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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자, 그를 변하게 한 남자는 누구일까

[리뷰] 영화 <나비잠> 사랑했던 기억의 유효기간은?

등록|2018.09.06 14:28 수정|2018.09.06 14:28

▲ <나비잠> 포스터 ⓒ 트리플픽처스/영화사 조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잊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라는 마음을 모티브로 시작했다."

정재은 감독은 언론 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별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던질 수밖에 없는 물음. <나비잠>은 그 물음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될 수 있는 영화다.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료코(나카야마 미호)는 대학 강단에서 하는 낭독회를 준비하며 농염함을 마음껏 표현하는 초록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는다. 아마도 그 날 읽기로 예정된 자신의 관능적인 소설 분위기와 어울리는 옷을 특별히 고른 것 같다. 그녀는 낭독회를 마치면서 독자이면서 동시에 학생인 청중 앞에서 선언한다. 앞으로는 소설 뒤에 숨어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작가가 되겠다고. 어쩌면 그 자신의 삶의 굴곡조차 마케팅의 일부였던 작가. 이제부터라도 독자와 솔직하게 마주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결심은 지켜질 수 있을까.

낭독회 후 회식자리에서 료코와 찬해(김재욱)와 첫 만남을 가진다. 료코는 평소에 자신의 소설에 사인을 안 하기로 유명했는데 이날은 예외적으로 호기롭게 만년필을 꺼내 든다. 만년필은 쓰면 쓸수록 필기 습관에 따라 팁이 마모되어 사용자에게 맞춤화 된다. 수기로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만년필이란 단순한 필기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자신의 모든 소설을 집필할 때 썼던, 만년필이라면 더욱 각별하다. 료코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만년필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만큼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면 영업이 종료된 가게를 다시 찾아올 법도 하다.

그녀는 마침 가게에 머물고 있던 찬해와 함께 만년필을 찾아본다. 찬해는 일본에서 물건을 잃어버려도 다시 돌아와서 신기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만년필은 다행히 찬해의 직장 동료가 분실물로 습득해서 갖고 있었다. 찬해가 료코에게 만년필을 돌려주면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 <나비잠> 스틸컷 ⓒ 트리플픽처스/영화사 조아


료코의 집필 방식과 삶의 전환점

료코는 자택의 명패를 전 남편의 성으로 그대로 방치해뒀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원수처럼 싸운 게 아니라 원만하게 합의 이혼을 했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유전적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영화에서 이 병은 일반적인 알츠하이머보다 증세가 호전되기 어렵고 수명도 훨씬 짧아지는 것으로 나온다. 료코는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신작 소설을 완성하려 하지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를 않자 고민이 깊어진다. 그런 그녀 앞에 찬해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찬해가 거절하기 어려울 만한 소소한 부탁을 계속하면서 인연을 만들어간다. 반려견의 산책을 부탁하는 데 이어서 서고 정리도 부탁한다. 이때 료코는 정형화된 삶을 지겨워하고 우연이 가져오는 변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한다. (나카야마 미호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작품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있다.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친숙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얼어붙은 잠자리를 발견하는 장면이 있는데 일본어로 잠자리를 두고 '톤보'라고 말한다. 재밌게도 <나비잠>에 나오는 료코의 반려견 이름도 톤보다.)

"서로 좋아하는데 왜 헤어져요?"

찬해는 소설 속 인물을 대신해 료코에게 물었다. 나중에 그 의문의 주체가 자신과 료코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료코는 찬해의 곁에서 편안하게 나비잠(작품 제목이자 유일한 한국어 대사)을 잘 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녀의 소설도, 삶도 전환점을 맞이한다. 료코는 만년필로 집필하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보이스 레코더로 집필하는 방식을 찬해에게 제안한다.

익숙하고 낡은 것과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다. 료코가 소설 내용을 녹음하면 찬해가 그걸 듣고는 노트북으로 타이핑하는 방식이다. 찬해는 료코의 나긋한 목소리를 오랫동안 들으면서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찬해는 소설이 발표되기에 앞서 유일한 독자이기도 하다. 료코의 목소리는 그만을 위한 오디오북이고 ASMR이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은 뮤즈를 통해 영감을 얻었고, 뮤즈를 위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집필 작업 과정 중에, 소설 속 인물에 감정을 대입해 간접적인 교감을 나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가, 료코와 찬해의 관계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 <나비잠> 스틸컷 ⓒ 트리플픽처스/영화사 조아


톤보가 사라졌다. 료코가 알츠하이머 증세로 현관을 열어놓고 간 그날. 그녀에게 있어 톤보는 단순한 반려견 이상이었다. 료코는 아직 톤보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채로 톤보와 이별하게 됐다. 이별에서 남겨진 사람은 항상 더 괴롭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료코는 찬해에게 더욱 의지하게 된다. 가만 놓고 보면, 료코가 소중하게 여기던 만년필과 톤보를 찬해가 대신한 것 같다. 찬해는 료코의 마음속으로 시나브로 들어와 공간을 점유한다.

찬해는 료코의 일을 도와주는 어시스트이며 동시에 체온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료코가 찬해에게 의지하고 빠져드는 것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는 과정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찬해가 료코에게 빠져드는 과정이 잘 공감되지 않았다. 찬해는 료코의 배려로, 일본에 유학 온 뒤 처음으로 안정감 있는 곳에 머물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마음이 움직인다기에는 찬해의 감정을 너무 편리하게 다루는 건 아닌가 싶다. (스코어와 엔드 크레디트에 나오는 주제가도 관객에 전달되는 감정보다 조금 성급한 듯이 들렸다.)

료코는 신작 소설을 발표하며 이름을 부모님께 물려받은 성으로 되돌아간다. 찬해는 한국에서 작가가 됐다. 찬해, 자신이 찾아주었던 만년필처럼 버려졌다가 다시 료코에게 돌아온다. 톤보는 공원의 콘크리트 바닥에 발자국을 남겼고 찬해는 료코의 소설에 특이한 표현을 남겼다(일본어에 미숙한 찬해가 월이라고 써야 할 때 달이라고 쓰는 식).

료코의 기억은 지워졌지만 여러 장소와 자신의 소설 속에 추억을 새겨 놓았다. 료코의 집은 '우연의 도서관'이 되고 소설의 제목은 '영원의 기억'이 된다. 스스로는 기억하지 못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그 기억이 남도록 했다. 그것이 료코가 찬해를 향해 보내는 존중이자 마지막 러브레터이다.

"기억하지 못 하지만 기억해."

료코가 하고 싶었던 말이 보이스 레코더를 통해 전달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대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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