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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만 모델? 최초로 남녀 누드를 그린 그녀

[그림의 말들] '화가들의 여인'에서 '거장 화가'로 거듭난 쉬잔 발라동

등록|2018.05.20 19:51 수정|2018.06.28 11:07
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 푸른 방(쉬잔 발라동,1923, centre pompidou) ⓒ centre pompidou


속옷 차림으로도 이렇게 강해 보일 수 있을까. 정면을 응시하지 않지만 왠지 보는 이의 눈을 깔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다. 섹시는 언감생심, 우아한 드레스도 아니고 더구나 누드도 아니다. 파자마 차림에 피곤한 듯 담배를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겨있는 여인. 파란 침구 위에 놓인 책들은 그녀가 지적인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모델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이 그림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자유로움'이다. 남의 시선에 구속은커녕 연연해 하지도 않으며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온 센 언니가 내게 '그래도 된다'는 말을 건네는 듯하다. '여자답다'는 말을 만고의 칭찬으로 여기며 그 틀 안에서 사느라 때때로 답답하던 내게 '네 맘대로 살아도 아무 일 없다'라며 툭 말을 건넨다.

세탁부의 딸에서 화가가 되기까지

이 그림은 쉬잔 발라동이 그린 '푸른 방'(1923) 이란 작품이다. 본명 마리 클레망틴 발라동(1867-1938). 세탁부의 혼외자로 태어나 10살부터 직공, 양재사, 청소부 등 갖가지 일을 전전하다 파리의 서커스단 무희가 된다. 하지만 그네에서 낙마하는 사고로 서커스단에서 쫓겨난 후 당대 상징주의 미술의 거장 퓌비 드 샤반의 눈에 띄어 그의 모델이 된다.

그의 모델을 하는 몇 년 동안 그녀는 가까이에서 화가의 작업을 눈여겨보며 남몰래 그림을 연습한다. 그녀의 그림을 보며 화를 내는 그를 떠나 다시 르누아르의 모델이 된다. 당시 모델이라 하면 '화가의 정부'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녀는 18세의 나이에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들을 낳게 된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린 소녀는 몸도 추스르기 전에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지만 화가임이 틀림없는 그 아이가 '몽마르트르의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이다.

르누아르 부인에게 또다시 쫓겨난 그녀는 물랭루주의 화가 로트레크를 만난다. 그의 모델이 되어, 연인이 되어 지내는 동안 로트레크는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재능을 발견한다. 로트레크는 그녀를 인상주의 거장 드가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녀는 드가의 밑에서 미술교육을 받는다. 그녀는 드가를 만난 그날을 '내가 날개를 단 날'이라고 회고했다. 로트레크는 그녀에게 '쉬잔 발라동'이란 예명을 선물했고 평생 이 이름으로 살았다. 이 시절, 그녀는 로트레크에게 니체와 보들레르의 책을 빌려 탐독했다. '푸른 방' 안에 책을 그려 넣은 이유가 있다.

드가는 그녀의 그림 3점을 구입해주고 전시에 참여하게 도와주며 그녀가 화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귀족 집안의 배운 여자도 화가로 성장하기 힘든 시대에 그녀는 오로지 재능과 노력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니 그 행로가 어찌 평탄했겠는가.

퓌비 드 샤반, 르누아르, 드가, 로트레크등 인상주의 최고의 화가들이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으나 모두가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각자가 보고 싶거나, 부각시키고 싶은 면을 그려서일 것이다.

나는 로트레크가 그린 쉬잔을 좋아한다. 로트레크의 쉬잔은 그와 그녀의 영혼이 녹아있다. 삶의 고단함, 가난, 때때로 엄습하는 외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의식, 모든 게 그림에 녹아있다. 거기에 로트레크의 시선. 그녀를 성적 대상화하기보다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그 담담한 시선이 좋다. 그가 그런 걸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1893년 그녀의 나이 28세, 운명의 사랑을 만난다.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은 영혼으로 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칭했던 에릭 사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듣고 있자면 드뷔시의 달빛보다 더 달빛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짐노패디' 그 곡의 작곡가 말이다.

친구는 서로 닮는다더니 드뷔시와 사티는 비슷한 느낌의 곡이 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할 때 쓴 곡이 '난 널 원해(je tu voix)'이다. 두근대는 가슴으로 노란 프레지아 한 다발을 들고 그녀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는 곡이다. 첫눈에 감전된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간다. 그녀는 그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고 그 작품이 그녀의 최초 유화작품이다. 그의 나이 27세.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

▲ 에릭 사티(쉬잔 발라동,1892-93, centre pompidou) ⓒ centre pompidou


서로에게 영감이 되는 존재. 하지만 불꽃 같은 사랑은 타버리고 소진된다. 너무 뜨거웠을까. 6개월 만에 그녀와 헤어진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그 흔한 연예 한번 없이 살다간다. 그의 사후에 그의 방에서 한 다발의 편지가 발견되는데 수신인은 모두 그녀다. 초라한 방에 그녀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며 붙이지도 못할 편지를 쓰고, 곡을 썼다. 같은 소절을 무려 840번을 반복하는 '벡사시옹(짜증)'은 아마도 그녀를 도저히 떨쳐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하는 자신을 쓴 곡인지도 모른다. 밀어낼수록 어느새 다시 머릿속에 꽉 차버리는, 그리고 자동재생 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 생각들.

3년 후 쉬잔은 은행가 폴 무시와 결혼한다. 무시는 그녀를 존중하며 그녀가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정을 찾은 그녀는 이 시기에 다수의 누드와 자화상을 그렸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을 보낸 쉬잔은 1908년 '아담과 이브'라는 역작을 그리게 된다.

문제는 이 아담의 모델이다. 아들의 친구였던, 아들보다 어린 초보화가인 앙드레 위테르와 사랑에 빠진 거다. 그림속의 이브는 자신을, 아담에는 위테르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여성 누드모델을 남성화가가 그리던 시대에, 남성을 누드모델로 세우고 남녀가 나란히 함께 있는 누드를 그린 최초의 여성화가인 셈이다.

▲ 아담과 이브(쉬잔 발라동,1909, centre pompidou) ⓒ centre pompidou


이혼한 쉬잔은 44세에 23세인 그와, 26세인 그녀의 아들 위트릴로와 동거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저주받은 삼위일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어린 모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에너지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일은 남자화가들에게는 일상이지만 여자화가인 쉬잔에게는 비난이 쏟아졌다. 참으로 슬프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 거다. 어린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라서. 나중에 결과를 보고 그럴 줄 알았다고,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은 결과적으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그 순간에 존재'하는 거니까. 대신 나는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란 말을 사랑한다. 이 포용의 문장은 모든 이별을 껴안는다. 어떤 원망도 없이.

그녀의 그림 속 이브의 얼굴이 그녀가 진정 사랑에 빠졌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숱한 자화상 어디에도 이처럼 생기 넘치고 사랑스러운 표정은 없다. 사랑에 빠진 이브는 천진한 소녀의 표정으로 금단의 사과를 따고 있다. 40대 여자라도 마음이 40대는 아닌 거다.

사랑은 '받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는 사람의 것'임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그녀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남자의 표정은 뭔가 찜찜하다. 사랑 외에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의 표정이다. 연예에 관한 한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의 여자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그것까지 표현하려 한 건 아닌지.

1914년 정식으로 그와 재혼한 후 다음 해 여자화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연다. 이 세 가족은 각자 창작을 하고 힘을 합쳐 판매에도 나섰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처음엔 팔리지 않던 작품이 해를 거듭하면서 팔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를 떠나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까지 몰래 내다 파는 지경이 되고 결국 둘은 갈라선다. 이후 쉬잔은 리옹의 작은 마을로 이사하고 조용히 작품 활동을 하며 평온한 말년을 보내다 1938년 영면에 들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프레임 안에 살던 여자가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을 그리며 말한다.

"예술은 우리들이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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