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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억울하다'와 일본어 '구야시이'의 차이

[서평] 신상목 지음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등록|2018.08.26 20:25 수정|2018.08.26 20:25
<먼 나라 이웃 나라> 일본 편에서 본 이야기다. 기존의 상점에서는 예컨대 빨간색 비단 한 폭 달라고 하면 창고에 둔 물건을 가져다주는 시스템이었는데, 새로운 상점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옷감을 볼 수 있도록 전시했더니 대박을 쳤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에도 시대에 일어났다고 적혀 있었다. 에도 시대라면 우리나라 조선 시대인데, 너무 현대적인 것 아닌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를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에도 시대는 그런 '마케팅 혁명'도 충분히 일어날 만한 시대였다. 에도 시대는 동시대의 우리 역사, 즉 조선 후반기와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영웅들의 투쟁으로 점철된 전국 시대나 막부 말기에 비해, 에도 시대는 아무래도 지루하다. 그러나 정중동이라 했던가. 그것은 역사의 에너지가 응축되는 과정이었다. 에도 시대에 일어난 사회적 변화 중 일부는 심지어 동시대 유럽을 앞질러갔다.

봉건 제도가 가져온 뜻밖의 결과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표지 ⓒ 뿌리와이파리


쇼토쿠 태자, 남북조 시대 초기, 또는 메이지 시대에 일본 왕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역사 대부분은 막부의 역사다. 막부란 그저 영주 중 가장 강한 자에 불과하다. 에도 막부 말기, 조슈 번이나 사츠마 번처럼 막부의 지시를 대놓고 어기는 영주들이 나타난 것도 이 제도의 근본적인 한계가 표면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에도 막부는 영주들을 견제하기 위해 '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기인제도와 유사한 인질 제도였다. 하지만 영주와 가족은 물론 가신들까지 1년 주기로 에도와 영지를 번갈아 가며 생활해야 했다는 점이 다르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숙박은 물론 식사, 여흥 등 각종 소비재의 수요가 크게 일어났다. 쌀이나 옷감을 들고 다니며 경비를 지불하는 것보다 화폐가 훨씬 편하였으므로, 화폐 경제 역시 크게 진작되었다.

양차 대전 이전 유럽과 마찬가지로, 에도 막부 역시 금본위제를 택했다. 문제는 네덜란드를 통한 무역 거래 결제에 은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전국 시대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무역 덕택에, 일본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이 남미에서 강탈해 온 은을 빨아들였다. 에도 막부가 시작될 당시 일본 전체의 상업 중심지였던 오사카는 그런 연유로 은을 중심으로 한 화폐 경제를 구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는 금을, 상업활동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은을 구매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은과 금을 교환해주는 업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교환에 따르는 차액(spread)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귀금속을 직접 옮겨 결제하려면 위험과 비용이 따랐으므로, 이들은 서로 간에 서류로 결제를 대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예금증서, 어음, 수표 등의 서비스가 발생했다.

막부의 금본위제는 의도치 않은 또 하나의 혁신을 가져왔는데, 바로 지방 화폐의 발달이다. 금태환을 기본으로 하는 금본위제는 결국 금 보유량에 화폐량이 묶이게 된다. 따라서 화폐가 부족하게 된 지방 영주들은 어음을 발행했다. 그러나 이는 막부의 화폐발행권에 대한 도전이다.

따라서 지방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만 유효한 어음을 발행했는데, 이것이 지방 화폐인 '한사쓰'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자체가 지방 화폐를 지역경제 활성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옆 나라에서는 이미 300년 전에 그런 일을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 참근교대 행렬을 그린 그림 ⓒ 츠야마향토박물관


출판문화 또한 융성했다. 정부나 종교가 출판을 장악했던 조선이나 근대 유럽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수요에 기반한 출판업이 활발했다. 이에 따라 에도 시대 신문은 지진 등 자연재해 소식이나, 치정 살인과 같이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할 만한 사건을 다루었다.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는 대본소는 물론, 책을 등짐으로 가지고 다니며 빌려주는 대본업자도 많이 있었다고 하니, 독서 대국 일본은 과연 그 뿌리가 깊다.

배울 점은 배우자

저자는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 현실을 개탄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보통 19세기 후반에 한일 양국 간 격차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개항한 마당에 조선은 쇄국 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에 뒤처졌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 책을 썼다. 일본이 19세기 말 이미 열강 대열에 합류한 배경에는 265년에 걸친 에도 시대가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은 사회, 문화, 경제에 걸쳐 엄청난 에너지를 쌓아 올렸고, 그 힘을 배경으로 제국주의 강도단의 막차를 탄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또 한 번 저자는 번뜩이는 논점을 제시한다. 우리말의 '억울'과 일본어의 '구야시이'가 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억울한 일은 속으로 삭이고 말지만, 구야시이한 일을 당하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고,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바꾼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에,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당했고, 치외법권을 포함한 통상우호조약을 맺었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치외법권에 대해 배우며 분개한다.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선진국 법제를 연구, 1896년 소위 '6법 체계'를 완성한다. 구미 열강에 뒤지지 않는 법제를 근거로, 일본은 각국과 조약 개정 협상을 벌여 치외법권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구야시이'한 일을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막부 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개혁자를 자처했던 유신지사들은 결국 어리석은 길을 택했고, 약육강식을 믿는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전범들을 키워냈다. 그런 역사를 부러워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2차 대전 패망 후에 빠르게 재기한 일본의 저력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민중의 힘이다. 일본은 조선보다 거의 3백 년 먼저 민중을 키워냈다. 농노 기반 경제에서 갑자기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봉건 제도를 딛고 올라 강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봉건 제도가 너무 오래 지속된 덕일까. 에도 시대 민중은 더 이상 우매한 대중이 아니었다. 독서와 여행, 그리고 토론을 즐기던 그들은 이미 시대의 모순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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