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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자식들 끼니를 챙긴다는 것

[행복한 책 읽기] 천명관 '고령화 가족'

등록|2018.09.09 11:06 수정|2018.09.09 11:06
우리가 보통 '가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개개인이 조금씩 다르기야 하겠지만 왠지 모를 아련함이랄까 혹은 편안함 같은 감정들이 그것일 게다.
 
그런데, 가족이란 것이 이성적으로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도 그처럼 비슷할까? 한 사람에 대한 평가도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하나의 집단 역시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가장으로서의 가족, 주부로서의 가족, 남편 혹은 아내로서의 가족, 아빠 또는 엄마로서의 가족, 아들 혹은 딸로서의 가족.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맞게 가족마저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가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감성적인 느낌은 현실이라는 이성 앞에서 어쩌면 무참하게 깨져버릴지도 모른다.

<나의 삼촌 부르스 리>에서 타고난 이야기꾼의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한 천명관이
도대체가 멀쩡한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콩가루 가족의 이야기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온 책 <고령화 가족>. 
 

▲ 고령화가족 ⓒ 김원규


기실 이 내용을 먼저 접한 것은 박해일-윤제문-공효진-윤여정-진지희 주연의 영화였지만 원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영화는 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시간(러닝타임)이라는 최대의 약점 때문에 원작의 깊이와 구성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보지 않는 편이다. 특히나 원작의 작가가 천명관이므로. 그 천부적인 실력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방해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40대 후반의 화자 (話者)인 오인모는 결혼 생활에 실패한다. 영화 감독이라는 허울 좋은 직업만 보고 결혼한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는 헬스 트레이너와 바람이 났고 쫄딱 망한 영화 한 편 외에는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오인모는 그렇게 이혼을 하고는 엄마의 집에 들어가서 얹혀 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오인모가 자신의 가족을 꾸리는데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뿌리와 같은 '엄마'라는 존재가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엄마의 집에는 '오함마'라는 별명을 가진 50대 초반의 덩치만 큰 잉여인간인 형 오한모가 버티고 있다. 이미 큰 집에 다녀오길 수 차례, 별을 여러 개 갖고 있는 그 역시 자신의 가족을 만들지 못하고 '엄마'를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집가서 살던 오미연이 두 번째 이혼하면서 딸 민경까지 끌고 들어와 이제 아버지의 죽음 (사고사)에 대한 대가로 생긴 방 3칸짜리 24평 연립주택에는 5식구가 살게 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오인모만이 제대로 된 가족 구성원의 자식이며 오한모는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배다른 형제, 오미연은 엄마가 바람을 피워서 생긴 씨 다른 여동생이니 엄마를 중심으로 볼 때 법적으로 결혼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생긴 자식은 오인모가 유일하다는 얘기다.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 집안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콩가루 집안이 '엄마'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가족으로 재결합된다.
 
사람이란 보통 두 가지의 가족을 갖게 된다. 하나는 나의 뿌리가 있는 가족 또 하나는 내가 뿌리가 되는 가족. 전자는 우리가 언제나 애틋하고 막연히 눈물짓게 만드는 부모님이 있는 가족이고 후자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를 믿고 바라보는 구성원이 있는 가족이다.
 
고령화 가족의 삼 남매가 모두 자신이 뿌리가 되는 가족을 만드는 실패하고는(여기서 실패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 이유는 적어도 시도는 해 보았다는 뜻이다) 찾은 곳이 한결같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연어마냥 엄마의 품이 있는 곳, 그러니까 나의 뿌리가 있는 가족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사랑에 의한 상처는 사랑으로 잊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하는 것처럼 가족에 의해 생긴 상처는 가족을 통해 잊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그것도 우리가 힘들면 언제나 찾게 되는 엄마의 품이 있는 가족을 통해.
 
그리고 엄마는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원래부터 그렇게 살아 왔다는 듯 그렇게 모인 자식들을  모두 받아준다. 누구는 피 한 방울 안 섞이고 누구는 아버지가 다른 자식이었지만 모두 받아준다. 그것도 모자라 몇 달 동안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고기반찬을 해 먹인다. 그런 상황에 대해 오인모는 (사실은 작가의 생각이겠지만)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 끼니를 챙겨주는 것뿐이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고기를 해 먹인 것은 우리를 무참히 패배시킨 바로 그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몸을 추슬러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우라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엄마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자식이 밖에서 어떤 일을 겪고 왔든, 무슨 일을 당하고 왔든 따뜻하게 가슴으로 안아주는 존재. 그럼으로써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언제나 그립고 따뜻한 존재.
 
헤밍웨이와 동네 미장원 수자씨, 약장수와 같이 다양한 재미 거리가 있는 이 책이 중반 이후 이야기 전개가 산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아쉽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마치 '이사카 코타로'처럼 등장인물 각각에 독특한 성격과 이미지를 부여하는 작가의 능력도 훌륭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콩가루 가족'으로 만들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작가의 능력도 탁월하다.

무엇보다 나의 뿌리가 되는 가족,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도 언제나 애틋하게 가슴에 남을 엄마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것이 '역시 천명관'이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괜찮다. 천명관의 다음 작품 혹은 다른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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