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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산 하얀 방'의 의미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 45] "이런 일들은 왜, 어째서, 무슨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등록|2022.07.25 15:37 수정|2022.07.25 15:37

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남조선 사상을 설파하는 김지하씨 ⓒ 조우성


그는 몽환(夢幻)과 현실이 뒤섞이는 나날을 보내었다.

'알코올 중독에 의한 정신 황폐증세'가 도졌다. 그는 말한다.

"내 병의 최초의 근원은 유년기의 사랑결핍과 욕구 불만이었고, 최근의 원인은 과도한 알코올 중독인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주석 12)

괴로움과 외로움으로 술을 마셔야 했고 마신 술은 영육을 갉아먹었다. 이 시기에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에 실린 시를 짓게 된 배경을 보자.

해남에서 어느 날 밤 우연히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 접혀들며 속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소리, 잇달아 떠오르는 느낌, 생각, 울부짖음, 마치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내 속에서 불러주는 듯한 소리가 있어 그대로, 취한 듯 정신 잃은 듯 떠오르는 그대로 구술하기 시작했고 아내가 그걸 받아썼다.

그리고 일체 수정ㆍ가필ㆍ추고하지 않았다. 형식문제, 곧 가락이나 장단, 말의 생동성 따위 나의 평소의 관심사는 일단 제쳐 두기로 했다. 그 소리 속에서 움직이는 종잡을 수 없는 어둡고 비통한 흔들림과 눈부신 흰빛의 섬세한 떨림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이것이 〈검은 산과〉과 〈하얀 방〉이다. (주석 13)

책의 구성은 1. 촛불, 2. 검은 산 - 무릉계에서, 3. 하얀 방 - 백포방에서, 4. 검은 산 하얀 방 너머, 5. 바다 순으로 총 46수가 실렸다. 서시 격인 <촛불>의 상징성에서 자신을 비추는 것 같다.

    촛    불

 나뭇잎 휩쓰는
 바람 소리냐 비냐
 전기는 가 버리고
 어둠 속으로 그애도 가버리고
 금세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눈에 핏발 세우던 그 애도 가버리고
 촛불
 홀로 타는 촛불
 내 마음 휩쓰는 것은
 바람 소리냐 비냐. (주석 14)  

서림공원의 가을김지하 시인이 한때 해남에 머물며 이 숲길에서 지친몸을 풀었다 ⓒ 정윤섭


김지하가 불과 물의 건널목 징검다리 쯤에서 그리고 생명사상의 본격적인 탐구 초입에서(1986년 4월 19일) 쓴 시집의 <머리말>은 이 시기 그의 사상ㆍ신념의 일단을 밝혀주고 있다.

이 소리들, 이 모든 말, 말, 말들은 과연 초혼인가, 진혼인가? 불림인가, 살풀이 인가?

과연 이것들이 이 땅에 가득 찬 저주와 살(煞)을 풀어 줄 힘이 있는 것인가? 불림은 동강나 갈라지고 서로 헤어지고 흩어지고 조각 조각나 죽임당한 신명을 하나로 모아 불러내는 주문(呪文),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신명을 깨우쳐 일으키는 불림은 그대로 곧 신명을 가르고 헤어지게 하고 흩어지게 하여 죽이고 감추는 살을 없애는 일. 오늘 이 땅에 그 어떤 불림이 있어 조각난 채 숨어 잠자는 신명을 깨워 불러모을 것인가? 오늘 이 땅에 그 어떤 놀이꾼이 있어 가득 찬 살을 없애는 신명의 사제가 될 것인가?

그 소리, 속으로부터 울려나오던 그 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그 무엇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조짐인가? 이런 일들은 왜, 어째서, 무슨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주석 15)


주석
12> <회고록(3)>, 201쪽.
13> 김지하 시집, <머리말>, <검은 산 하얀 방>, 10쪽, 분도출판사, 1986.
14> 앞의 책, 21쪽.
15> 앞의 책, 13~1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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