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주필의 '국제경쟁력'을 검증한다

목적 정하고 사실을 왜곡 대입시키는 버릇 못고쳐

등록 2002.01.15 15:14수정 2002.01.20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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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2002년 1월12일자 칼럼에 대해 지적할 게 있다. '평준화가 나라 망친다'는 그의 글에서 김 주필은 '평준화'에 반대하며 경쟁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드러냈다. 글을 읽어 보니 불성실한 글쓰기의 문제가 두드러져서 먼저 지적하고, '경쟁' 교육에 대한 내 생각도 덧붙일 생각이다

"영국에는 식스 폼스 칼리지(six-forms college)라고 불리는 4000개의 입시학원이 있다. 고교1학년쯤 되면 이 학원에 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여기를 가야 영국의 명문대학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주필은 이 칼럼에서 경쟁의 장점과 선례를 강조하기 위해 해외의
사례를 들면서 위에 나오는 영국의 '현실'을 인용했다. 그렇지만 이 짧게 인용한 영국 관련 부분에서 그는 치명적인 잘못과 불성실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먼저 용어부터 지적해야겠다. six forms라는 용어는 없다. 정확하게는 sixth form이 맞다. 그런데 이 용어를 알게 되어 인용하는 김 주필의 정신을 분석해 보자면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으니 이 또한 어찌 지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설사 six forms라는 말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six-forms college라는 말은 영어 어법상 존재할 수가 없다.

six-form college라면 모를까. 어찌 되었든 그 자체가 원인무효이니, 그렇게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본 영어조차도 틀린 것이다. 그 다음은 과연 김 주필이 이 용어를 차용하기 위해서 관련 정보 조사를 어떻게 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그는 영국의 학교에 고등학교 수준의 아이를 보냈거나 또는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지인에게서 중요한 이 '첩보'를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것은 six forms라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소리로'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게 실제로도 사실이라면 당연히 그는 영어의 청취에서도 실패한 것이다.

▲ 1월 12일자 조선일보 김대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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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정확한 영국 교육의 현실은 무엇인지 이야기할 차례이다. sixth form은 영국의 중등교육 제도에서 맨 위 단계의 마지막 두 학년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보통 16살에서 18살 사이의 학생들에게 해당한다. 그 이전에는 보통 11학년 즈음에 GCSE (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 라는 과목별 종합시험을 보고 이 점수로 sixth form으로 올라간다.

또 한 가지 중대한 오류로 지적하자면, sixth form college는 '학원'이 아니다. 물론 김 주필이 이 단어를 한국에서 쓰이는 '학원'이라는 개념으로 썼으므로 그건 더욱 더 아니다. sixth form college는 영국의 정규 학교이며 정규 학교 제도의 한 단계일 뿐이다. 각 학교는 GCSE만 준비하는 단계도 있고 대학에 가기 위한 시험인 A level (Advanced level)을 준비하는 sixth form 과정을 제공하는 학교도 있는 것이다.

물론 없는 학교라면 학생은 sixth form college를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물론 각 sixth form college가 매년 성취하는 A level 결과의 평균 순위도 매년 일간지에 실린다.

영국인들이 sixth form college를 한국의 '학원' 개념으로 소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미있어 할 것이다. 물론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정규 교육 과정이어도 '학원'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사람은 그러한 철학적 배경과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식스 폼스 칼리지(six-forms college)라고 불리는 4000개의 입시학원' 식의 인용과 단정적인 전달은 한 마디로 무식의 발로일 뿐이다.

게다가 한국의 공교육과 영국의 교육 제도에서는 경쟁의 상징인 시험
제도를 포함하더라도 중대한 차이가 있다. 영국의 학교에서는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인성교육이 중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streaming이라고 해서 같은 연령대의 학생들이라도 각 개인에게 맞는 수준별 학습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특히 시험에 있어서도 학생은 자신이 가고 싶은 sixth form college에서 요구하는 GCSE를 얻을 수도 있고, 그 이후에는 자신이 진학하길 원하는 대학에서 요구하는 과목에 대한 A level를 얻을 수도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대학 진학시 요구하는 A level은 3 - 5 가지 과목만을 학생이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영국의 sixth form이 한국의 학원을 비롯한 입시와 같은 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관계부터 전혀 다른 것이다.

예를들어 컴퓨터공학과를 가고 싶은 학생은 수학, 물리학, IT 등을 고르면 되는 것이다. 즉 학생이 입시 과목을 서너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아주 큰 차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학과목의 부담이 적고, sixth-former가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전공에 관련된 원하는 서너 가지 과목만을 선택적으로 집중 학습하면 되기 때문에 창의력 발달에 중요한 학생 시절에 책을 읽는 습관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의 학생들은 아직도 십수 가지에 달하는 과목을 공부하며 시간에 쫓기는 고등학교 생활을 하느라 정신적으로 거의 무교양 상태에서 대학에 입학하지만, 영국 학생들의 독서량은 매우 큰차이를 보인다.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던 필자가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 1학년 여학생이 보여준 문학에 대한 넓은 지식에 (실제로 책의 내용을 다 알고 있으니 모두 읽은 것이다) 놀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 주필이 주장하는 경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경쟁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경쟁으로 변질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많은 과목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즉 진정한 경쟁력이기보다는 단지 한 집단 내부의 서열을 정하기 위한 경쟁 과정으로 바뀌는 게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내부 서열 정하기용 경쟁 입시는 결국 예상되는 문제를 낳고 있다. 2001년 12월4일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국제학생평가계획(PISA: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에 따르면, 경쟁형 입시 자체에 매몰된 한국의 학생들은 매우 의미있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한국 학생의 독해력이 가장 높은 Level 5에 도달한 비율은 겨우 5.7%에 불과해 바닥을 기었다. 이에 반해 뉴질랜드는19%, 핀란드와 호주는 18%, 영국은 16%로 큰 차이를 보였다.

PISA에서 드러난 여러 통계 중에서 이 수치는 특히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평준화의 문제점도 같이 드러내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의 학생들이 강제 학습을 강요하는 입시와 많은 학과목에 쫓겨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하는 독해력에서 커다란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지만, 과연 이 독해력이 김 주필의 말대로 '학원' 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수정될 단기적인 문제일까? 영국의 학생들은 가장 중요한 대학 입시 과목 시험인 A level을 단지 세 과목만 선택해서 열심히 공부한다. 그러면서 책도 부지런히 읽고 인문 교양도 쌓는다.

김 주필 같은 '경쟁' 사고에 젖은 한국의 학부모들은 영국에 가면 '애들을 너무 놀게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흔히 보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놀면서' 공부하는 나라의 경쟁력이 결국은 이렇게 큰 차이를 드러내고, 전반적인 세계와 유럽의 불황 추세 속에서도 경제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 사용하기 시작한 유로화까지 거부하면서 뻗대는 경제적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외국에서 겪는 상황이겠지만, 고등학교 때 쌓은 교양과 창의력, 토론, 독서 위주의 교육은 대학원으로 갈수록 그 저력을 더욱 크게 발휘한다.

아무리 평준화를 인위적으로 시도한다고 해도 경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게 인간사회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지금 경쟁이 모자란 게 아니라 경쟁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모든 게 계량화를 지향하는 미국식 교육제도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다 보니 독서도 없고 토론도 없는 단세포적인 암기 위주의 경쟁을 하고 있는 게 문제인 것이다. 자신을 윤리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창의적인 머리와 인문 교양이 없는 기계적인 인간들만 양산하다 보니 사회의 각종 비리가 쌓이는 것도 결국은 의미 없는 점수경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옥스포드대를 들어가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필자가 예를 든 영국의 옥스포드 1학년 여학생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도 부단히 그 많은 책을 읽고 그 많은 문학적 내용을 샅샅이 알고 있게 만드는 교육 제도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한다. 그러한 철학이 없이 그저 '경쟁'을 더욱 원한다는 주장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매우 평이한 그리고 종종 무책임한 주장일 뿐이다.

김대중 주필은 경쟁을 주장하지만, 그가 쓴 글에서 외신이나 외국의
정보를 인용하는 데 있어서 부정확함, 조사의 불성실함, 심지어 조작의 흔적까지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 자신은 과연 어떤 '경쟁'을 뚫고 일간지의 주필 자리까지 올라간 것인지 묻고 싶다.

영국에서는 학부생의 에세이로 썼다가도 'reject'를 먹을 게 분명한
수준인, 사실에 대한 엉터리 연구 조사 실력을 보이니 하는 말이다.
후대의 학생들에게는 더욱 강한 경쟁을 주문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경쟁 외의 다른 비장의 '경쟁력'이 있어서 주필이 된 것은 아닌지 알고 싶은 것이다.

김 주필이 이렇게 글의 사실 관계에서 여러 오류를 남기는 이유는
자명하다. 목적을 하나 정하고 여러 사실을 그 목적에 맞춰서 왜곡하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의 목적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려는 유혹에 늘 시달리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사실만을 취사선택하는 것에서 글을 쓰는 사람의 인격이 갈린다. 더군다나 '정론'을 쓴다는 이에게 그러한 왜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김대중칼럼] 平準化가 나라 망친다 

평준화.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좀먹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교육 평준화다. 사람들은 요즘 연일 확대되는 ‘게이트’성 부정부패로 나라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그것들은 단편적이고 일회성이다. 진정 나라의 기본을 흔드는 것은 몇십년의 회임기간을 가진 교육의 부진이며 공교육의 붕괴다. 교육붕괴의 핵심원인이 바로 평준화다. 

만성적인 이 문제가 새삼 올해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서울 강남지역의 집값 폭등과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아파트 10만가구 건설’ 때문이다. 강남 집값의 상승은 올해부터 수도권 7개 신도시지역의 이른바 신흥명문고가 평준화의 이름 아래 사라지고, 따라서 그 교육수요가 학원이 밀집한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평준화의 명분은 "고교서열화의 심화로 이른바 명문고 진학을 위한 중학생들의 입시경쟁이 과열되는 등 심각한 교육적 병폐가 발생하고 있다"(경기도교육청 발표)는 것이다. 교육이란 지성의 훈련이다. 인간에 내재한 지성을 깨워서 올바르게 연마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훈련과 연마의 핵심과정은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교육에서 경쟁을 제거한다면 무슨 방법으로 교육을 수행할 것인가. 결국 교육의 수준과 질과 내용을 하향시켜 모두를 ‘도토리’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다. 

모든 경쟁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만사가 장단점이 있듯이 말이다. 과열도 있을 수 있고, 때론 부정도 있을 수 있으며, 때론 빈부의 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명한 사회라면 그 장단점을 비교 교량해서 부작용을 줄여가며 본질을 추구할 것이다. 속된 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을 안 담글 수는 없다. 

평준화가 보편적 덕목이라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왜 차별화되려고 노력하는가? 스포츠의 경쟁도, 월드컵의 16강도 부질없는 과열의 촉진이며 쓸데없는 과욕의 소산이다. 대학입시도, 대기업의 입사시험도, 고등고시도 없애고 순번에 따라 배정하면 된다. 그것이 사회주의 세상의 사는 방법 아닌가. 또 대통령은 왜 뽑고 선거는 무엇때문에 하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정치의 과열경쟁은 입시과열에 비할 것도 없이 망국적이며 해악적이다. 

온 세상의 거의 모든 단계가 경쟁이며 투쟁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청소년 시절부터 선의의 경쟁에 나서는 훈련은 못 시킬 망정 그것을 배제시켜 결국 세상에서 낙오하게 만들려 하는가. 이것이 평준화를 요구하는 일부 교사와 학부모들이 바라는 것인가. 신도시의 평준화 찬성론자들이 여론조사 결과(찬성 82%)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는데, 그것의 표본성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생각일 뿐 자녀들의 장래, 나아가서 나라의 장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해보지 않았는가. 교육은 여론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포퓰리즘의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교육은 미래를 생각하는 장기적 안목의 투자이어야 한다. 비록 오늘 그 값이 ‘과열’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평준화로 치닫고 있는 이 시점에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엊그제 공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예산을 작년보다 27%나 증액한 221억달러의 야심찬 공교육 개혁법을 발표했다. 성적을 끌어올리지 못한 학교의 교장을 교체하고, 학교관리권을 박탈하며, 학부모에 학교선택권을 주는 등 강력하고 강제적인 구조조정이 내용에 담겨 있다. 영국에는 식스 폼스 칼리지(six-forms college)라고 불리는 4000개의 입시학원이 있다. 고교1학년쯤 되면 이 학원에 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여기를 가야 영국의 명문대학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 약 400만 명의 중국 학생들이 미국 등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고 해마다 100만 명의 학생이 귀국해 새 중국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을 때, 당시 IMF는 그 원동력을 찾던 나머지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을 60~70년대 한국인의 폭발적인 교육열과 이로 인한 고등교육자의 양산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같은 논리로 볼 때 지금 우리 교육의 부진과 공교육의 붕괴위기는 훗날 한국을 세계의 경쟁무대에서 퇴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평준화에 안주하며 과열이 어떻느니 ‘공부 안해도 대학 가는’ 1인1기 교육이 어떻느니 노래 하면서 경쟁없는 ‘공교육의 낙원’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분명 세계무대의 추운 겨울에 베짱이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주필)

덧붙이는 글 [김대중칼럼] 平準化가 나라 망친다 

평준화.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좀먹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교육 평준화다. 사람들은 요즘 연일 확대되는 ‘게이트’성 부정부패로 나라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그것들은 단편적이고 일회성이다. 진정 나라의 기본을 흔드는 것은 몇십년의 회임기간을 가진 교육의 부진이며 공교육의 붕괴다. 교육붕괴의 핵심원인이 바로 평준화다. 

만성적인 이 문제가 새삼 올해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서울 강남지역의 집값 폭등과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아파트 10만가구 건설’ 때문이다. 강남 집값의 상승은 올해부터 수도권 7개 신도시지역의 이른바 신흥명문고가 평준화의 이름 아래 사라지고, 따라서 그 교육수요가 학원이 밀집한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평준화의 명분은 "고교서열화의 심화로 이른바 명문고 진학을 위한 중학생들의 입시경쟁이 과열되는 등 심각한 교육적 병폐가 발생하고 있다"(경기도교육청 발표)는 것이다. 교육이란 지성의 훈련이다. 인간에 내재한 지성을 깨워서 올바르게 연마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훈련과 연마의 핵심과정은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교육에서 경쟁을 제거한다면 무슨 방법으로 교육을 수행할 것인가. 결국 교육의 수준과 질과 내용을 하향시켜 모두를 ‘도토리’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다. 

모든 경쟁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만사가 장단점이 있듯이 말이다. 과열도 있을 수 있고, 때론 부정도 있을 수 있으며, 때론 빈부의 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명한 사회라면 그 장단점을 비교 교량해서 부작용을 줄여가며 본질을 추구할 것이다. 속된 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을 안 담글 수는 없다. 

평준화가 보편적 덕목이라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왜 차별화되려고 노력하는가? 스포츠의 경쟁도, 월드컵의 16강도 부질없는 과열의 촉진이며 쓸데없는 과욕의 소산이다. 대학입시도, 대기업의 입사시험도, 고등고시도 없애고 순번에 따라 배정하면 된다. 그것이 사회주의 세상의 사는 방법 아닌가. 또 대통령은 왜 뽑고 선거는 무엇때문에 하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정치의 과열경쟁은 입시과열에 비할 것도 없이 망국적이며 해악적이다. 

온 세상의 거의 모든 단계가 경쟁이며 투쟁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청소년 시절부터 선의의 경쟁에 나서는 훈련은 못 시킬 망정 그것을 배제시켜 결국 세상에서 낙오하게 만들려 하는가. 이것이 평준화를 요구하는 일부 교사와 학부모들이 바라는 것인가. 신도시의 평준화 찬성론자들이 여론조사 결과(찬성 82%)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는데, 그것의 표본성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생각일 뿐 자녀들의 장래, 나아가서 나라의 장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해보지 않았는가. 교육은 여론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포퓰리즘의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교육은 미래를 생각하는 장기적 안목의 투자이어야 한다. 비록 오늘 그 값이 ‘과열’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평준화로 치닫고 있는 이 시점에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엊그제 공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예산을 작년보다 27%나 증액한 221억달러의 야심찬 공교육 개혁법을 발표했다. 성적을 끌어올리지 못한 학교의 교장을 교체하고, 학교관리권을 박탈하며, 학부모에 학교선택권을 주는 등 강력하고 강제적인 구조조정이 내용에 담겨 있다. 영국에는 식스 폼스 칼리지(six-forms college)라고 불리는 4000개의 입시학원이 있다. 고교1학년쯤 되면 이 학원에 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여기를 가야 영국의 명문대학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 약 400만 명의 중국 학생들이 미국 등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고 해마다 100만 명의 학생이 귀국해 새 중국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을 때, 당시 IMF는 그 원동력을 찾던 나머지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을 60~70년대 한국인의 폭발적인 교육열과 이로 인한 고등교육자의 양산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같은 논리로 볼 때 지금 우리 교육의 부진과 공교육의 붕괴위기는 훗날 한국을 세계의 경쟁무대에서 퇴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평준화에 안주하며 과열이 어떻느니 ‘공부 안해도 대학 가는’ 1인1기 교육이 어떻느니 노래 하면서 경쟁없는 ‘공교육의 낙원’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분명 세계무대의 추운 겨울에 베짱이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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