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내게 '숙제'였던 책, <압록강은 흐른다>

등록 2001.02.14 11:35수정 2001.02.1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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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무수한 책들이 있지만 우리가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권고나 신문광고 그리고 그 책의 명성 그것도 아니면 서점에서 눈에 띄는 것을 집어듭니다. 저도 물론 예외가 아니어서 책을 선택할 때 이 기준을 크게 넘지 않습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동안 저에겐 숙제였습니다. 한국인에 의해서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판된 이 책이 그해에 독일어로 쓰여진 책중에서 가장 훌륭한 독일어로 쓰여졌다는 평은 저를 이 책의 포로로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안정효 님의 <하얀 전쟁>도 영어로 출판되어 훌륭한 영어라고 호평을 받았지만, '최상급'의 평을 받은 <압록강은 흐른다>만큼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련된 디자인, 읽기 편한 활자에 익숙해진 게으른 독자인 저로서는 어쩐지 구식이고 문고판인 이 책을 '게걸스럽게' 구하지 않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 책은 제게 언젠가는 꼭 읽어봐야 하지만 쉽게 손은 가지 않는 '숙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림 출판사에서 윤문영 님의 예쁜 삽화를 넣어서 읽기 좋게 출판을 했더군요. 그래서 이 책을 드디어 사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륵은 아직도 훌륭한 영어보다는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우선인 외국어 전공자인 제게는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것을 기대했던 저의 기대는 약간 '실망스러운' 감정에 빠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헤밍웨이의 트레이드마크인 간결체를 연상케 하는 첫 구절을 읽고서 말입니다.
'수암은 나와 함께 자랐던 내 사촌의 이름이다.'

이런 간결한 문체는 이 책 내내 계속되는데 언급했듯이 헤밍웨이의 간결체와 닮았지만 헤밍웨이의 그것과 다른 점은 헤밍웨이가 '냉정한 간결'이라면 이미륵은 시종일관 "따뜻한 간결"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구한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의 부모, 신식학교, 방학, 입학시험과 독일로 건너가기까지의 과정 등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낸 자서전적인 소설입니다.

구한말이라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큰 사건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담담하게 당시 우리나라를 흑백영화처럼 그려낸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 책은 쉽습니다. 그리고 따뜻합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그 시대를 잘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고 독일의 중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꼭 강하고 격한 것만이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로는 강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부드러우면서 할말은 다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역시 책은 원래 쓰여진 언어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독일어를 읽을 수 없는 저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저 자신의 한계입니다.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 말이 독서에도 어김없이 적용됨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독일어로 쓰여진 이 책을 한국어로 읽는다고 해서 이 책의 장점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주인공이 독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을 때 아마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길을 떠나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해 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부모들에게는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충고가 될 수 있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는 종종 낙심하는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네 일에 충실했었다. 나는 너를 크게 믿고 있다. 그러니 용기를 내거라. 너라면 국경을 쉽게 넘고, 결국 유럽에도 도착할 수 있을 게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 세월은 빨리 가느니라.
비록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서러워 말아라.
너는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자, 얘야! 이젠 네 길을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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