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정말 버리려 한 것은?

여자들에게 세상은 너무 천천히 변화한다

등록 2001.04.09 14:29수정 2001.04.0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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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버림을 받은 것은 네 살이나 다섯 살 때라고 한다.
식구가 많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입을 줄이느라 남의 집에 보내진 거라고 했다. 아들들은 대를 잇기 위해 집에 남겨지고 딸들은 모두 남의 집으로 보내졌단다. 양녀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키워서 식모를 삼으려는 집으로 팔려간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리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해 이리 저리 떠돌게 되었고, 그러면서 가족들도 모두 잃어 버리고 말았다.

스무살 무렵 읍내의 식당에서 일을 하던 그 여자를 좋게 보았던 식당주인의 중매로 그 여자가 우리 마을에 시집을 왔다. 자그마한 키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귀여운 여자였다. 신랑은 딸부잣집의 외아들이었다.

남편은 무뚝뚝한 성격이었지만 상냥한 성격의 그 여자는 그런 남편을 잘 다스렸다. 눈치가 빠르고 손도 야무진 그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리 넉넉치는 않은 형편이었지만 부부가 서로 아끼며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고 난 후 여자는 변했다. 일도 하지 않으려 했고, 남편과도 사이가 벌어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상냥했지만 남편에게는 차가웠다. 유독 의가 좋아 보이던 부부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권태기가 왔나보다 하며 지나쳐 보았다.

다음해에 여자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그 때부터는 여자가 조금씩 남자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년 후쯤에 여자는 셋째 아이를 낳았다. 여자는 기세가 등등해졌고, 남자는 여자가 어떤 말을 해도 대꾸가 없었다. 그때부터 여자는 겉돌기 시작했다. 농사일은 제쳐두고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동네에서는 여자의 행실을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남자는 말이 없었다. 여자가 어떻게 하고 다니든 신경을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몇 년 후 그 집은 우리 집 뒤쪽의 빈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가끔 지나치며 인사나 하던 여자와 말문을 트면서 나는 그 여자에게서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여자는 첫 아이로 딸을 낳았다. 첫 아이를 낳고 집에 누워있는데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딸을 낳고도 누워 있느냐며 심하게 때렸다는 것이다. 원래 술을 마시면 술주정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구타까지는 하지 않았단다.

딸 많은 집의 외아들이니 아들을 바라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둘째도 아니고 셋째도 아닌 첫 아이를 낳았는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렇게 맞고 나자 남편에게는 물론 아이에게도 애착이 안 생기더라고 했다.

둘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아이가 아들이자 남자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 했다. 여자는 둘째 아이를 낳고 처음에는 매를 맞지 않게 되어서 안심이 되더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내 그렇게 좋아하는 남편이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고 했다.

남편은 아들이 둘은 있어야 한다며 하나를 더 낳아야 한다고 했단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는 남편과 그만 살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고아처럼 혼자 살아온 여자는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 가족이었기에 쉽게 가정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고 했다. 두려움 속에 셋째 아이를 낳았는데 역시 아들이었다. 모든 것을 얻었다며 기뻐하는 남편을 보면서 여자는 자신이 씨받이나 다름없는 것 같아 서러웠다고 했다.

여자였기에 어린 나이에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서러운 세월들을 살았는데, 결혼을 하고도 그런 설움을 받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남편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싫더라고 했다. 어느 것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여자는 점점 가정을 돌보는 것에 소홀했지만 남편은 별 상관을 안한다고 했다. 이미 자신에게서 얻을 것을 다 얻었다는 생각을 하는 걸거라고 여자는 말했다.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 여자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 여자의 가슴 속에 가득한 응어리가 내게도 느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을 붙여보라고 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이 이미 너무 멀리 달아난 것 같아 그런 상투적인 말이 별 소용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가끔씩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여자는 가정에서 더 멀리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멀어지던 여자는 2년 전에 아예 이혼을 하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동네에서는 모두 여자의 행실을 탓했지만 나는 그 여자를 겉돌게 했던 것에 대해 생각을 했다. 여자가 집을 나간 후 남자는 같은 동네이지만 조금 떨어진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여자와 함께 살았던 기억들을 지우려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지난 토요일에 시골집에 내려갔는데 놀러 나간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그 여자가 살았던 빈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버려두고 간 물건들이 마당에 흩어져 있었는데 거의가 그 여자의 물건이었다. 급히 집을 나갔는지 여자는 많은 것을 흘리고 간 것 같았다. 말짱한 구두며 여러 가지 물건들이 방이며 마루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물건들을 보면서 여자가 정말 버리고 간 것이 무언인지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아마도 자신을 옥죄고 있는 여자라는 굴레를 벗어 버릴수 있었으면 했을 것이다. 어려서 자신이 버림받고 또 어른이 되어서 가정을 버리고 가야 했던 모든 일들이 똑같은 이유였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이유였고, 첫 아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신의 의지로 어쩌지 못하는 일들로 인해 당했던 고통들을 그 여자는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자들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부족할 만큼의 기쁨이다. 자신의 몸이 키워낸 생명을 안는 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아이를 낳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은 신성한 기쁨만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받는 상처는 평생을 두고 되새김질하게 된다. 사소한 말들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데,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했던 구타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 여자는 자신의 굴레를 벗어 버리려 아이들과 멀쩡한 물건들을 버리고 서둘러 떠났지만 평생 자신이 버리려 한 것들을 짊어지고 살게 될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여자들에게만은 너무나 천천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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