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기증할 수 있을까?

죽어서도 혹은 죽어서만이라도...

등록 2001.04.23 19:02수정 2001.04.2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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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내가 거기 도장을 왜 찍어요."
"내가 한다는데 왜 못 찍어준다는 거냐?"
언니와 함께 청량리 역 앞의 한 순대국집에 들렀을 때였다.
할아버지 한 분과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다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주인 아주머니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필시 어딘가에 보증을 서 주시려는 걸 거라는 짐작을 했다.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는데도 계속해서 찍어달라, 안된다 하며 실갱이를 벌였다.

"네가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한다는데 그냥 도장만 찍어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난리냐."
"싫어요. 나는 아버지가 하는 것도 싫어요."
장사를 하시려는 건가? 언니와 나는 호기심에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두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까짓 거 줘버리면 땅도 필요없고, 그냥 너희가 찾고 싶으면 찾고 말고 싶으면 말아도 되는 거야. 돈들어갈 걱정도 없어지는 건데 왜 안된다고 하는 거야?"
"땅 사는데 돈이 아무리 들어도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그런 걱정은 마세요."

단순한 보증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뭔가 일을 벌이기는 벌인 것 같았다. '그 연세에 일을 벌여 놓으시면 어떻게 하시려고...' 내 일도 아닌데 살풋 걱정이 들었다.

"쓸데없이 땅 차지하고 있으면 뭐하냐. 그냥 태워서 가루로 뿌리면 될 것을..."
"태워서 뿌리든 그냥 묻든 남들이 다 찢어발기게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에요."
도무지 이야기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몸이 너무 많이 아파서 죽은 몸이라도 열어보고 다른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서 그래."
나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 졌고, 얼굴이 확 달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기증하려고 하신 거였다.

시신이나 장기를 기증하는 데는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얼핏 보았던 것 같다. 내가 잠시나마 할아버지를 '철없이 그 연세에 일이나 벌이신다고' 오해한 것이 부끄러웠다. 할아버지께서 벌이신 일은 내가 차마 생각하지도 못한 숭고한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에 딸은 마지못해 도장을 꺼냈다. 하지만 도장을 찍으면서도 돌아가신 후에 병원에서 물으면 절대로 동의해 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혹시 딸이 정말 그럴까봐 걱정이 되시는지 그런 딸을 붙들고 설득을 하셨다. 딸은 속이 상한지 안 들으려고 했다.

나는 식당을 나오며 나를 할아버지의 자리에 세워 보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물어 보았다. '나는 나를 기증할 수 있을까?'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를 할아버지의 자리에 세우고 나를 그 딸의 자리에 세워 보았다. 나의 아버지께서 몸을 기증하신다면? 거기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딸이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는 생각을 하였었는데 나를 그 자리에 세우자 나도 그 딸과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내 몸을 기증한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몸이 찢긴다는 두려움이 가장 큰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하였다. 몸이 찢긴다는 두려움은 산자로서의 느낌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이 죽음이고 죽게 될까봐 다치고 찢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죽은 몸이 다시 죽을까봐 두려워 찢기는 것을 겁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빈 몸뚱이인데 썩히고 마는 것보다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게 된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렀을 때, 나는 다시 나를 할아버지의 자리에 세우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나를 기증할 수 있을까?' 갈등이 생겼지만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잠시 갈등을 하였다는 것 때문에 조금이나마 덜 부끄러울 수 있었다.

드라마 허준을 보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스승인 유의태가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열게 했던 부분이었다. 그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세상의 많은 병들을 정복하게 된 것은 유의태같은 훌륭한 분들이 실제로 많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신체 발부는 수지 부모' 라 하여 머리도 자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의 몸을 연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질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식은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을 기증한다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 병원이나 약국에 가면 '장기 기증'에 대한 전단을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애써 그 전단들을 보지 않으려는 편이었다. 그런데 애써 모른척해도 신경이 쓰이곤 해서 나오기 전쯤엔 나도 모르게 한번씩 꼼꼼히 읽고 만다.

운동선수나 유명인사들이 기증 약속을 하였다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졌다. 그 사람은 남다른 의식을 가진 사람같고 나와는 딴 세상의 사람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한번씩 더 보게 되고 그 사람의 말속에는 뭔가 심오한 것이 들어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한 결단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다. 자신이 없으면 세상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자신을 기증한다는 것이 쉬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중한 자신이 정말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죽어서도 훌륭한, 아니면 죽어서만이라도 훌륭한 인간으로 남고 싶은 사람들은 보이는 두 평의 땅을 차지하는 것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끝없이 넓은 사랑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도 갈등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때까지 내게 물어봐야겠다.
'나는 나를 기증할 수 있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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