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시민은 기자다

"파양 후 두번째 입양, 진정한 가족의 의미 알게 돼"

[해외 입양인 이야기7] 해외 입양인 킴벌리 핸슨 인터뷰

등록|2018.08.03 17:20 수정|2018.08.23 14:52

가족들과 함께 한 크리스마스킴벌리 핸슨(앞줄 맨 오른쪽)은 두 명의 낳은 자녀가 있고, 한국에서 셋째를 입양했다. 그는 엄마가 되고 가정을 가지게 되면서 더욱 자신과 자신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 한국을 자주 찾는다. 또 친구인 줄리 드발과 함께 한국의 시설 퇴소인들을 위한 비영리단체 'Love Beyond The Orphanage’를 설립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 정현주


세 자녀의 어머니이자 전업 주부로 자신을 소개하는, 해외입양인 킴벌리 핸슨. 그와 7월 중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가장 눈에 띈 이력은 비영리단체 'Love Beyond The Orphanage(이하 LBTO)'의 설립자라는 것이었다.

- 'Love Beyond The Orphanage'는 무엇을 하는 단체인가요?

"제 친구 줄리 드발과 함께 만든 NGO(비정부기구)입니다. 줄리는 한국의 고아원에서 만 16세까지 자랐고, 퇴소한 뒤 고아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줄리는 시설에서 퇴소한 젊은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늘 의논하곤 했죠. 우리는 한국 정부가 입양인들을 도우면서, 왜 고아원에서 퇴소하는 젊은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준비 과정을 거쳐서 2016년 4월에 우리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국내 요보호 아동의 절반 이상이 고아원 같은 시설에 남고, 나머지 가운데도 절반이 안 되는 아동만이 입양된다. 유기되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생부모의 입양동의서가 없어서 입양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고, 입양을 원하는 국내 예비입양부모도 부족하다.

이렇게 시설에서 자란 아동들은 만 18세가 되면 다시 혼자가 되어 시설을 떠나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최대 500만 원의 자립지원금을 받지만, 월세방을 간신히 얻고 나면 남는 돈은 거의 없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들이 사회적 도움 없이 자립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이들은 대부분 기초수급자로 분류되어 반복되는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

많은 입양인들과 입양가족들에게 이들 시설 퇴소인들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자신이나 사랑하는 자녀가, 어쩌면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도 있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킴벌리의 경우도 그랬다. 그런 인식이 자연스럽게 그를 고아원과 시설 퇴소인들에게 이끌었고, LBTO를 설립하도록 했다.

시설에서 퇴소한 보호 종료 젊은이들이 1년 중 가장 힘든 때는 명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친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그들은 오갈 데 없는 깊은 외로움에 휩싸인다. 그래서 킴벌리 일행은 추석, 크리스마스, 설연휴 때 한국에 와서 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또 이들은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해도 입학 후 몇 달이 지나야 입학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첫 입학금과 등록금을 빚을 내거나 벌어서 충당하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기도 한다. 현재 LBTO에서는 대학에 진학한 시설 퇴소인들 7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이 정부지원 없이 이사회 사람들과 자원봉사자들의 기부로 진행된다.

"진정한 가족을 만나고 나도 '엄마'가 되고싶단 생각을 갖게 됐죠"

두 번째 입양된 가정에서 두 살 위의 언니와 함께 한 크리스마스킴벌리 핸슨은 5살에 미국으로 입양되었으나 첫 입양가정에서 학대당한 뒤 파양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6살에 새로 입양된 가정에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 정현주


킴벌리 핸슨은 5살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를 처음 입양한 가정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한 명은 친생 딸이었고, 다른 네 명은 미국 내에서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입양모로부터 육체적인 학대를 당했다. 그는 매일 장난감 하나 없는 침실에 갇혀 있었다. 가족들과 어울리지도 못해서 같이 둘러앉아 식사한 기억조차 없다. 입양모는 킴벌리를 발로 차기도 했고, 벽을 보고 무릎을 꿇게 하는 벌을 주기도 했다. 결국 15개월 만에 그는 파양되었다. 사회복지사는 킴벌리를 그 가정으로부터 분리해 또 다른 가정으로 보냈다.

학대와 파양 과정을 겪고 새로운 가정으로 입양된 경우에는 훨씬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다.  1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학대가 남긴 상처는, 어린 킴벌리가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킴벌리는 새로 입양된 가정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가정에 대해 물었을 때, 킴벌리는 행복한 기억들을 쏟아냈다.

"저는 두 번째 입양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요. 정말 엄청난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죠."

새로 입양된 가정에는 두 살 위의 언니가 있었다. 킴벌리는 언니와 함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무뚝뚝한 편인데 비해서 아버지는 즐겁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삶을 사랑했고, 유머가 넘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킴벌리에게 자립할 수 있는 힘, 요리하고 일하는 방법 같은 삶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킴벌리는 가족들과 캠핑을 가거나,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면서 멋진 유년 시절을 보냈다. 또 매해 여름 언니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머물렀던 일 역시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13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행복한 유년기는 끝났다. 그 이후 킴벌리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18살 때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유년기의 행복한 경험은 킴벌리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진정한 가족의 일원이 되면서, 저도 커서 가정을 가지고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사교성이 풍부했고 친구들과 잘 어울렸죠. 그리고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두 명의 아이를 낳았고, 셋째를 한국에서 입양했어요."

그의 학교 생활은 행복하기만 했을까? 해외 입양인으로서 인종차별의 경험은 없는지 물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친구들은 저를 '칭크(중국인들을 인종차별적으로 부르는 말)'라고 불렀어요. 저를 볼 때마다 눈을 양옆으로 당겨 찢어 보였고, '평평한 얼굴'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그런 경험이 그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을까?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괴롭힘'은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킴벌리는 이런 놀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시설 퇴소인'들의 암울한 삶을 지켜보며 입양의 필요성 절감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평범한 주부로 살아갈 수도 있었을 킴벌리를 한국으로, NGO 활동으로 이끈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자녀가 생긴 이후로 저는 그애들을 위해서라도, 저 자신과 저의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2005년부터 최소 1년에 한두 번 한국에 오고 있어요. 맨 처음 한국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저는 들떠서 어쩔 줄 몰랐죠. 한국에서 더 많은 경험을 갖고 싶어서 계속 여행 차 방문했어요. 저는 한국과 사랑에 빠졌고, 한국인이라는 것에 감사했죠. 그 뒤로는 입양인들과 그 가족들의 한국 방문을 돕기 위해, 그리고 LBTO 행사를 위해 계속 오고 있습니다."

킴벌리 핸슨의 삶에는 두 번의 극적인 순간이 있었다. 하나는 그가 고아원에 남지 않고 미국으로 입양된 것, 또 하나는 파양되어 새로운 부모를 만난 것.

만약 파양되지 않고, 첫 가정에 남았다면 그의 삶은 암울했을 것이다. 심각한 아동 학대는 대부분 친권자인 부모에 의해서 저질러진다. 입양 전에 학대 가능성이 있는지를 심사해서 배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친생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친권'은 '천륜'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서 학대나 방치의 위험이 있을 때는 아동을 부모로부터 분리하고 필요한 경우 친권을 박탈해야 한다.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고 몇 년 동안 방치해도 서구처럼 친권이 박탈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동을 돌보지 않고 심지어 학대하고 유기한 친권자라할지라도 그들의 입양동의서가 없으면 입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 역시 개선해야 할 문제이다.

첫 가정에서의 학대 경험에도 킴벌리 핸슨은 입양, 그리고 해외 입양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저는 너무나 많은 시설 퇴소 젊은이들을 만나고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싸워야 하는지 직접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그저 매일매일 생존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날마다 찾아야 한다고 해요. 그런 현실 때문에 LBTO는 재정 지원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설에 있는 모든 아동들에게 입양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당연히 해외로 입양되어야지요. 저는 혈통을 잃었지만, 그 혈통을 찾고 개척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이 제가 만나는 시설 퇴소인들과의 차이점이에요."


시설 퇴소인들은 많은 경우 친권을 포기하지 않은 부모 때문에 임대주택 지원도 받지 못한다. 결국 비싼 월세방이나 고시원을 전전한다. 부모가 친권을 포기하지 않다가 아이가 퇴소할 때 찾아와서 권리를 주장하고 자립지원금을 빼앗고 연락을 끊는 경우도 있다.

킴벌리 핸슨은 말한다.

"만약 제가 미국으로 입양되지 않았다면, 저는 교육의 기회, 결혼하고 성공적인 삶을 이뤄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한국 방문을 통해 생부모를 찾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자신이 머물렀던 고아원, 태어난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생부모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행복한 어른이고, 제가 미국에서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에 영원히 감사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쨌든 저는 입양되었고, 현재는 고아원에 있는 아동들이나 시설 퇴소인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