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 '깃발'로 부활하는 박종철

[현장]"껍데기는 가라" 박종철열사 15주기 이모저모

등록 2002.01.14 10:06수정 2002.01.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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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저녁 서울대 문화관에서 열린 15주기 추모제 행사 도중 박종철 열사의 영정이 입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13일 저녁 서울대 문화관에선 박종철 열사 15주기를 기념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박종철 열사 15주기 추모사업단이 마련한 이날 행사의 테마는 '열사 정신 계승'과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15년이 흐른 지금 진보정당의 '깃발'로 되살아난 것이다.

두 쪽으로 갈라진 추모행사

▲ 박 열사의 묘에 참배하는 유가협 어머니들(왼쪽)과 후배들의 헌화 행렬. ⓒ 오마이뉴스 김시연

하지만 매년 박종철 열사 추모 행사를 주도해온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회장 김승훈 신부, 이하 기념사업회)는 정작 이번 추모제 행사 주체에서는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매년 기념사업회와 학생회가 함께 해왔던 박종철 열사 묘역 참배 행사와 14일 서울대 열사기념비 앞 추도식 역시 따로 갖기로 했다.

이날 낮 1시경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 학생들에 앞서 참배를 마친 김찬훈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인원수가 많아 우선 기념사업회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참배를 했을 뿐"이라면서 얼버무렸다.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 사회당 서울대학생위원회 등과 15주기 추모사업단을 꾸린 이훈 관악사회인연대(옛 서울대 민주동문회) 대표 역시 "각 단위의 일정에 맞춰 독자적으로 진행한 것일 뿐 기념사업회 측과 어떤 이념적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변절자'와는 함께 할 수 없다"

아버지의 손 박정기 씨가 아들의 약력이 적힌 참배 식순지를 손에 꼭 쥐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하지만 올해 기념사업회와 서울대 학생회 측이 추모행사를 별도로 갖게 된 배경에는 매년 기념사업회측 추모 행사의 사회를 도맡아온 박종운(한나라당 부천오정지구당 위원장) 씨가 있다. 박종철 열사의 학교 선배이자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인 그는 2년 전 기성 정치권에 투신하면서 학내외 진보운동단체들로부터 박종철 열사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더구나 '근본주의자'로 알려진 박종철 열사 정신을 진보정당 활성화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킬 목적으로 예년에 없던 추모제와 기념강연회까지 준비한 추모사업단의 취지와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관악사회인연대 장영진(서울대 94학번) 씨는 "박종운 씨가 기성 정당에 입당한 것은 이미 박종철 열사와 같은 이상을 포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면서 "개인적인 참석이라면 몰라도 그런 사람이 주도하는 추모행사를 함께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날 참배의식 사회를 맡은 구정모 서울대 총학생회장 역시 "운동경력을 한때 추억거리나 술안주처럼 얘기하며 기성 정치권에 투신하는 사람들 역시 우리가 투쟁해야할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날 양측의 행사에 모두 참석한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73, 유가협 회장) 씨는 "따로 하니까 추모객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등 불편이 있다"면서 "다음부터는 행사를 함께 갖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내면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날 참배 행사와 추모제는 큰 불협화음 없이 진행됐다. 박정기 씨 등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이 작은 구심점이 됐고 박종철 열사의 선후배들로 구성된 기념사업회 소속 회원들 역시 학생들의 참배 행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지켜보는 등 자연스럽게 어울렸기 때문이다.

"열사의 꿈을 우리가 실현하겠다"

'그대 온몸 깃발되어'라는 추모제 주제에는 15년이 지난 지금 박종철 열사 정신을 진보세력 정치화로 승화시키려는 진보운동세력의 희망이 담겨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풍요롭지도 않으면서 풍요의 이미지는 범람하며
자유롭지도 않으면서 자유의 구호는 예사로 터져 나오고,
오직 뒤틀려버린 자본의 욕망만이 꿈틀대는 지금 이곳에서,
열사라는 말이 발붙일 땅은 어디인가

그러나 가만 귀기울이면 들려오는 가쁜 숨결
지난밤의 싸움을 마치고 수척한 얼굴로 스쳤던 벗들의
모습이 사무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그래,
인간의 자존과 위엄을 되찾는 길에서
살아있는 박종철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종철 열사 15주기 추모시 <2002, 종철이 형을 기억함>(윤성환, 서울대 철학과 93학번) 중에서


이날 저녁 6시 박종철 열사 15주기 추모제가 열린 서울대 문화관 중강당은 서울대 재학생, 졸업생을 비롯한 진보정당, 계약직 노조 대표, 민주화운동 관계자 등 200여 명의 참석자들로 가득 찼다.

▲ 추모제에선 박종철 열사의 15년 후배인 백혜연 양이 살풀이춤으로 고인을 기렸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박종철 열사의 영정 입장에 이은 백혜연(서울대 무용학과 99학번) 양의 살풀이로 시작된 추모제는 재학생과 졸업생의 추모발언과 추모시 낭독, 노래패 공연, 그리고 박종철 군의 아버지인 박정기 씨의 발언 등으로 이어졌다.

재학생을 대표한 장기정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은 "박종철 열사를 과거의 역사 속으로 묻으려는 것을 반대한다"면서 "그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우리의 삶으로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신념과 꿈을 오늘의 현실로 만들어가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원용수 사회당 대표는 "열사의 죽음은 특정한 사람이나 기구, 시간, 체제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자체가 주는 고통 때문이었다"면서 "노동자 민중의 고통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박정기 씨는 "15년 전의 한 죽음을 이렇게 추모하는 건 개인적으로 감격스럽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뜻을 나누어 갖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며 후배들의 실천과 투쟁을 강조했다.

열사 아버지가 선택한 길

▲ 아들 못지 않은 운동가로 변신한 박정기 씨 ⓒ 오마이뉴스 김시연
"87년 상황이 단순히 갈망으로 그친 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15년 전 기층 민중의 함성을 2002년의 전망에다 접목시킬 필요가 있지. 그런 희망도 없이 어떻게 살겠어."

이른 아침부터 계속된 일정에 지친 듯 '열사의 아버지'는 2시간여에 걸친 추모제가 끝나자마자 72-1번 시내버스에 노구를 싣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돋보기 너머로 아들의 추모자료집을 찬찬히 읽어나가는 박정기 씨. 막내아들을 앗아간 15년 세월은 어느새 그를 아들 못지 않은 실천적 운동가로 만들어 놓았다.

"못다 푼 포부가 많았던 친구였는데. 어떡하겠어. 아버지라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자식의 길을 따라야지..."

덧붙이는 글 | 박종철 열사가 걸어온 길

65년 4월1일 부산에서 출생한 박종철 열사는 재수 끝에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학생운동 과정에서 86년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가했다 구속돼 86년 7월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하지만 87년 1월1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 요원에 의해 연행된 그는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 씨의 거처를 대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가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다음날인 1월14일 숨졌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2세. 그해 3월 서울대에서 열린 박 열사의 49제는 6월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지난해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선정됐다. 

14일 서울대 열사기념비 앞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15주기를 기리는 추도식이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각각 열릴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박종철 열사가 걸어온 길

65년 4월1일 부산에서 출생한 박종철 열사는 재수 끝에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학생운동 과정에서 86년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가했다 구속돼 86년 7월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하지만 87년 1월1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 요원에 의해 연행된 그는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 씨의 거처를 대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가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다음날인 1월14일 숨졌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2세. 그해 3월 서울대에서 열린 박 열사의 49제는 6월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지난해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선정됐다. 

14일 서울대 열사기념비 앞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15주기를 기리는 추도식이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각각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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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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