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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팔아먹고, 대한민국이 버린 소년

[선감도의 비극⑬-2] 잔혹한 아픔 딛고 사업가로 변신해

등록|2018.07.26 11:14 수정|2018.07.26 11:16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경찰이 납치한 소년, 그게 접니다> 에 이어

▲ 일제 강점기 선감학원을 견학하고 잡지 <문화조선>에 실린 기사 ⓒ 정진각


어느 날 소년 기철은 선생님 부름을 받고 교무실로 달려갔다. 선감학원 생활 5년여가 지난 즈음이었다. 웬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도에 사는 사람이었어요. 저를 데리러 온 거죠. 저는 지금도 돈을 받고 선생님이 그 사람한테 저를 머슴으로 팔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년 기철의 머슴 인생이 시작됐다. 그의 나이 15세 즈음일 때다. 나이 뒤에 '즈음'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선감학원 원아 대장 내용을 전혀 신뢰할 수 없어서다. 원아 대장에 적힌 그의 생년월일은 1957년 5월 29일인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선감학원 측에서 생년월일을 비롯한 원아대장 내용을 멋대로 기록했다는 게 피해자들의 일관된 증언이기 때문이다.

특히 5월 29일은 생일이 아닌 게 거의 확실하다. 선감학원 개교기념일인 5월 29일을 원생들 생일로 기록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철씨 또한 원아대장 내용을 믿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그의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은 본적지가 서울이라는 정도다. 원아대장에는 "유아시에 부모가 걸식인이 되었고, 1968년 7월 을지로에서 앵벌이를 하다가 단속반에게 수집"이라고 적혀 있는데, 기철씨 진술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부랑을 한 이유가 "부모가 버렸기 때문"이라 적혀 있는데, 이 또한 기철씨 진술과 다르다.

기철씨는 "공무원들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부랑아로 만들려 했고, 그러다보니 이런 엉터리 원아대장을 만들었다"라며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기철씨가 '선생님이 돈을 받고 자신을 머슴으로 팔아먹었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을 하면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고 머슴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돈 받고 나를 팔아먹었다"

▲ 김기철씨, 그가 판매하는 물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이민선


▲ 김기철씨 선감학원 원아대장 ⓒ 이민선


그를 데려간 사람은, 지독하게 일을 시키면서도 새경(임금)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새경은커녕 용돈도 주지 않아 그 먹성 좋은 성장기에 소년 기철은 눈깔사탕 하나 사먹지 못했다. 옷과 신발은 주인 것을 물려받아 입고 신었다. 이발소를 갈 수 없어 머리는 늘 장발이었다. 칫솔도 없어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양치를 해야 했다. 잇몸에 탈이 나 퉁퉁 부었는데도 진통제 한 알 사먹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서운하고 억울한 심정을 밝히면서도 그는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 나쁘지는 않았어요"라고 거듭해서 말했다. 애증이 엇갈린 복잡한 심정의 표현이었다. '돈 한 푼 안주고 일을 시켰으면 나쁜 사람인데, 어째서 나쁜지 않다고?'라고 묻자 그는 "그러게요, 내가 너무 착해서 그런가"라고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다.

그의 심사가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그의 부인이 던진 한마디에서 알 수 있었다.

"너무 착해서 그래요. 이 사람은 그 곳을 자기 집으로 그 사람들을 가족으로 생각하고는 정을 주고 살았던 거예요."

이 말을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시선을 슬쩍 떨어뜨렸다. 억지로라도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그의 아내 말대로 그는 자신을 종으로 부려먹은 사람들에게 정을 주고 살았던 것 같다. 그는 결혼을 하고 난 뒤 아내와 함께 대부도에 있는 그 집에 놀러가기도 했고, 결혼식 같은 행사가 있으면 찾아가 축하하기도 했다.

법을 잘 아는 그의 친구가 지금이라도 소송을 해서 새경을 받자고 권할 때에도 그는 '그럴 생각 없다'고 딱 잘랐다. 정이란 게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그래도 서운함이 여전히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지 그는 "교회 열심히 다니면 뭐해요, 머슴 살리고 새경도 안 줬는데"라고 푸념하듯 한마디를 던졌다.

5년 넘게 머슴 살면서 새경은 한 푼도 못 받아

▲ 1970년대 선감학원 ⓒ 경기도


결국 그는 머슴살이 5년여가 되던 해에 소금 배를 얻어 타고 탈출을 해서야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었으니, 굳이 탈출을 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어째서 그랬을까.

"나간다고 하면 그 끔찍한 선감학원으로 다시 보낼까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쉽게 도망칠 수 없었고요. 걸리면 선감학원에 가야 하니까요. 사실 한번 도망치다 그 집 사위한테 걸려서 끌려간 적도 있어요. 돈을 안 주니 뱃삯이 없었고, 그래서 소금 배를 얻어 타고 인천으로 나온 거죠."

자유를 얻었지만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소년 기철 앞에 놓인 인생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그릇가게·자전거포 점원, 노가다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술집에서 웨이터 생활도 했다.

그래도 타고난 성실함과 꼼꼼함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디를 가든 그는 사장님이 붙잡아 두고 싶은 '상일꾼'이었다. 머슴으로 팔려간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성실함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그 성실함 덕에 그는 웨이터에서 주방장으로 성장했다. 월급을 30만 원이나 주는 괜찮은 일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 돌연 주방장을 그만 두고 월급이 고작 6만 원밖에 되지 않는 산업용품 센터 점원으로 변신한다. 흥청거리는 술 집 분위기가 싫어서다. 그 곳에서도 타고난 성실함이 빛을 발해, 그는 9년 만에 자기 점포를 소유한 어엿한 사장님이 된다.

"이 일을 하면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어요, 전세금 300만 원을 털어서 사업을 시작해서, 이만큼 살고 있으니, 그래요 이 정도면 기자님 말대로 성공한 거네요. 성공 비결요? 하하하. 저는 성실함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해도 착실하게 살았어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비관하지 않았고요. 심지어 수천만 원 부도를 맞았을 때에도."

그는 그저 성실했기 때문이라 말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특별한 소질이 있었다. 천호동에서 엄마와 함께 살던 시절에 그는 빈병을 주워 모아 용돈을 벌어 쓸 정도로 장사에 소질을 보였다. 대부도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짬을 내 아이스크림 장사를 할 정도로 장사를 좋아했다. 그 뒤에도 기회만 있으면 적은 자본금으로 할 수 있는 포장마차 같은 장사를 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고 파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그래서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도 장사를 한 거죠. 그러면서 신용이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원칙대로 지금까지 사업을 했어요. 벌면 일부를 떼서 베풀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요. 글자를 몰라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건 아내가 채워줬어요. 대신 저에게는 거래처 이름부터 거래액까지 몽땅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이 있어요. 물건을 잘 파는 능력도 있고요. 또 돈 떼먹지 않을 건실한 회사가 어딘지를 찾는 능력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어렵다는 IMF 때도 우린 끄떡없었어요."

이제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선감학원 출신 성공한 사업가 기철씨 소원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그는 "지금 하는 사업 잘 유지하는 것, 그리고 우리 가족 건강한 것"이라는 평범한 답을 내놓았다. "나 혼자였는데, 아내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까지 가족이 10명이 됐으니, 대성공"이라며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소원 목록에는 '선감학원에서 당한 억울함에 대한 보상'이 분명 있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대한민국이 나를 고아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뒤를 "서울시, 경찰청 그리고 선감학원을 운영한 경기도가 정말 나쁘다"라는 푸념 같은 말이 따랐다.

"대한민국이 나를 고아로 만들어서..."

▲ 선감도에 강제로 끌려온 어린아이들이 생활했던 '원생 숙소' ⓒ 정대희


"성인이 되어 외삼촌을 찾은 덕에 이모들은 만날 수 있었지만, 엄마를 만날 수는 없었어요. 이미 돌아가신 뒤였거든요. 엄마 임종도 못 지킨 거죠. 저는 지금도 친아버지가 누군지를 몰라요. 이거 소송이라도 하고 싶어요. 근데, 지겠죠?"

이 말에는 그의 한과 억울함이 응축돼 있었다. 또한 이 세상 그 어떤 폭력보다도 국가 폭력이 무섭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한마디이기도 했다. 폭력배한테 당하면 국가(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국가한테 당하면 도대체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이것이 국가 폭력이 그 어떤 폭력보다도 무서운 이유다.

그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선감학원 출신 소년이 어떻게 해서 성공한 사업가로 일가를 이루며 번듯하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다.

선감학원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1년 넘게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피해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대부분 끔찍한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무척 궁핍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사실상 무학이라,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또한 그들은 이 넓은 천지 그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었다. 가족과의 끈을 선감학원에 잔인하게 끊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 가족과 인연의 끈을 찾은 이도 있다. 그러나 그 가족마저도 워낙 사는 게 힘들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천신만고 끝에 만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환경을 비관해 범죄의 늪에 빠져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이도 있고, 술로 아픔을 달래며 살아온 사람도 있다. 그래도 손가락질 할 없는 게, 그 상황이었다면 나 또한 그들과 다른 삶은 살았을 것이라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과연 난 술의 유혹, 범죄의 늪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곱씹어 봐도 자신 할 수 없다.

그런데 초등학교도 마치지 않은 그는 엄청난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매출 10억 대 사장님으로 멋지게 성공했다. 피붙이나 일가붙이의 도움 따위는 없었다. 그 비결을 겨우 반나절 남짓한 만남으로 다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긴 게 가장 큰 성공 비결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소질이 있는지를 스스로 깨우쳤다. 과감하게 돈 많이 주는 직장을 포기하고 배고픔을 견디며 하고 싶은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어려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이게 가장 큰 성공 비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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