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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청년정치인의 조건

[청년정치와글와글-칼럼] 세대가 아니라, 시대를 대의하는 청년이 필요하다

등록|2021.04.01 10:43 수정|2021.04.01 10:43
1. 나는 누구인가

이설아입니다. 바꾸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학내 성희롱을 저지른 교수를 학생들로부터 분리하고, 코로나19로 인해 수업권을 침해당한 학생들의 등록금을 보전하고, 홍콩과 태국과 미얀마에서 민주항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또래 청년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대한민국의 변화를 꿈꿨습니다. 또 당연한 듯 아빠 성을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정상가족성의 문화도 변화시키고 싶었습니다(관련 기사 : "아빠 성 우선주의는 기본권 침해"… 낡은 가족제도 흔드는 94년생 여성).

그래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한 정당에서 계파다툼의 틈바구니에서 당직자로서 지속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고, 청년단체를 만들어 시민학살을 옹호하는 배우가 출연한 디즈니 '뮬란' 영화의 보이콧을 주도했고, 부성우선주의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제가 해온 활동들은 어느 순간부터 언론에 자주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느낀 것은, '아, 법 하나 바꾸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모 정당의 경기도당 대학생위원장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강사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사학들이 비정규직 강사 비율을 낮추기 위해, 강사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잘라내는 편법 법적용을 자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법률 제정 당시 강사 구조조정을 대비해 전년도 대비 일정 정규직 전환율 강제 등의 규정을 넣었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 2020년 7월 1일 홍콩 시민학살을 옹호한 유역비(류이페이) 주연의 영화 <뮬란> 보이콧 선언식을 개최했다. ⓒ 세계시민선언


그런데 현장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알리는 것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관련 단체들이 아무리 성명을 내도 정치권과 접점이 없으면 알려지기가 힘든 문제이니까요. 그래서 국회 정론관에서 해당 내용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결국 실패했습니다. 정론관에 서러면 정당 대변인이나 국회의원이 신청을 해줘야 하거든요. 당시 계파 갈등으로 혼잡했던 정당에서는 일개 대학생 당직자에게 정론관을 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정당에 속해있을 때도 그러할지언데,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국회에 알려야 할까요? 청와대 국민청원이 존재한다지만 정부의 답변을 얻기 위한 10만 명을 모으는 것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10만 명을 모은다고 해도 실제적인 변화가 생기리라고 무조건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세상을 많이 바꾸고 싶습니다. 돈 없는 사람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정체성 하나 때문에 사회적 배제를 당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오길 바라며 청년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해나가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그러한 길에 동참해주셨으면 감사하겠다는 말을 전하며 글의 운을 떼려고 합니다.
 

▲ 태국 연대선언 기자회견 중 세 손가락 경례 중인 모습 ⓒ 세계시민선언


2. 법은 왜 안 바뀌는가

돌이켜 보면 20대 청년이 혼자 노력한다고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의 몇 년을 갈아 넣는 끝에 언론에 나의 말을 전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지만, 모든 사람들이 생업을 마다하고 저처럼 해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언론이 보도한다고 해도 법을 바꾸는 국회의원들이 관심 가지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고요.

호주제 폐지까지는 여성단체의 총체적인 노력 끝에 무려 10여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디지털성범죄가 범죄로 규정되기까지도 피해자 및 피해 유가족들의 생을 바친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하다못해 개인이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것도 반드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기 때문에, 수백만 원의 변호사 선임료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단체 등에서 긴 시간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법을 만들 수 있는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법률 수요자가 원하는 법률들을 국회가 제정하는 게 왜 이토록 어려울까요? 그것은 아마 국회가 새로운 법을 원하는 사람들과 너무 동떨어진 구성원들로 이뤄졌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평균연령 55.5세, 평균신고재산 22억 원, 남성 일색인 국회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3. 그래서 청년정치가 필요하다

맞습니다, 이 글은 흔하디흔한 '그래서 청년정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일환으로 적힌 글입니다. 누구나가 청년정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리 이야기해도 부족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청년정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마 10년 후에도 나올 것입니다.

그럼에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청년·학생 계층으로부터 실질적인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은 바로 '청년정치가 세대가 아니라 시대를 대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홍콩의, 태국의, 미얀마의 시위운동 주축,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독립운동을 지속해오던 사람들까지 그 중심에는 청년·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과연 청년들이 똑똑하고 유별나게 용감해서 그랬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청년이 새로운 세대의 물결에 더욱 민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얀마 시민들과 연대하는 침묵행진을 벌였다. ⓒ 세계시민선언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역동적인 나라가 되려고 할수록 청년정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처럼 법률을 만들 때 '그래서 그 법률이 왜 필요한데?'라며 이해부터 차근차근 시켜야 하는 고루한 국회보다, '왜 아직도 이 법률이 없지?'라며 제도화를 위한 공부에 나서는 국회가 훨씬 발전적일 테니까요. 청년정치의 의의는 그런 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 40대 대통령을 둔 나라 프랑스는 헌법 제1조에 "기후변화와 맞서 싸운다"는 내용을 추가했다고 하죠. 정치권이 젊은 만큼 기후위기라는 새로운 세대 담론에 민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요? 대통령의 탄소중립 넷제로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력발전소 건설은 우후죽순 이뤄지고 있습니다. 탄소중립 배출에 대한 정치권의 컨센서스조차 이뤄지지 않은 것이죠.

요즘 게임계에서 논란인 '확률형 아이템' 관련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부터 분명 문제가 돼왔던 것을 왜 소비자들이 단체를 꾸려서 정치권에 확률형 아이템이 무엇이고, 왜 소비자들을 기만하는 정책인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까요? 그것은 게임이 분명 대중의 다수가 즐기는 하나의 생활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 중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청년 정치인들이 많았다면 과연 이른 정치권의 '지각대응'이 발생했을까요?

청년정치가 필요하다는 말 만큼이나 또 횡행하는 것은 '청년정치 무용론'입니다. 정작 청년들을 데려와도 바뀌는 게 별달리 없다는 논리죠. 이는 제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간단하게 반박됩니다. 시대를 대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세대를 보고 픽업한 청년 정치인이라면, 무언가 바꿀 수 없는 게 당연하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메시지를 가진, '시대 감수성'을 가진 청년 정치인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들이 상향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역시 반드시 확충돼야 합니다.

지난 세월에 비해 분명 우리는 청년정치인들을 많이 배출하고는 있습니다. 21대 국회에도 20대 국회의원인 류호정, 전용기 의원이 존재하죠. 그럼에도 300명 국회의원 중에 20대 국회의원이 단 둘뿐인 0.6%라는 것은, 20대 인구수가 13.2%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22대 국회에는 청년정치인들이 좀 더 늘어나길 기대하며, 이만 글을 줄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세계시민선언 공동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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