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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댄서와 혁명적 퍼포먼스, 보아가 외친 뼈 있는 한마디

[기획] 이미자부터 걸스데이까지, 가요 속 '여자의 일생'

등록|2018.09.12 13:43 수정|2018.09.12 13:43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솔(Soul)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은 1967년의 빌보드 1위 곡 'Respect'를 통해 스타로 일약 부상했다. 오티스 레딩의 원곡을 커버한 노래에서 화자는 남편을 향해 '집에 돌아와서는 나를 존중해달라'고 소리친다.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통렬하게 깨부수는 가사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놀라운 가창력과 함께 당대의 미국 여성들에게 통쾌감을 안겼다. 'Respect'가 1960년대 공민권 운동의 송가이자 여성운동의 찬가였던 이유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여성들을 위로하는 버팀목 같은 노래가 나왔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1968년 히트곡 '여자의 일생'이다. 가사는 이렇다.

이미자와 보아
 

▲ 이미자 <여자의 일생> ⓒ 지구레코드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 못 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 '여자의 일생', 이미자(1968)

얼핏 봐도 미국의 'Respect'와는 정반대다. 노래 속 인물은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 못 하고, 참아야 한다기에 일생을 눈물로 보낸다. 지금의 관점에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노래가 발표된 50년 전 경제 개발 시대의 한국 사회는 이와 같은 여성상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쟁 세대의 많은 여성, 특히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이미자와 '여자의 일생'을 각별히 여기는 까닭은 그들의 한과 설움을 노래로써 달래줬기 때문이다. '동백아가씨', '여로', '기러기 아빠' 등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게 나에게 여자가 여자다운 것을 강요해"

지난 2005년, 스무 살이 된 보아는 새 앨범의 타이틀곡 첫 소절에서 위 가사를 날카롭게 내뱉었다. 제목부터 무려 'Girls On Top'이었다. 이전의 소녀 같던('No.1', '아틀란티스 소녀'), 혹은 성숙을 표방했던('Valenti', 'My Name') 시절을 뒤로한 환골탈태의 모습이었다. 제복을 입고 삐죽빼죽 머리를 세운 그는 '여자의 일생' 시절엔 상상도 못 했을 선언을 노래에 담았다.
 

▲ 보아 < Girls On Top > ⓒ SM엔터테인먼트

 
"나는 나인걸 누구도 대신 하지 말아
그렇게 만만하게 넘어갈 내가 아니야
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고 싶어
그늘에 갇혀 사는 여자를 기대하진 마"
- 'Girls On Top', 보아(2005)

그는 '그늘에 갇혀 사는 여자'를 기대하지 말라고 외쳤다. 무대에서는 남성 댄서에게 발길질하고 그들의 등에 올라타기도 했다. 굳세고도 과감한 선포에 일각에서는 우려 섞인 비판, 볼멘소리도 나왔다. 이에 보아는 "남성에 순종하는 여인상보다 한국의 여인으로 성장한 보아를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보다 많은 여성이 당당하게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응답했다. 노래는 구시대의 가치관을 뒤로하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고속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연애의 풍토 또한 달라졌다. 그 시절의 여성은 대개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심수봉의 히트곡 '여자이니까'에는 이러한 풍경이 나타난다.

심수봉과 걸스데이
 

▲ 심수봉 <여자이니까> ⓒ 신세계레코드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 못해 나는 여자이니까
만나자고 말할까 조용한 찻집에서
아니야 아니야 난 싫어 나는 여자이니까
사랑한단 말 대신에 웃음을 보였는데
모르는 체 하는 당신 미워 정말 미워"
- '여자이니까', 심수봉(1979)

노래 속 여인은 여자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좋아하는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사랑한단 말 대신 웃음을 보였는데, 몰라주는 당신이 야속해도 그저 원망만 할 뿐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곡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1984)는 어떤가. 떠나가는 남자는 배, 남아있는 여자는 항구에 빗댄 노래에서, 여자는 남자를 말없이 보내고 '눈물지으며 힘없이' 돌아온다. 그 시절 우리 사회는 여성이라면 사랑에도, 이별에도 수동, 피동적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 걸스데이 <여자 대통령> ⓒ 드림티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제 여자 분이신데 뭐가 그렇게
심각해 왜 안 돼 여자가 먼저 키스하면 잡혀가는 건가
그 애에게 다가가 니가 먼저 키스해
이제 그래도 돼 니가 먼저 시작해"
- '여자 대통령', 걸스데이(2013)

그룹 걸스데이의 2013년 히트곡 '여자 대통령'은 '여자이니까'의 대척점에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에서 모티브를 얻은 노래는 여자가 먼저 사랑을 말하면 '왜 안 돼'냐고 물으며 '여자가 먼저 키스하면 잡혀가는' 거냐고 묻는다. 2000년대 이후 여성의 주체적인 연애관에 관한 가사가 여럿 나왔지만, 이보다 직설적이고 당돌한 가사는 많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날 것의 언어로 표현한 곡이다.

대중음악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보아의 'Girls On Top'은 각각 그 시대 여성의 모습을 포착한 노래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현안으로 떠오른 요즘은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밴드 만쥬한봉지는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뮤지컬 <헤드윅>에서 영감을 받은 앨범 <수연>(2017)을 통해 보편적인 20대 후반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고, 래퍼 슬릭은 최근 발표한 앨범 < LIFE MINUS F IS LIE >(2018)에 페미니스트로서 나아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담았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많은 여성 음악가들이 여성의 이야기를 쓰고 부를 것이다. 그 안의 노랫말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관찰하며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 도봉문화재단 <무지개클럽 수요음감회> ⓒ 도봉문화재단



▶ 행사명 : 무지개클럽 <수요음감회>
▶︎ 주최 : 도봉문화재단
▶︎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행사 진행 : 정민재(웹진 이즘 필자, 대중음악 평론가)
▶︎ 행사 일시 : 09월 19일(수) 19:00 ~ 20:30
▶︎ 행사 장소 : 무중력지대 도봉
▶︎ 행사 주제 : 여성 : <여자의 일생> (with 싱어송라이터 백아)
▶︎ 행사 접수 : https://goo.gl/forms/2tEEPIKgr57R04ae2
▶︎ 행사 문의 : 도봉문화재단 기획홍보팀 lgy@dbfac.or.kr, 02-908-2900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민재 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minjaejun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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