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봐야 잘 보이는 것도 있다

남편의 글씨로 쓰여진 편지 세 통은....

등록 2001.04.14 12:27수정 2001.04.1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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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싸다가 남편의 글씨로 쓰여진 오래된 편지 세 통을 발견했다. 나는 의아해 하며 편지를 들었다.

'밝음이에게...' 밝음이? 분명 남편의 글씨가 맞았지만 밝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에게 썼던 편지가 왜 여기있을까 궁금해 하면서 편지를 열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그 밝음이가 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남편은 나를 밝음이라고 하였다. 밝을 명(明) 구슬 옥(玉)이라는 내 이름을 밝음이라고 고쳐 불렀었다. 내가 항상 가라앉아 보인다며 밝게 살라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다고 했던 기억도 난다.

거기에는 신혼시절 야근을 하던 남편이 밤새워 쓴, 다정한 얘기들이 편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남편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소개하는 것을 들었는데, 나는 남편에게서 편지를 받았다는 그 사람들이 부러워 가슴이 저렸었다.

저렇게 소중한 편지를 품고 사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이겨낼거란 생각을 하며, 내 남편은 여태 나에게 한 번도 편지를 보낸 적이 없었다고 원망 했었다.

내가 보냈던 몇 통의 편지는 생생히 기억하면서, 어떻게 남편의 편지는 까맣게 잊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코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결혼생활이 그런 소중한 것들을 잊게 한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환상에 젖어서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하고 만나게 되는 현실은 장미빛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다. 나도 그런 세월을 경험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인줄 알았던 사람에게서 특별함이 사라지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특별하게 보이는 날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보면 부럽고 왜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불만을 품기도 했다.

결혼이나 현실은 그런 것 같다. 언제나 멀리 있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매혹되고 부러워 하게 된다.

일곱 살 즈음인가? 방 구들을 새로 까느라 방안에 있던 짐들을 모두 마루에 내어 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껏 한번도 방밖을 나와보지 못했던 커다란 거울도 마루 구석에 나와 있었다. 나는 그 거울 앞을 지나다가 가슴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

거울 속에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 하나가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 거울앞으로 홀린 듯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것은 우리 마을 옆쪽에 있는 산이었다. 그 산은 내가 항상 올라가 놀곤 했던 산이었다. 하지만 그 거울에 비친 산은 내게 너무 낯설고 신비로운 산이었다. 산위로 포근히 쏟아지는 햇살, 비밀을 간직한 듯한 그늘을 살포시 늘어뜨리고 있는 그 산은,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먼 나라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거울을 통하지 않고 그 산을 바라보았다. 거울에서 빠져나온 산은 내가 항상 보아오던 그 산이었다. 평범하고 밋밋한 듯한 산 능선위로 게으른 햇살이 머물고 있었다. 그늘은 있었지만 신비로운 느낌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나는 거울을 보고 또 보았다. 거기 자리잡은 아름다운 산이 내가 알고 있는 산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나를 홀리게 만든 산이 그 산이라는 것이 슬펐다.
그 산은 우리에게 놀이터나 다름없었고, 구석구석 신비로울 것도 없는 산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산은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거울속의 산은 내게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그 거울속의 산을 오래도록 그리워 했었다.

남편의 편지를 손에 들고 나는 그 산을 떠올렸다. 애틋한 감정들이 담긴 남편의 편지를 읽으면서 항상 평범하기만 하다고 여긴 남편이 특별하게 생각되었다. 그 편지는 산을 비추던 거울처럼 남편에 대한 나의 느낌을 바꾸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자주 파랑새를 찾는 아이들처럼 가까운 곳의 소중한 것들을 쉽게 놓쳐 버리고, 먼 곳이나 내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동경하곤 한다.

내게도 평생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내게 할 소중한 편지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남들이 받은 편지만 부러워 하였던 것이다.

가끔 너무 다가서서 잊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아름다운 풍경들도 그 속에 들어서면 일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가끔씩 멀리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사람을 대하는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가까이에서 사소한 것들로 감정들을 소비하다보면 그 사람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매력 같은 것은 모두 잊혀 버린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부부 사이에 바다를 두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멀리서 지켜볼 줄 아는 것이 더 오래 사랑하는 거라는 말이 아닐까?

나도 멀찍이서 상대를 지켜보는 눈을 가져야 겠다. 내 마음의 눈이 평범한 산을 신비롭게 비추던 거울을 닮을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가끔 이삿짐을 싸듯 내 마음의 창고를 뒤져 봐야겠다. 어쩌면 소중한 것들이 그 기억의 창고에서 잊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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