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옥스브릿지의 학벌세습 논쟁

<김현종의 영국이야기 8> 두 명문대학과 우리

등록 2000.12.19 13:58수정 2000.12.1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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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 얘기지만 영국에도 명문 대학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합쳐 통칭 옥스브리지라고 부른다. 워낙 두 대학이 차지하는 학문적, 사회적 비중이 크기에 두 대학 이름이 합쳐져서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지난주 나의 논문 지도교수인 샤프 교수와 한영 양국의 명문 대학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좋든 싫든 양대 학교가 영국을 지배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설명을 종합하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이 인정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학교 교수진과 졸업생들이 과거나 현재나 영국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기 때문이다.
'노력 없이 인정 없다'는 논리다.

대체로 옥스퍼드는 공직에서의 봉사와 인문학에서, 케임브리지는 이과적 학문에서 영국을 발전시켰다. 멀리 갈 것 없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 케임브리지 출신이다.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쉬 연구소는 역대 교수, 연구원 중 물리학, 화학 등의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숫자가 프랑스 전체의 그것보다 더 많다.

반면 옥스퍼드는 문과가 강하다. 어문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이다. 졸업생 중 정치인만 보면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을 비롯해 현재 총리인 토니 블레어, 보수당 당수인 윌리엄 헤이그가 있다. 블레어와 헤이그는 부부 모두 옥스브리지 출신이다.
2차 대전후의 수상 중에서 에드워드 히스, 앤소니 이든, 클레멘트 애틀리 등이 옥스퍼드를 나왔다. 2차 대전 후 55년간의 역사 중 옥스퍼드 출신 수상이 재임한 기간은 30년이 넘는다.

영국의 엘리트, 또는 지도층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제 의무를 다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잘 알려진 대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뛰어나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빌리지(nobleless obilige)의 개념이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지도층에게 부여된 공인으로서의 책무라고 할까. 1차,2차 대전 때 두 대학교 학생들은 앞다퉈 전장으로 뛰어나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심지어 고교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옥스퍼드의 예비학교 격인 이튼, 케임브리지의 예비학교 격인 해로우 스쿨,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고나 기타 명문고 학생, 각각 수백 명이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의 나이에 자원병으로 전선에 달려갔다가 전사했다. 지금도 이 고교들에 가면 전사자 기념비가 있다. 두 대학에는 없다. 성년이 된 대학생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비단 학력 엘리트만 이런 게 아니다. 영국에 처음 와서 세익스피어의 생가가 있는 스트랫포드 근처의 고성(古城)에 가본 적이 있는데 문관과 무관을 골고루 배출한 귀족 집안이었다. 벽에는 십 몇 대 조상부터 부부의 초상화를 모셔놓았다. 초상화 밑의 간단한 설명문은 다름 아닌 영국사의 축소판이었다. 인도에 가서 반군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고, 나폴레옹 함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제국주의자다. 그러나 영국 입장에서 보면 귀족의 신분임에도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이다.

이러한 옥스브리지가 시대변화에 따라 도전을 맞고 있다.
우선 학문적 분야에서 타 대학의 도전이 거세다. 대체로 이과 계통에서는 케임브리지의 강세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옥스퍼드는 이과 학문 중 생명공학 분야가 두드러진다.
문과 계통은 춘추전국 시대다. 런던 정경대나 다른 대학의 도전이 거세다.

또 다른 이유는 두 학교가 학교 운영에 있어 고답적인 면모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옥스퍼드에는 경제학은 있어도 경영학은 없다. "경영학 같은 실용학문은 학문이 아니다"는 게 이들의 사고방식이다. 반면 학문적으로 필요한 희귀 학과는 고루 갖추고 있다. 고대 인도어로서 현재 인도에서도 사라진 범어(산스크리트어) 전공과정 같은 게 엄존한다. 한국 학생 중에서도 동국대를 졸업한 황순일 씨가 여기서 박사과정을 거의 마쳤다. 황씨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기의 유풍이긴 하지만 설립 취지를 떠나 인류 문명의 보존 차원에서 옥스퍼드의 기여가 자못 크다"고 진단했다.

영국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국가일진대 "옥스포드에 경영학과나 MBA 과정이 없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게 여론의 지적이었다. 그래도 옥스퍼드는 끝까지 버텼다.
그러다가 4년 전인가 사우디의 부호가 거액을 기부하겠다며 경영학 과정을 신설토록 요청했다. 대학 본부측은 대학 박물관 옆 비좁고 낡은 건물을 제시하며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마라"는 식으로 대했다. 화가 난 사우디 부자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배우냐"며 포기하겠다고 반발했다. 결국 언론이 나서서 옥스퍼드를 꺾었다. 현재 옥스퍼드 역 근처의 넓은 부지에 '사이드 이코노미 스쿨'의 신축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다.

현 시점에서 두 학교가 여론의 비판에 직면한 가장 큰 이유는 '학벌 세습' 논쟁이다. 부모가 옥스브릿지를 나왔고 아들 딸도 옥스브리지를 나오는 게 관례화 되고 있다.
구체적 사례로 학비가 비싼 사립 고등학교 출신이 상대적으로 입학시 우대를 받는 듯한 불평등이 지적되고 있다.

학벌 세습을 제기하는 쪽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케임브리지 대학생 중 20.1%는 부모 한쪽이 옥스퍼드, 혹은 케임브리지를 졸업했다. 또 39.6%의 케임브리지 대학생은 부모나 형제, 직계친척 중의 한사람 이상이 옥스브리지를 졸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옥스퍼드 대학생의 경우 공식 통계는 없으나 케임브리지의 그 숫자보다 10%포인트쯤 높다는 게 정설이다.

또 다른 통계도 있다. 올해 중순 사립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사립고교 학생들에게 "네 동급생 중에 옥스브리지에 진학한 경우가 몇 건이나 되느냐"고 물은 결과 사립고교 출신들은 40.5%가 "11명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11명 이상이란 경우는 전교1,2등 짜리의 옥스브리지 입학을 제외한, 보편적인 입학 가능성의 높고 낮음 차원에서 제시한 수치로 이해된다. 공립학교 졸업생들은 이 질문에 5.1%만이 그렇다고 답변했다.

실제 신입생 중 사립고등학교 출신 비율이 옥스퍼드는 45%, 케임브리지는 35%선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국내 전체 고교 재학생중 사립과 공립의 비율이 1대 4.5에 가까운 점을 감안하면 '한줌의 사립고교 학생'들이 옥스브리지에서는 절반 가까운 인적 구성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사실 영국이 중간 규모 크기의 국가로서 세계를 경영했고, 현재도 유력 국가의 대열에 끼는 것은 인재를 잘 훈련, 양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그만큼 교육열이 높은 게 우리와 비슷한 점이다. 평민의 부모들이 옥스브리지의 높은 문턱에 화를 낼만한 사회적 여건이 충분해 보인다.

이러한 불만은 특히 올해 중순 로라 스펜스라는 여학생이 역사와 영어 등 3개 과목에서 A레벨(1등급)을 받고도 옥스퍼드에 낙방하면서 전국적으로 끓어올랐다. 보통의 경우 옥스브리지는 3개 과목에서 A레벨을 받으면 합격이 무난하다. 그런데 로라 양은 낙방했다. 더구나 로라 양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합격통보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여론은 옥스퍼드의 신입생 사정 방식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대학 측은 자체 선발 기준을 들어 설명을 했지만 여론은 냉담했다. 결국 옥스퍼드 대학측은 내년도 선발부터 사립과 공립출신의 쿼터제 선발이나 특별활동 평가방식의 개선 등을 고려중이라고 밝혔다.

사립학교 출신들은 왜 어떻게 옥스브리지 입학이 유리할까. 우선 우리처럼 모든 고등학교를 거의 동렬에 놓고 내신을 매기는 제도가 없다. 이와 함께 집중적인 진학지도를 펼친다. 옥스퍼드에 있는 옥스퍼드 하이 걸스 스쿨은 남녀를 통틀어 전국 2위의 명문 사립여고로 꼽히는데 이 학교의 전직 교사 한 사람은 나에게 "여기는 시험선수를 양성하는 곳"이라고 토로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대입 시험과목 중심으로 교과과정이 짜여져 있다고 했다.

(물론 영국의 입시교육은 우리처럼 주입식이 아니다. 문제를 푸는 능력, 사물을 파헤쳐 보는 능력을 길러주는 게 가장 큰 교육 목표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중학교 1학년짜리 딸아이를 보더라도 자료를 찾고 이를 정리하고 자신의 이론을 세우도록 끝도 없이 논술 쓰기를 요구받는다)

특히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기숙사 학교를 겸하고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시킬 여건이 갖춰져 있는 셈이다.
반면 1백% 의무 교육 체제인 공립학교들은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게 돼 있다. 공립학교는 기본적으로 기숙사 학교가 아니기에 학생들을 스파르타 식으로 몰아세울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학교에서의 보충학습 재원도 모자라고 우수한 교사도 확보하기 어렵다. 어려운 여건 하에서 제대로 해보려 해도 우수한 학생들이 사립학교로 빠져나가 인적 자원도 딸린다.

일반 학부모들에게 가장 가슴아픈 부분은 사립학교의 엄청난 교육비용이다. 일반 서민은 엄두를 못 낸다. 알다시피 영국 사람들은 대체로 수입이 빤하다. 검은 돈이 대단히 적다. 겉수입은 연 3000만원인데 80평 아파트에 살고 아이들에게는 100만원짜리 과외 시키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

사립학교는 통상 학생 1인당 연간 교육비가 4700파운드에서 1만2000파운드까지 이른다. 한국 돈으로 900만원에서 2100만원꼴이다. 이는 집에서 학교를 다닐 때의 비용이다. 외국 학생이나 타지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때는 평균 비용이 곱절이상 뛰어오른다. 연간 1인 평균 1만5000 파운드(2700만원) 선이다.

예컨대 올해 사립학교 랭킹 20위안의 학교들을 살펴보면 윈체스터 고교는 기숙사에서 배우는 비용이 연간 1만6110파운드, 위컴 아베이 고교는 1만5000파운드, 럭비 경기가 발생한 학교인 럭비고교는 1만5400파운드, 이튼 스쿨은 1만5700파운드 등이다. 학생들의 용돈이다, 교통비까지 감안하면 한국돈 4000만원은 훌쩍 한해에 없어진다.

사립 출신의 강세 이유는 또한 옥스브리지 출신 교장, 대입 상담교사의 역할이 상당하다는게 일반의 인식이다. 앞서의 통계에서 사립학교 졸업생들은 출신고교의 교장, 대입 상담교사 중 옥스브리지 출신 비율을 묻는 질문에 77%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이들이 학맥과 인맥을 동원해 대학 측으로부터 온갖 정보를 빨리 정확히 입수한다는 게 사립학교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영국 대학은 각 칼리지 별로 학생을 선발하는데 옥스퍼드가 40여 개, 케임브리지도 그 이상의 칼리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각 칼리지 차원의 자세한 입시 정보가 대단히 중요하다. 역설적으로 공립학교는 정보의 질과 양에서 사립학교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옥스브리지는 영국의 오늘이 있게 한 인적 원동력으로서 일정부분 사회 전반의 지지와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옥스브리지는 학교 운영도 時俗(시속)에 따라 조변석개하지 하지 않을 만큼 학문의 전당으로서 고집도 있다. 그러나 학생 선발과 관련해 돈 있고 유명한 집 자식들이 많이 입학한다는 비판 여론에 직면했고 타의에 의해서나마 고치려 하는 단계다.

잘될까. 나는 판단을 못 내리겠다.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면 영국은 대단히 보수적인 나라다. 영국을 민주주의의 전당이라고 하지만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것은 2차 대전 후 45년 총선에서의 일이다.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다. 1920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에야, 한국이 47년 제헌국회 선거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기 불과 2년 전에야, 영국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한편으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 안정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역사적으로 영국은 크롬웰을 제외하고는 유혈 혁명이 없는 나라다. 피를 보기 전 말과 협상으로 고쳤다. 현명하다고도 할 수 있고 약다고도 할 수 있는 나라다.

마지막으로 한 토막 더. 집권당인 노동당 의원들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노동자와 중산층을 우선하는 정당으로서 의원들이 솔선수범을 보인다는, 또 다른 측면의 노블리스 오빌리지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한 여성 의원이 이를 깼다. 노스햄프턴 북구 출신의 샐리 키블 의원. 네 살 된 아들을 런던 시내의 연 6천 파운드가 드는 사립 학교에 보냈다. 키블 의원의 설명인 즉 집 근방의 교육청 관계자가 "아무래도 공립학교는 빈자리가 안 날 것 같다"고 대답해 어쩔 수 없이 보냈다는 것. 그러나 교육청 관계자는 "확정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고 답변하고 있다. 야당인 보수당의 예비 교육장관은 키블 의원을 이중 기준이라고 공박했다.

물론 보수당 의원들은 자녀를 어느 학교에 보내든 문제될 게 없다. 그래서 보수당의 공세를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찾는 행동'으로 평가받았다. 왜냐하면 영국 사람들은 뭣 묻은 강아지와 겨 묻은 강아지의 속담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정당은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단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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