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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뺨치는 야심가, 바로 그의 아내

[사극으로 역사읽기] TV조선 드라마 <대군-사랑을 그리다>

등록|2018.05.05 11:17 수정|2018.05.05 11:17

▲ 드라마 <대군>의 정희왕후 윤씨(류효영 분). ⓒ TV조선


조선왕조 518년 역사에서 35년은 대비들이 통치한 기간이다. 그 35년간, 대비들의 섭정인 수렴청정이 있었다. 이 기간에는 대비가 최고 권력자였다. 드라마 <대군>에서 야심차고 당돌한 이미지를 풍기는 정희왕후 윤씨도 그런 대비 중 하나였다. <대군>에서는 정희왕후가 윤나겸(류효영 분)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정희왕후는 아들 예종 때인 1468년부터 1469년까지, 손자 성종 때인 1469년부터 1476년까지 총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다. 시중의 일부 역사서에서는 수렴청정 대비들이 남성 신하들과 협의했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대비들이 실권 없는 허수아비였다는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남성 군주들도 신하들과 협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하들을 무시하고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군주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비가 남성 신하와 협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점을 근거로 대비들의 수렴청정이 별 것 아니었다는 이미지를 조장해서는 안 된다. 35년간 조선을 이끈 최고 지도자는 분명히 대비들이었다. 윤씨도 그런 지도자 중 하나였다.

남편인 세조(수양대군)은 13년간 임금 자리에 있었다. 부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8년을 합치면, 부부가 21년 연속으로 조선을 다스린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가 조선을 다스린 기간만 나란히 이어지는 게 아니다. 나란히 놓일 만한 게 또 있었다. 바로, 권력에 대한 의지다.

왕의 며느리가 되고 싶었던 10세 소녀

수양대군이 강한 권력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극상을 했다. 살아서는 형인 문종의 뜻을 어기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죽어서는 아버지 세종보다 높은 세조(世祖)라는 묘호(사당 명칭)를 받았다. 세조라는 명칭에서는 제2건국자의 뉘앙스가 풍겼다. 거기다가 아버지와 똑같은 세(世)를 쓰면서, 종(宗)보다 높은 조(祖)를 쓴 것도 문제였다. 죽은 뒤이기는 하지만, 그런 일로 불효를 범한 것이다. 

남편 때문에 잘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정희왕후도 수양대군 못지 않았다. 정희왕후 역시 권력에 대한 의지가 만만치 않았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서열쯤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극상 기질이 있었던 것이다.

정희왕후 윤씨는 세종이 임금이 되던 1418년 출생했다. 그리고 10년 뒤 세종의 둘째 며느리가 됐다. 그런데 이 자리는 원래 윤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딸 일곱, 아들 둘이 있는 집에서 여덟 번째 아이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수양대군의 부인이 될 사람은 그의 언니들 중 하나였다.

<송와잡설>이란 책이 있다. 역사책이지만, 잡설(雜說)이란 단어에서 느낄 수 있듯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송와(松窩)라는 호를 가진 이기(1522~1600)가 썼다. 이 책에 정희왕후와 수양대군의 결혼 비화가 소개돼 있다.

"처음에는 정희왕후의 언니와 혼담이 있었다. 감찰궁녀가 그 집에 가니, 주부인(主夫人)이 처녀와 함께 나와 마주앉았다."

세종 부부의 지시를 받고 감찰궁녀가 신붓감을 만나러 갔다. 그 집 안방마님과 미혼 여성이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이 미혼 여성이 정희왕후의 언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그때 정희왕후는 아직 어렸다. 짧은 옷과 땋은 머리로 주부인의 뒤에 숨어서 보는 것이었다. 주부인이 밀어내면서 '네 차례는 아직 멀었다. 어찌 감히 나왔느냐?'라고 말했다."

이때 정희왕후가 만 10세였다. 언니가 시집 가는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어려운 자리에 끼어들었다. 어머니 등 뒤로 슬며시 가서, 감찰궁녀한테 자기 얼굴을 보여준 것이다.

어머니는 막내딸을 밀어냈지만, 감찰궁녀는 호기심이 생겼다. 궁녀는 "아이의 기운이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다시 뵙게 되기를 청합니다"라면서 혼담을 보류하고 돌아갔다. 그러고는 세종 부부에게 신부감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결국, 궁녀의 제안대로 됐다. 

'쿠데타' 말한 무당에 관심 보인 그녀

열 살 때 있었던 이 일을 철없는 소녀의 일시적 행동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후에도 유사한 일이 계속 되풀이됐기 때문이다. 시집간 된 뒤에도 윤씨의 행동에서는 하극상이란 행동 패턴이 일관되게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서 정희왕후가 드라마 <대군>에서처럼 노골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의 정희왕후는 드라마와 정반대로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냈다. 윗사람에 대한 예절도 깍듯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은근히 혹은 은연 중에 야심을 흘렸다. 그 '흘림'이 역사 기록에 묻어 있다.

세종이 죽고 장남 문종이 왕이 된 이듬해였다. 1451년인 이 해에, 왕의 동생인 수양대군 집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조실록>에서는 "가마솥이 저절로 소리 내어 울었다"고 말한다. 가마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던 모양이다. 집안 식구들이 깜짝 놀라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문종이 허약한 데다가 후계자마저 어렸기 때문에, 수양대군한테 일말이나마 정치적 가망성이 있었을 때였다. 그래서 수양대군 주변에 정치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 직전에는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는 것처럼,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집안 식구들이 과도하게 신경을 썼을 수도 있다. 수양대군은 이것을 "잔치를 열 징조"라고 해석했다. 그렇게 해석하고 그냥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일이 커지고 있었다. 집안에 무당이 들어갔다. 무당은 수양대군이 아닌 윤씨를 찾아갔다. 윤씨가 부른 모양이다. 무당은 "대군께서 39세에 등극하실 징조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수양대군은 1417년 생이다. 1451년 현재, 만으로 34세, 우리 나이로 35세였다. 그는 1453년에 쿠데타로 집권하고 1455년에 즉위하게 된다.

왕한테 후계자가 있는 상황에서 왕의 동생이 등극한다는 것은 정변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윤씨는 1428년부터 왕실의 일원이 됐다. 1451년이면 23년이 흐른 뒤였다. 그러므로 무당의 예언이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무당을 곧바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세히 물어봤다. 무당의 입을 틀어막지 않고 더욱 더 열려고 한 것이다. <세조실록>에서는 무당이 "더 이상 고하지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가마솥에서 소리가 난 직후에 무당을 만난 것이나, 남편이 정변에 관련될 거란 예언을 듣고도 무당을 붙잡아 둔 것이나, 무당이 꺼리는데도 추가 질문을 한 것은 윤씨 마음속에 무엇이 꿈틀대고 있었나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남편이 정변이라도 벌여서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윤씨는 만 33세였다. 언니를 밀치고 대군 부인이 됐던 만 10세 때의 하극상 기질이 이때도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극상은 그의 행동패턴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가 나란히 묻혀 있는 광릉.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 문화재청 조선왕릉 홈페이지


쿠데타 앞선 남편에 갑옷 입혀준 아내

그 뒤, 윤씨의 하극상 기질은 본격적으로 꿈틀댔다. 죽은 뒤에 기록된 추도문인 <정희왕후 애책문>에 따르면, 그는 남편이 쿠데타를 벌이기 전에도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문종이 단명하고 단종이 즉위한 뒤에는 '단종·김종서·안평대군 대 수양대군'의 정치적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됐다. 이런 상황에서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겠다며 자청하고 나섰다. 측근인 한명회와 권람이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 지금 도성을 비웠다가는 뭔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수양대군한테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도성을 비우는 것은 정치적 야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이미지를 바꿀 수도 있었던 것이다. 

윤씨 역시 남편의 마음을 돌리고자 애썼다. 밤새 울었다고 한다. 눈물로 호소했던 것. 이것은 윤씨가 한명회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뜻한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결국 명나라에 다녀왔다.

윤씨의 야심을 보여주는 일화는 쿠데타 당일인 1453년 11월 10일(음력 10월 10일)에도 있었다. 이날, 수양대군을 따르던 일부 무사들이 쿠데타 계획을 듣고 즉각 이탈했다. 수양대군이 임금 몰래 김종서를 죽이려는 계획까지 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하기 싫으면 나를 고발하고 떠나라"는 식으로 버럭 화를 내고는 안채로 들어갔다. 이때 안채로 들어서는 수양대군에게 윤씨가 갑옷을 입혀줬다. 남편이 혹시라도 뜻을 꺾지 않도록 전의를 가다듬어줬던 것이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수양대군 못지않게 정희왕후 윤씨도 하극상 기질과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다. 수양대군이 자기 내부의 기질만으로 일을 벌였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수양대군의 의지나 한명회의 조력뿐 아니라 아내의 조력에 의해서도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씨는 남편이 죽은 뒤에는 남편에게 세조라는 묘호를 부여했다. 죽은 남편에게 시아버지보다 높은 묘호를 부였던 것이다.

그런 윤씨가 수양대군 사후에 8년간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일생을 하극상을 향해 달려가다가, 더 이상 하극상이 필요 없는 위치에서 8년을 보냈다. 정희왕후 윤씨는 수양대군이 세상 욕을 다 먹으며 벌인 일들로 혜택을 본 '숨은 승자'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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