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이 국회의원들에게 주는 새해 선물

[현대사와의 대화] '마지막 신년사' 다시 읽기

등록 2001.12.31 23:24수정 2002.01.0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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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가장 지탄받는 '공공의 적'은 누구일까?"

영화 <공공의 적> 제작진이 개봉을 앞두고 네티즌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질문내용이다. 놀랍게도 1등을 차지한 것은 국회의원이었다. 경제인(재벌), 원조교제범, 교육당국자, 언론사주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정작 더욱 큰 문제는 이런 결과에 대다수 사람들이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결과를 알려준 뒤 그 반응을 살피자 많은 사람들이 '뭘 그런 당연한(?) 결과를 가지고 새삼스럽게…'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 국가와 사회의 문제를 풀고 대안을 찾는 데 있어 현실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고, 담당해야 하는 것이 국회의원으로 상징되는 정치인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관심과 냉소가 결코 한국 정치의 개혁과 발전의 방책일 수 없는 이유가, 이러한 '상식 아닌 상식'을 안이하게 수용할 수 없는 절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기자는 (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실무자로부터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신년사'를 건네 받았다. 그것은 월간지 <민성(民聲)> 1949년 1월호에 '연두감언(年頭感言)'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백범의 육필 원고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오전 그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이승만 정권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격을 받고 암살 당했다. 따라서 '연두감언'은 백범이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했던 조국에 바친 '마지막 신년사'인 셈이다.

백범은 이 글의 서두에서 우선 정치지도자로서의 부끄러움을 토로했거니와,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동포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그리고 또 서로 찔러 죽여도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통일론자라 하면서 점점 굳어가는 국토의 분열을 막지 못하였고 마땅히 할말을 하지 못하였다. 또 독립운동자라 하면서 독립을 위한 진일보의 표현도 하지 못하였다"고 통렬하게 고백한 것이다.

2002년 새해를 맞는 만백성이 한국 정치에 절망하게 되는 것은 정치인들이 도통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른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공공의 적 1호'로 지목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 정치인들이 진정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을 회복할 때 한국 정치의 '새로운 탄생'은 가능하지 않을까.

백범은 이어 "묵은 해가 몇 번 가고 새해가 몇 번 와도 우리 삼천만의 절대 다수의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독립뿐"이라고 선언한 뒤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을 분명하게 밝혔다. "쏘련식 민주주의"도 "미국식 민주주의"도 아닌,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친선을 촉진하면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과 "반쪽만의 조국이 아닌 통일된 조국"이 그가 원하는 조국의 모습이었다.

2002년 새해를 맞는 만백성이 한국 정치에 절망하게 되는 것은 53년 전 백범이 선언한 민족의 염원이 해결되기는커녕 도리어 뜨거운 현안으로 남아 있는 한심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자주, 민주, 통일은 여전히 "쏘련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칠천만 한겨레의 사무친 미제(未濟)의 염원이 아닌가.

3.8선에 선 백범(1948년 4월19일) 출처 : 대한매일신보사 <백범 김구전집>
백범은 또한 "강한 무기가 없는 것"을 "걱정"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뜻"을 분명히 세우고 "우리의 노력"을 꾸준히 기울이면서 "정의를 위하여 투쟁을 전개"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러면서도 "우리의 희망이 아무리 크고 우리의 성공이 아무리 확실하고 우리의 분투 노력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단결이 없으면 만사는 환멸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2002년 새해를 맞는 만백성은 그리하여 결단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삼팔선을 베고서 죽겠다"는 정치인과 "지역감정과 싸우다 죽겠다"는 '통일과 통합의 정치인'이 나올 때 한국 정치의 '새로운 출발'은 가능할 것이라고. 백범이 <자유신문> 1949년 3월 19일자에 기고한 '나의 애독서'라는 글에서 <링컨전>을 청년들의 필독서로 권유한 것은 따라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백범 김구는 현실에선 어디까지나 '실패한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인물' 아니 '공공의 적 1호'로까지 취급받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로부터는 정작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존경받는 정치인'이 '성공한 정치인'도 되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최대 과제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 땅의 정치인들이, 평소에는 그 정치인을 욕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무책임하게 투표하는 '바보 백성들'이 백범의 '마지막 신년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연두감언.
다음은 '연두감언'의 전문이다.(당시 표현을 그대로 썼음을 밝혀둔다.)

우리는 이제 또 새해를 맞게 된다. 좋든 언짠튼 느낌이야 없으랴. 그러나 과거 일년을 살어온 나의 자취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뿐이다.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동포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그리고 또 서로 찔러 죽여도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통일론자라 하면서 점점 굳어가는 국토의 분열을 막지 못하였고 마땅히 할말을 하지도 못하였다. 또 독립운동자라 하면서 독립을 위한 진일보의 표현도 하지 못하였다.

나는 마땅히 과거 일 년 동안의 자기를 비판하면서 자기 반성을 구하여써 새해의 실행할 새 계획을 작정하여야 할 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또는 어느 틈에 입을 열어서 남하고 이야기를 하랴, 더구나 뽐낼 줄도 모르고 거짓말할 줄도 모르는 나로서 부즈련히 빈입을 열어서 말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새해를 맞을 때마다 소위 '연두감언' 한 편을 쓰지 아니 하지 못할 환경에 처해 있다. 작년에 쓴 것을 그대로 내놓을 수도 없으며, 해마다 나에게는 이 일이 한 고통꺼리가 되는 것이다. 금년에도 이러한 환경에서 이 붓을 들었다. 독자 여러분도 이 고충을 량찰하여 주시기 바란다.

묵은 해가 몇 번 가고 새해가 몇 번 와도 우리 삼천만의 절대다수의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독립뿐이다.

과거 일년을 돌아보아 서글픔이 있다면 이 연원이 성취되지 못한 것뿐이오, 오는 일년에 새희망을 붙인다면 이 염원의 달성뿐이다.

쏘련식 민주주의가 아모리 좋다 하여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쏘련이 아모리 우리의 우방이요 쏘련인과 친구 되기를 아모리 원할지라도 쏘련과 쏘련사람을 우리나라나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위하기는 싫다. 이것은 '유-고스라비아' 민족의 용감한 행동으로써 표현된 것이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모리 좋다 하여도 독점자본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무산자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상품시장화 하는 데는 앗질이다.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가 우리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마음대로 살어갈 수 있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가지기만 원하는 것이다. 더구나 반쪽의 조국만이 아니라 통일된 조국을 원하는 것이다.

혹자는 우리에게 강한 무기가 없는 것을 걱정하고 낙심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강한 무기를 가지고 독립을 성공한 나라는 적다. 지금에도 중국 같은 나라는 자기가 본래부터 강한 무기를 가졌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정예한 무기를 다량으로 얻어오면서도 공산군을 진압하지 못하고 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그 자신이 위경에 빠지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의 뜻만 굳고 우리의 노력만 꾸준하면 반드시 성공할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의를 위하여 여론을 환기하며 정의를 위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데는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이오 위무(威武)도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나가는 길은 탄탄대로이며 우리의 앞에는 성공이 있을 뿐이니 다같이 기뿐 맘으로 새해를 맞자.

우리의 자주 민주 통일독립은 오고야 말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삼천만이 다 이것을 위하여 분투 노력하는 까닭이며 또 이것이 인류의 정당한 요구인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이 아모리 크고 우리의 성공이 아모리 확실하고 우리의 분투 노력이 아모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단결이 없으면 만사는 환멸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어느 때나 단결이 필요한 것이니 오는 새해에는 과거에 성공하지 못한 단결을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새해는 '단결년'으로 맞이하자.

단결을 성공하는 데는 필요한 요소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 요소를 잡지 못하고 단결 하자고만 웨치면 과거와 같이 단결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나는 내가 생각하는 제일 중요한 단결의 요소를 두 가지만 제시하고 이 글의 끝을 맺겠다.

1. 단결의 원측을 세워야 한다. 원측이 없는 단결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백성의 생활을 위협하고 백성을 무리하게 압박하는 탐관오리가 그 백성을 보고서 단결만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하면 그 백성이 그것을 믿고서 따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보고 믿을 수 있는 단결의 원측과 아울러 그것을 행동으로써 실천할 성의까지 보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국의 통일을 성공하랴 하면 통일을 성공할 수 있는 원측을 세우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데서만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것이다.

2. 민심의 안정을 도모해야 된다. 정치가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사회가 문란하면 그럴쑤록 대중은 배고프고 괴롭고 무서운 중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배부른 사람과 배고픈 사람, 괴로운 사람과 무섭게 하게 사람은 한데 뭉칠 수 없는 것이니 전 국민이 한 덩이가 되려면 먼저 일반의 민심을 안정케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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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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