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산 하얀 방'의 의미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 45] "이런 일들은 왜, 어째서, 무슨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 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 ⓒ 조우성
그는 몽환(夢幻)과 현실이 뒤섞이는 나날을 보내었다.
'알코올 중독에 의한 정신 황폐증세'가 도졌다. 그는 말한다.
괴로움과 외로움으로 술을 마셔야 했고 마신 술은 영육을 갉아먹었다. 이 시기에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에 실린 시를 짓게 된 배경을 보자.
해남에서 어느 날 밤 우연히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 접혀들며 속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소리, 잇달아 떠오르는 느낌, 생각, 울부짖음, 마치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내 속에서 불러주는 듯한 소리가 있어 그대로, 취한 듯 정신 잃은 듯 떠오르는 그대로 구술하기 시작했고 아내가 그걸 받아썼다.
그리고 일체 수정ㆍ가필ㆍ추고하지 않았다. 형식문제, 곧 가락이나 장단, 말의 생동성 따위 나의 평소의 관심사는 일단 제쳐 두기로 했다. 그 소리 속에서 움직이는 종잡을 수 없는 어둡고 비통한 흔들림과 눈부신 흰빛의 섬세한 떨림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이것이 〈검은 산과〉과 〈하얀 방〉이다. (주석 13)
책의 구성은 1. 촛불, 2. 검은 산 - 무릉계에서, 3. 하얀 방 - 백포방에서, 4. 검은 산 하얀 방 너머, 5. 바다 순으로 총 46수가 실렸다. 서시 격인 <촛불>의 상징성에서 자신을 비추는 것 같다.
촛 불
나뭇잎 휩쓰는
바람 소리냐 비냐
전기는 가 버리고
어둠 속으로 그애도 가버리고
금세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눈에 핏발 세우던 그 애도 가버리고
촛불
홀로 타는 촛불
내 마음 휩쓰는 것은
바람 소리냐 비냐. (주석 14)
▲ 서림공원의 가을김지하 시인이 한때 해남에 머물며 이 숲길에서 지친몸을 풀었다 ⓒ 정윤섭
김지하가 불과 물의 건널목 징검다리 쯤에서 그리고 생명사상의 본격적인 탐구 초입에서(1986년 4월 19일) 쓴 시집의 <머리말>은 이 시기 그의 사상ㆍ신념의 일단을 밝혀주고 있다.
이 소리들, 이 모든 말, 말, 말들은 과연 초혼인가, 진혼인가? 불림인가, 살풀이 인가?
과연 이것들이 이 땅에 가득 찬 저주와 살(煞)을 풀어 줄 힘이 있는 것인가? 불림은 동강나 갈라지고 서로 헤어지고 흩어지고 조각 조각나 죽임당한 신명을 하나로 모아 불러내는 주문(呪文),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신명을 깨우쳐 일으키는 불림은 그대로 곧 신명을 가르고 헤어지게 하고 흩어지게 하여 죽이고 감추는 살을 없애는 일. 오늘 이 땅에 그 어떤 불림이 있어 조각난 채 숨어 잠자는 신명을 깨워 불러모을 것인가? 오늘 이 땅에 그 어떤 놀이꾼이 있어 가득 찬 살을 없애는 신명의 사제가 될 것인가?
그 소리, 속으로부터 울려나오던 그 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그 무엇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조짐인가? 이런 일들은 왜, 어째서, 무슨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주석 15)
주석
12> <회고록(3)>, 201쪽.
13> 김지하 시집, <머리말>, <검은 산 하얀 방>, 10쪽, 분도출판사, 1986.
14> 앞의 책, 21쪽.
15> 앞의 책, 13~1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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