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딸린 직장여성의 고난

등록 2001.12.27 16:23수정 2001.12.27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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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무렵, 친하게 지내는 현희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제 34개월된 현희를 두어시간 쯤 보아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현희를 데려다 주거나 뭣하면 지희(우리 딸)를 데리고 그곳에 와서 보아주어도 좋다길래 고민할 것도 없이 그러마고 했습니다.

현희 엄마가 취직을 했습니다. 결혼하기전 경력을 쌓았던 출판사 일이었고 요즘같이 취업하기 어려운때에 하고파하던 일을 하게 된걸 더없이 기뻐했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일거리를 가져와 집에서 했는데 결혼하고 손을 놓고 있던 인터넷이 익숙하지가 않아 무척 힘들어 하기도 했습니다.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던 회사가 이제 제 자리를 찾아 내일부터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기 때문에 오늘까지 꼭 전해야 할 것이 있는데 당장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얼마간은 놀이방에 아이를 맡기고 일을 했는데 오늘은 놀이방도 현장학습 날이어서 맡길 형편이 아니었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다 마지막에 제게 전화를 건 모양입니다. 우리집은 남편이 주·야간 교대로 근무를 하는지라 낮에 자는 날도 많고 또 23개월된 지희도 있고하니 이래저래 꺼려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점심을 먹고 아침에 퇴근해 온 남편이 잠이들자 지희 옷가지를 대충 챙겨 가방에 담아들고 현희네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놔두고 엄마만 나갈 준비를 마친 것이 못내 불안했는지 현희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습니다. 걱정일랑 하지말고 어서 다녀오라고 등을 밀어 현희엄마를 보내고 나니 현희는 왕왕 울어대기 시작하고 채 10분이 못되어 먹은 것을 죄다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엄마가 없는 것이 현희는 참을 수 없이 서러운 모양입니다.

지희는 이방 저방 다니며 차를 타네 말을 타네 노느라 정신이 없는터라 저는 울고 있는 현희를 가슴에 앉아 달래놓고 덤불처럼 엉겨붙은 파마머리를 물과 젤을 발라 빗겨주고 우느라 발갛게 터버린 볼에 로션도 발라주었습니다. 그렇지만 현희는 아무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지 거의 울다 흐느끼다를 반복했고 그러기를 거의 두시간이 되어 갈때쯤 현희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냉큼 뛰어가 수화기를 든 현희는 '엄마 엄마'를 부르며 통곡을 해댑니다.

"어쩌죠? 현희가 거의 두시간을 울며 보내네요. 현희엄마 나가고 10분쯤에 먹은 것도 다 토했어요."
"어머 지희엄마 힘들어서 어떻게 해요?"
"제가 뭐 힘들어요. 현희가 안됐죠."
"지금 놀이방 다시 알아보고 가려했는데 안되겠네요."
"아니예요. 들렀다 오세요. 이제 좀 괜찮아지는 모양인데요."
"예 그럼 부탁좀 할게요."

전화를 끊고나니 현희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는지 헤헤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요구르트도 먹습니다. 또 한바탕 시원한 응가도 하고 블럭을 쏟아놓고 집짓기도 합니다.

다시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누군가 쿵쾅거리며 계단을 뛰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설마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을 쾅쾅 두드려서 나가보니 현희엄마입니다. 쓰러지듯 숨을 몰아쉬며 현관에 털썩 주저앉더니 달려나온 현희를 꼭 안아줍니다.

"지희엄마 너무 힘들 것 같아서...헉헉...그냥 왔어요...헉헉."
"아이구 숨이나 좀 돌리세요."
"큰 일이네요... 헉헉... 내일부터는 정식출근해야 하는데... 아침에 아홉시 반까지 출근하고 저녁에 아홉시까지 하래요."
"어머 근무시간이 너무 기네요."
"그러게 말이예요, 하지만 신생 벤처 회사다 보니까 어쩔 수 없나봐요. 거기서 숙식하는 사람도 꽤 있는걸요."

현희엄마는 저보다는 토하고 울고 있을 딸생각에 한달음에 달려왔을 것입니다.

현희엄마는 한 숨 돌리자 마자 일어나 옷갈아 입는 것도 잊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회사근처에 놀이방을(저녁 9시까지 가능한) 알아보는데 다들 7시까지 밖에 안된답니다. 수심에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던 현희엄마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곳은 친정엄마입니다.

"엄마 내일 여기 좀 와줘요. 한달만 현희 좀 봐줘. 아홉시까지 일하라는데 맡길데가 있어야지. 애 엄마라고 나만 일찍 퇴근 할 수도 없고... 엄마가 한달만 봐줘... 제발... 징역은 무슨 징역이라고 그래요, 밖에도 나가고 그러면 돼지, 아버지 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엄마 몸 아픈 것도 아는데 내가 오죽하면 엄마한테 이러겠어요... 엄마 제발 좀 봐줘요."

그러기를 십분여,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고 현희 할머니께서는 그러마고 하셨고 그제서야 전화를 끊는 현희엄마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당장 내일은 누구에게 현희를 맡길지 또 고민입니다.

아이 딸린 여자가 일을 하기에 세상은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대뜸 "그렇게까지 해서 일을 해야겠냐"고 핀잔인데다 "그래봐야 얼마나 벌겠냐"고 면박입니다. 현희엄마가 현희를 데리고 회사근처 놀이방에 맡기고 출근을 하려고 지하철을 타면 "이 복잡한 아침에 뭐 먹겠다고 애까지 데리고 전철을 타느냐"고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처음에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잘해보라고 격려해주던 현희아빠도 이제는 차라리 그만두라고 한답니다. 사실 애 딸린 여자가 일을 하려면 남편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가사를 분담한다던가 최소한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데려오는 정도의 일이라도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희엄마는 남편에게 그걸 기대조차 안 합니다. 남편이 새벽에(6시 40분) 출근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일을 잘해낼지 참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잘 참아내길 바랍니다. 그녀 자신과 그녀의 딸 현희의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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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초창기에 시민 기자 활동을 하며 사는 이야기에 글을 썼습니다. 후원회원이 되려고 18년만에 다시 로그인을 했습니다. 지금은 독서논술 지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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