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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축구대회 결승전, '반동분자'라서 뛰지 못하고

[탈북청년 ①] 함경북도 무산에서 온 김지우(가명, 25) 이야기 上

등록|2018.09.13 07:49 수정|2018.09.13 09:15
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 말
 

▲ 피시방에서 싸움이 붙다. 일러스트: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 [프롤로그 보셨나요? 아직 안보셨다면 여기 클릭!] 탈북청년들의 진짜 이야기, 시작합니다

"야 이 새끼야!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사람을 패!"

남의 나라? 이 경찰관이 미쳤나!

"이 씨X, 이것 봐라!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와 버렸다.

문제의 발단은 가양동 피시방에서 시작했다. 팔뚝에 시커먼 문신을 한 건장한 세 남자가 피시방에 들어왔다.

"야 나와 새끼야!"

세 남자는 갑자기 내 자리로 오더니 시비를 걸었다. 셋이 나란히 앉겠다고 비키라는 것이다.

"뭐야 이 새끼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가양동의 왕ㅇㅇ라고 못 들어봤냐?"라고 해서 "그걸 내가 왜 알아야 되냐"라고 받아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내 말투를 가지고 시비다.

"야 이 새끼 말투가 왜 이래? 너 조선족 아니야?"

하… 이것들 봐라.

"나와 새끼들아!"

서울 가양동 피씨방에서 싸운 날

의자를 들어 한 놈을 치고 나머지에 달려들었다.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가서 지독하게 싸웠다. 그때 누군가 신고를 한 것인지 경찰이 왔다. 3대 1 싸움이고 시비도 저놈들이 먼저 걸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의자로 때렸던 한 놈의 눈 옆이 찢어진 것이다. 그놈이 합의를 안 하겠다고 옥신각신하는 중에 경찰관이 그 개소리를 한 거다.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사람을 패!"

남의 나라? 나는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옆에 앉아 있는 깡패 새끼들보다 그 경찰이 더 미웠다. 화가 나서 지갑에 주민등록증을 꺼내 들고 경찰관에게 집어던졌다. "이 씨X! 똑똑히 봐라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난리를 치니 그때야 다른 형사가 와서 그 경찰에게 인권침해이니 사과하라고 했다. 그렇게 피시방 싸움의 전말은 끝이 났다.

나는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난 김지우(가명, 25세)다. 한국에서는 나보고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데, 북한에서는 내가 반동분자라고 했다. 3살 때 이혼한 어머니는 남으로 가셨고, 큰 외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참전용사이다 보니 누가 봐도 영락없는 반동분자 가문이었다. 어머니가 탈북자라고 인민 학교(초등학교)도 못 들어갔다. 나중에 외조부님 아들로 호적을 옮기고 나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나보고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했고
북한에서는 나에게 반동분자라고 했다

 

▲ 반동분자. 일러스트: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동네 어른들은 모이면 우리 집안에 대해 떠들었다. 아이들도 똑같았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학교에 가기 싫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괴롭힘은 심해져 갔다. 살고 싶었고, 강해지고 싶었다. 그때 동네에 노는 형들이 떠올랐다. 가죽 재킷을 입고 담배를 피우던 형들. 그들은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았다. 형들한테 담배도 배우고 심부름을 하기 시작했다. 변화가 느껴졌다. 나를 건드리던 아이들은 사라졌고 오히려 나를 무서워했다. 동네 애들을 지나가며 어깨를 치고 가도 아무도 대꾸를 못 했다.

그 이후로 아무도 우리 집안 이야기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하지만 무리가 생기니 시비가 붙을 때마다 무리 싸움(패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커지면 선생님이나 경찰이 와서 잡아가기도 하는데 나는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 미꾸라지라는 별명이 생겼다.

친구들과 싸움만 한 것은 아니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면 40~50명이 떼로 모여 파티를 연다. 파티의 묘미는 역시 춤과 음악이다. 집을 제공한 친구가 CD로 노래를 틀면 파티가 시작된다. 흥에 겨워 춤도 추고 술도 마신다. 주로 팝송에 맞춰 춤을 췄고, 노래가 없으면 라이브로 부르기도 했다. 청춘 남녀가 모이니 마음에 드는 애가 있으면 다가가 말도 걸었다. 그러다 보니 다들 이성 친구를 만나려 파티 날만 기다렸다. 간혹 집주인 부모가 일찍 들어와 걸리는 날도 있었다. 처음 걸렸을 때는 가슴이 철렁하고 엄청나게 혼날 줄 알았는데, 웬걸, 놀 땐 놀라며 술이 가득 담긴 들통까지 내어주셨다.

지금 와서 보니까 북에서의 연애는 남에서의 연애와 매우 달랐다. 여기서 소위 '썸'이라고 부르는 것이 없었다. 북한은 모 아니면 도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남자가 여자에게 "사귀자"라고 얘기한다. 여자는 남자가 마음에 들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일단 사귀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처럼 썸을 탄다며 우물쭈물하거나 뭔가 재는 것으로 보이면 사내답지 못하다며 싫어한다.

북한 경찰 피해 이불 덮고 봤던 한국 방송
 

▲ 일러스트: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싸우고 술 마시는 것도 좋지만 제일 좋은 것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던 막내 이모 덕분이다. 어릴 때는 비디오테이프로 구해 봤는데 14살 때부터 CD로 보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기억하면 <장군의 아들> <영구와 땡칠이> <경찰 특공대>를 봤던 게 생각난다. 한번은 <경찰 특공대>의 한 장면에 재연 장면이 나오는데 김정일 초상화가 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초상화를 막 가져다 쓸 수 있는 저곳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테이프와 CD가 있다고 해서 마음껏 TV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찰들은 한국 방송을 보는 현장을 잡으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나는 안 걸리려고 TV를 이불로 덮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보기도 했다. 소리도 최소한으로 줄여놓고 봤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고 싶을 만큼 재밌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았다. 인민학교에서 4학년 때부터 6년을 축구부 생활을 했다. 선수 생활 마지막 해, 전국 축구대회 결승전에 출전 기회가 생겼다.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였다. 밤새 머릿속으로 골 넣는 장면을 생각하며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경기 당일, 감독님이 나를 불러냈다. "지우야 너는 이 경기 출전 못 한다." 이유를 물으니 반동분자라서 안 된단다. 그럴 거면 나를 왜 데려갔을까.

학교를 졸업할 때가 돼서 나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정복이 입고 싶었다. 그런데 입대 불가 통지를 받았다. 중국으로 출국한 기록이 있고, 부모가 행방불명된 사람은 군대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뇌물을 써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꼼짝없이 농장원이 돼서 농사를 지어야 할 운명이 됐다. 끔찍했다. 내 스타일 구기는 일이다.

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일러스트: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남쪽 엄마에게 전화를 하다

한국으로 갔다는 엄마가 생각났다. 아주 가끔 기억에서 잊힐 즈음 전화를 걸어 목소리만 듣던 어머니다. 용기를 내서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나 군대 가려고..."
"안돼, 군대는 가지 마라."
"아니 그게 아니라, 나 반동분자라고 군대 못 간대. 한국 가고 싶어."
"… 너 여기 와서 살 수 있겠어?"
"거기라고 여기랑 다를 거 있어? 그냥 여기서 살듯이 살면 되는 것 아니야?"
"정말이지? 그런 마음이라면 와도 되겠다.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 말고 거기서 살듯이 아등바등 살면 여기서도 살 수 있어."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행을 결정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 일러스트: 미디어눈 은성 작가 ⓒ 미디어눈

덧붙이는 글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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