가진 관심은 그의 신학사상이나 가치관이 아니었다. 목사는 그가 운전을 잘 하는지 컴퓨터는 잘 다루는지 새벽에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지를 따졌다. 신앙이 아닌 업무실력이 주요 질문이었다. 함께 사목활동을 하는 목회자가 아닌 교회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햇병아리 직원으로 뽑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을 때 청주로 내려가 개척교회를 세웠다. 이어지는 질문과 답은 개척교회를 세운 이후 지금까지 그가 지나왔던 삶의 궤적과 생각의 편린들이다. 평일에는 건설현장에서 목수로 노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목사로 설교하며 임영웅 목사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 대학원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 임영웅


- 개척교회를 하시면서 어린이집 차도 운전하고 노점도 했어요?
"처음부터 신도 수에 연연하지 않았어요. 신도 수가 적으면 교회 운영이 안 돼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 눈에 닥치는 일을 했죠.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자주 하는 말씀 중에 '믿으라'는 말이 있어요.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거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한국 교회의 95%가 지금도 그런 보수적인 목회를 해요. 겁박하고 협박하는 목회를 해야 사람들이 모이는거죠. 일요일 교회를 빠지면 저는 '무슨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잘 다녀오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보통 교회들은 교회 빠지면 하나님이 곧바로 천벌이라도 내릴 것 같은 험한 분위기를 조성하죠."

- 목사님은 기존 교단에 대한 문제의식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가졌다고 하셨는데요?
"교단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요."

- 본래 의미의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한국에서의 기독교 신앙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 신학대학원까지 다녔는데도 해소가 안됐네요?
"해소는 됐죠. 그렇지만 신학과 신앙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할까요. 신학은 껍질이에요. 신앙이 알맹이죠. 껍질 없는 알맹이는 없잖아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껍질은 필요 없다' 이거예요. 알맹이만 건강하면 된다고. 신학이 뼈대를 잡아주는 울타리인데 그래야 그 안에서 꽃도 피우고 그럴 수 있는데 마치 울타리가 없는 자유분방함이랄까. 체계가 없는 거죠. 꿩 잡는 게 매라고 사람만 많이 잡으면 된다. 그래야 실력 있고 영력 있는 목사가 돼요. 한국 교회는 신앙생활을 할 때 본질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아요."

-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내부에 들어가서 그걸 바꿔보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교인들한테 죽어서 좋은 데 갈라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말을 기존 교회에 들어가서는 할 수 없죠. 무당들이나 하는 말을 목사들이 하고 있어요. 사후세계에 대한 건 엄밀하게 말하면 예언이잖아요. 성서에서 말하는 예언자들은 역사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어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데 잘못 가고 있다."

- 합리적인 추론인가요?
"합리적인 것이죠. 이 사회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예언이죠. 큰 교회 목사들이 박근혜를 위해 기도하는 건 예언이 아니죠. 누가 보아도 국정농단이고 법적으로도 탄핵이라는 결정을 받았어요. 전두환이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그 공으로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초석을 만드는데 그때 당시 한국 기독교를 이끌던 23명의 교회지도자란 사람들이 대장 진급을 기념하는 조찬기도회를 호텔에서 성대하게 열어요.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는데 그 기도회가 큰 힘이 되었다고 훗날 책에서도 술회를 해요. 그게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들이 한 유명한 예언이죠. 기껏해야 권력의 밑이나 닦아준 건데 말이죠."

"한국의 큰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에는 관심 없어"

▲ 3년 전 아들 침례식 때. ⓒ 김지영


- 목사님은 처음부터 큰 교회 들어가서 목회할 마음이 없었네요?
"없었죠. 그것도 다 연줄이라. 몇 번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저도 사람이라 고민을 많이 했죠. 막말로 거기 가면 좋은 차 나오고 경제적인 문제 해결되고. 종교의 권력화란 말 있잖아요. 대표적인 게 서울 사랑의 교회인데, 지하철 문을 열면 교회 정문이란 말이죠. 교회 땅도 아니고 서울시 땅인데. 그 교회에 누가 나와요. 아마 한국을 주무르는 권력기관의 힘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명단을 차지하고 있을 거예요. 교회권력이 곧 국가권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죠. 교회가 그래선 안 됩니다. 교회는 약자와 강자가 모두 중요한 존재예요. 부자들의 영혼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도 똑같이 중요하죠. 유난히 한국의 큰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에는 관심이 없어요."

- 전주에 오셔서 '노가다'에는 어떻게 입문하시게 되었나요?
"처음부터 노가다를 한 건 아니에요. 청주 교회를 정리하고 전주로 와서 '타코야끼' 노점을 계속 운영했어요. 그러다 북파부대 동기가 소개해줘서 목수 '오야지'를 만나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어요."

- 신학대학원까지 나오고 현직 목사인데 노점이나 노가다 같은 걸 하는데 망설이거나 거부감은 없었나요?
"보통 목사들은 그런 일 안 하죠. '뽀다구' 나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으면 사모님이 다른 일을 하거나 하죠. 그래도 목사인데 아무 일이나 할 수 없다는 생각인 거죠. 그러니까 요즘 목사들이 사회복지 사업에 '올인'을 해요. 목회하고도 연관되고 수입도 되거든요.

저 같은 경우 교회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고요. 처음부터 신도 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았어요. 십일조 자체도 아예 없어요. 교회 월세 내고, 아이들 와서 밥 먹고 기본적인 운영을 하려면 어쨌든 수입이 있어야 돼요. 저는 그냥 여러분들이 상식과 이성으로 돈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해요. 나머지는 목사가 무슨 일을 해서든 알아서 채우는 거죠. 제 눈에 다른 '뽀다구' 나는 일이 보였으면 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 눈에는 그저 노점이나 노가다 같은 일들만 보이더라고요."

- 교회 신도 수가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목사는 사회 주류고 무조건 잘 먹고 잘사는 줄 알아요. 평균적으로 일 년에 각 교단마다 백 개 교회가 세워지면 살아남는 교회는 그중 하나에요. '미자립교회'라고 하는데 이게 지금 전체 한국 교회의 50%가 넘어요. 세워졌다 사라지는 교회들이 훨씬 많아요. 큰 교회는 전도하지 않아도 교회가 커지는 반면 작은 교회는 계속 사라지는 거죠. 우리 교회는 출석 신도가 이삼십 명 정도 돼요. 그것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대학원 동기 목사랑 교회를 합쳤어요. 그 친구도 따로 일을 하고 저도 일을 하고."

- 설교하실 때는 주로 어떤 말씀을 하시나요?
"'무조건 믿지 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건 맹신이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 성서의 천국이란 표현도 잘못됐어요. 대한민국의 영토가 어디냐면 통치자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죠. 하나님 나라는 어디까지냐. 하나님 통치가 미치는 곳이죠. 그게 어디냐면 사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 상도 하나님 나라죠. 이 땅에서 내가 힘들고 고생했지만 죽으면 천국에 간다? 그건 아니다. 지금 이 사회가 불의하고 어수선한데 여기서 방관하고 침묵하는 것이 범죄다. 그렇지만 보수적인 교인들은 이 말을 굉장히 싫어하죠. 찬송가도 사회성은 모두 빠져 있고 영생, 복락, 축복 이런 것에만 맞춰 있는 거죠."

- 기복신앙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건가요?
"종교가 기복적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말자는 거죠.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게 기복인데 그건 사후의 문제고 신의 영역이고요.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삶 주변에 불의하고 잘못된 것을 외면하지 말자는 거죠."

- 목사님이 노가다 현장에서 목수 일을 하시는데 다른 분들의 시선은 어떤가요?
"신앙이 없는 불신자들은 대단하다고 하고 신앙이 있는 분들은 '목사가 왜 그래, 기도해야지' 이런 식이죠. 하지만 저와 비슷한 경우가 드러나지 않게 많이 있어요. 큰 교회 중심으로 목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이 있으니까 그런 시선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죠."

- 목사님이 가지고 계신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제 신앙적 모토는 쉼, 일치, 기다림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신앙 자체가 영혼의 안식, 쉼인데 헌금 내야 한다. 봉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런 것들에 너무 얽매여 있죠. 그다음 일치는 '니 교회 우리 교회' 따지고. 한 예수님을 믿는데 교회가 하나로 되지 못하고 어떻게 세상에 하나님을 외칠 수 있느냐는 거죠.

저는 침례교 목사지만 교파의식이 없습니다. 기다림은 그거예요. 불교는 '윤회 수레바퀴 역사관'이잖아요. 기독교 역사는 '직선사관'이에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거예요. 시한부 종말론자들 때문에 그런 말을 기피하는데, 기독교는 원래 종말을 위해서 가는 거예요. 다만 그 종말이 시작인 거죠. 종말론적 삶. '예수가 이천 년 전에 왔는데 다시 안 오더라, 그래서 뻥이다'라고 말을 하는데 영원한 시간에서 이천 년은 점도 안 되는 시간이잖아요."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종말론적 삶에 있어서 사후에 가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건 신의 영역이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불의한 일이 있다면 혼자 고칠 수 없어도 흔적이라도 남겨보자. 그러면서 부단하게 부대끼는 거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나는 노동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 임영웅 목사는 건설노조 조합원이다. ⓒ 김지영


- 목사님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인가요?
"일을 안 하고 지내본 적 있어요? 기독교 사상 자체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그러잖아요. 수도원이라든지 영성공동체에 가면 빠지지 않는 것이 순결과 노동이란 말이죠. 순결이 정조 개념이 아니라 영혼의 고귀함을 말하는 거예요. 노동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뭐랄까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반드시 육체노동일 필요는 없지만요. 일하지 않고 지내는 게 우선 생각은 편할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이잖아요. 나는 노동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 노가다 판에 들어와서 목수로 일하시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가정 망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이혼한 사람도 많고 그것을 뭐랄까, 정죄까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왜 인생을 저렇게 살까. 어디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 하죠. 하지만 거기까지예요. 인간의 삶이란 게 목사나 고관대작의 삶은 고귀하고 천민들의 삶은 고귀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희나 노숙자나 인간의 삶이 지닌 존재의 무게는 똑같다고 생각해요. 안타까워 할 수 있어도 제가 어떻게 그 삶에 간섭을 하겠어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나오는 장면인데요. 2차 대전 독일치하 프랑스에서 창녀인 여자와 한 무리의 프랑스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가요.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독일군이 와서 저 여자가 나와 하룻밤을 자 주면 통과시켜 주겠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여자는 창녀인데 하룻밤쯤 자주기를' 간절하게 바라죠. 결국 그 여자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나요. 그런데 기차가 국경을 넘자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다시 손가락질을 하는 거죠. 창녀라고. 그거 욕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신영복 선생의 책을 보면 또 이런 내용이 있어요.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노랑머리라는 여자가 있는데 다른 여자들은 몸판 돈을 전부 기둥서방한테 뺏겨요. 하지만 이 여자는 옷을 벗어버리고 자기 몸에 자해를 하면서 그 돈을 지켜요. 사람들은 독한 년이라고 욕을 하지만 그 여자는 그렇게 자기 삶을 지켜내는 거예요. 누구나 자기만의 사연이 있고 그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보는 거죠."

- 목사님은 언제까지 목수로 일을 하실 계획이세요? 그리고 목사와 목수로서의 삶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은데요?
"지금 욕심으로는 체력이 허락하는 건 65세까지는 할 거예요. 그때쯤이면 아이들이 독립을 하거든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내 눈에 다른 직업이 들어 왔다면 그 일을 했을 거예요. 그게 공무원이든 뭐든. 하지만 나는 그런 거 생각도 못 했고 일단 내 눈에 들어온 게 운전하고 노점, 그리고 목수였죠. 어떻게 보면 운명이라기보다 그저 생존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이런 내 삶을 후회해 본적은 없어요. 내 신앙과는 거리가 먼 예가 되겠지만 내가 다음 생에도 혹시 과거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목사를 선택할 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할 거고, 목수 일을 선택할 거예요. 자발적 가난이 다른 말로는 청빈한 삶을 말하는 거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어요. 어쩌면 지금 저의 삶은 자연스러운 선택의 결과지요. 후회 없고 만족해요."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임영웅 목사는 '노가다판' 목수에 '미자립교회' 목사다. 사회적 신분을 굳이 대입하자면 마치 국가적 복지혜택을 당장 받아야 살 수 있는 차상위계층의 어깨 구부러진 가장이 연상된다. 하지만 그는 조금만 마음을 바꿔 먹어도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며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마다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가 가진 신앙은 그쪽을 향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그는 지금 자연스럽게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다. 자기만의 사연을 가지고 말이다.

목사인 그의 목소리가 불신자인 내 귀에 아직도 얼얼하게 남아 있는 이유도 그가 한 말의 함의가 내게로 와서 깊은 여운을 남긴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신을 믿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런 목사님이 말하는 교회라면 그 믿음과 관계없이 언제든 성령 가득한 그 문에 가볍게 발을 들여놓고 그분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난 종교와는 무관하게 영성(靈性)은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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