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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박찬호 같은 영웅을 볼 수 있을까

뒤늦게 열린 은퇴식... 그는 한국야구에 무엇을 남겼나

14.07.19 15:34최종업데이트14.07.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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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바이 박찬호 18일 오후 광주 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올스타전 경기에 앞서 가진 박찬호 선수 은퇴식에서 박찬호가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야구의 전설' 박찬호가 감동의 은퇴식을 남기고 화려했던 선수생활에 정식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2012년 한화 이글스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지 1년 8개월만이다.

지난 18일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앞서 박찬호를 위한 특별 은퇴식이 열렸다. 별들의 제전인 올스타전에서 특정 선수만을 위한 은퇴식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은퇴식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져왔으나 박찬호가 한국야구에 남긴 업적과 상징성을 감안할 때 이대로 흐지부지 떠나보내는 안 된다는 선수협회의 적극적인 요청에 힘입어, 국내야구 최대의 축제인 올스타전에서 박찬호를 위한 시간이 마련됐다.

의전 차량을 타고 등장한 박찬호는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고 등에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61번을 달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박찬호의 현역 시절 활약상을 담은 영상이 계속 흘러나왔다. 팬들의 박수와 환호속에 마운드로 향한 박찬호는 올스타전 개막을 알리는 시구를 했다. 포수 자리에는 박찬호의 공주고 선배인 NC 다이노스 김경문 감독이 앉아있었다. 박찬호는 시구를 마친 뒤 김 감독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고, 뒤이어 이날 올스타로 뽑힌 후배 선수들도 모두 그라운드로 나와 박찬호를 둘러싸며 헹가래를 했다.

구본능 KBO 총재로부터 공로패를 받은 박찬호는 아내와 두 딸이 함께 하는 가운데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영광스럽고 특별한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야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해주신 팬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대한민국 야구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박찬호는 한국야구의 선구자였다

'코리안특급' 박찬호의 야구인생은 그 자체로 인생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있는 한편의 대하드라마다. 박찬호는 스물두살이던 1994년 한양대 2학년 때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스카우트되어 혈혈단신으로 미국땅에 건너가 온갖 어려운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앞으로 박찬호를 능가하는 선수가 또 나올 수도 있겠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한국인 메이저리거사의 기원은 박찬호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의미다. 어떤 대상이건 '처음'이라는 수식어는 항상 특별한 설렘을 선사한다. 갈색폭격기 차범근이 아직 한국 축구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않았던 70년대 당시 세계 최고의 무대였던 독일 분데스리가를 평정하며 지금도 유럽축구계에서 레전드로 인정받고 있듯이, 야구에서는 박찬호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한국야구가 아직 변방에만 머물던 시절, 박찬호는 먼 발치에서나 바라보던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를 현실로 다가오게 만든 개척자였고, 최정상의 위치까지 오르며 한국인과 한국스포츠의 자긍심을 높여준 스포츠 영웅이었다.

박찬호가 남긴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선수를 비롯하여 17년간 통산 124승을 수확하며 아직도 깨지지않은 동양인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인 투수 한 시즌 최다승(18승. 2000년), 첫 올스타전 출전(2001년), 5년연속 10승(97~2001년. LA 다저스) 이상 등 화려한 기록을 남기며 전성기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정상급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2001년에는 FA자격을 얻어 5년간 6천5백만 달러의 연봉대박을 터뜨리며 한국스포츠 선수 사상 수입 1위에 오르는 등 다양한 진기록을 만들어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클래식 4강 등에 공헌하며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공교롭게도 박찬호의 전성기는 한국 사회가 IMF로 인해 경제난으로 고통받던 시절이었다. 전국민이 어려운 경제사정과 패배의식에 휩싸여있던 그때 '공주 촌놈' 박찬호가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맨주먹으로 역경을 극복해가며 성공신화를 써내려가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할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박찬호의 선발 등판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마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새벽잠을 설쳐가며 TV 앞으로 모여드는 팬들이 대다수였다.

또한 박찬호가 한창 활약하던 시기는 이른바 '약물의 시대'로 평가받을 만큼 메이저리그에서는 지우고싶은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 상당수의 정상급 선수들 사이에 금지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전성기의 박찬호는 약물의 힘까지 빌린 메이저리그 최고 거포들을 상대로도 주눅들지 않고 150Km대의 강속구로 당당히 타자를 윽박지르던 당대 최고의 파워피처였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한국야구의 길을 개척해 놓았기에 후배들이 그 뒤를 이을수 있었다. 김병현-서재응-최희섭-김선우-조진호 등으로 이어지는 메이저리거 1세대가 등장했고, 지금의 류현진-추신수 등이 2세대라고 할수 있다. 지금도 수많은 유망주들이 제 2의 박찬호를 꿈꾸며 메이저리그를 향한 도전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박찬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증명했기 때문이다. 박찬호 역시 메이저리거로 성공한 이후 장학재단을 설립하며 국내의 야구유망주와 인프라 육성에 기여하고 있다. 박찬호가 아니었다면 한국야구의 메이저리거 역사는 훨씬 늦어졌을 수도 있다.

시련과 상처도 인생의 일부다

물론 박찬호의 인생이 항상 화려한 봄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박찬호만큼 성공과 추락의 롤러코스터 굴곡이 극심했던 선수도 찾기 힘들다. 다저스 시절이던 1999년 한만두 사건(한이닝 연타석 만루홈런), 메이저리그 10대 난투극에 이름을 올린 팀 밸처와의 이단옆차기 파문 , 2001년 배리 본즈의 홈런 신기록 희생양, 2006년 희귀병으로 인한 장출혈, 2012년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에서의 2군행 등 박찬호의 야구인생 곳곳에는 굴욕과 시련의 해프닝들도 적지않다.

무엇보다 2002년 이후 FA 대박으로 이적한 텍사스에서 허리 부상과 슬럼프에 빠지며 순식간에 '먹튀'로 전락한 것은 박찬호의 야구인생에 가장 가슴아픈 아킬레스건 중 하나다. 이후 박찬호는 샌디에이고-LA 다저스-필라델피아-뉴욕 양키스-피츠버그 등을 거치며 저니맨의 행보를 이어갔고 야구인생의 전성기에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박찬호를 더욱 박찬호답게 만든 것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근성과 끈기였다. 어쩌면 그러한 도전 정신이야 말로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박찬호를 진정한 야구영웅으로 존경받게 만든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2007년 뉴욕 메츠에서의 방출과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이제는 한물간 선수라고 팬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와중에도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재기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고, 이듬해 구원투수로 변신에 성공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0년에는 피츠버그에서 마침내 노모 히데오의 기록을 뛰어넘는 아시아 최다승 투수 반열에 오른 이후 미련없이 빅리그 생활을 정리했다. 이후 박찬호는 일본을 거쳐 고향팀인 한화 이글스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보내고 2012년 은퇴를 선언했다.

돌이켜보면 박찬호의 야구인생에는 성공도 실패도 있었고, 잘한 선택도 그렇지못한 선택도 있었다. 하지만 박찬호는 언제나 자신만의 주관과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지금까지 달려왔고 은퇴와 그 이후까지도 흔들림없이 '마이 웨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인생에 있어서 한번의 성공과 좌절이 전부는 아니며, 언젠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이후의 삶 또한 충분히 가치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 바로 박찬호의 야구인생이 주는 진정한 교훈이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박찬호의 성적만이 아니라,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흔들리지않았던 박찬호의 도전정신과 꾸준한 성실성이다. 한때 빛나는 선수는 많지만 그 빛을 오래 유지하기란 정말 힘들다. 박찬호가 동양인 최다승을 넘어 20년 가까이 한-미-일을 넘나들며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운동 외적으로 수많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가혹한 언론과 팬들의 비난도 극복해내야 한다.

박찬호는 최전성기에도 사생활로 인한 구설수 등에 거의 오르내리지 않았고 운동 외적으로 한눈을 판 일도 없었다. 전성기를 지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모범적인 선수생활과 자기관리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냉정히 말해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레전드였지만, 한화나 한국프로야구의 레전드는 아니었던 선수가 국내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명예롭게 퇴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찬호라는 인물이 야구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얼마나 선후배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고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수 박찬호의 시대는 이제 끝났지만 야구인 박찬호의 역사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거로서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 인맥 등은 앞으로도 한국야구계의 발전을 위한 큰 자산이 될수 있는 부분이다. 이제부터 한국야구가 박찬호라는 훌륭한 브랜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지, 또다른 제 2의 박찬호를 육성해낼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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