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조선' 원조는 교원노조사건

5.16 쿠데타로 강제 해산당한 '4.19 교원노조'(곤)

등록 2002.03.26 09:00수정 2002.04.0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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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노조의 불매운동으로 인해 논조를 바꾼 1960년의 조선일보. 5월4일 칼럼에서는 "교원조합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가 경북교원노조 교사들의 집단 항의를 다룬 8월17일자 기사에서는 '관료는 마이동풍, 전국서 응원부대'라는 부제를 달아 교원노조를 편들었다.


"조선일보의 논조변화는 교원들의 '불매운동' 때문"

"지금은 모든 변혁을 적법절차에 따라 법령을 준수해가면서 점진적으로 이룩해가는 과정에 있다. 교원을 포함한 일체의 공무원이 정치운동에 참여하거나 공무원외의 집단적 행동을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법률이 아직 엄연히 살아있는데 교원노조가 결성될 수 있을지 그 여부는 교육자의 양식에서 판정될 수 있는 일이다."(1960년5월4일 '교원조합을 말할 때가 아니다')

"교원노동조합의 결성이 법적으로 정당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국가공무원법과 노동법을 찾아보아야 할 터인데 노동법에는 이것을 금지할 만한 명문이 없다. 따라서 현행법으로는 교원노조를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1960년6월26일 '교원노조와 시위운동')

위 내용들은 모두 1960년대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들로, 전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약칭 교원노조)에 대한 두 기사의 시각이 채 두 달로 안돼 정반대를 보이고 있다. 교원노조 대해 초창기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던 조선일보가 논조를 바꾼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에 대해 당시 교원노조 대표를 맡았던 강기철 옹(78)은 "보수언론의 왜곡보도에 맞서 교원노조가 불매운동을 벌였고, 이 때문에 조선일보가 논조를 바꾼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지난 2000년부터 시작된 이후 언론개혁운동 차원을 넘어 사회운동 차원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조선일보 반대운동(안티조선운동)'은 그 뿌리가 40여년전의 '교원노조사건'에서 비롯한 셈이다.

4.19 혁명의 열기에 힘입어 교원노조 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교원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5월4일자 칼럼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비판적인 요근래의 시각과 큰 차이가 없다.

칼럼은 "교원들도 봉급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임에는 틀림없으니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주적인 단결권을 주장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한번 냉정히 고찰해보자.아무리 민주혁명이라고 한들 과격한 쿠데타에 의하여 헌법이고 법률이고 간에 모조리 부정해버리고 실력으로 정권을 찬탈해버린 유혈혁명은 결코 아닐 것이다"라고 자중을 당부했다.

칼럼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독재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교사들의 아픈 과거를 들쑤셨다.

"교육자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용감했고 민주주의의 역군이었던가를 반성해 보라. 학생들이 혁명의 주동세력이 되었다는 데서 자기들이 교육을 잘해서 된 것이라고 우쭐한다면 과대망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에 거짓교육을 하고 학생의 의분을 억누르려는 역할을 한 것이 교원이었지...(중략)...교육자로서의 양심이 살아있다면 먼저 학생들에게 그 동안의 무기력과 부정을 사과해야 할 일이지 민주화 붐에 편승하여 교원조합 결성부터 서두른다는 것은 지극히 이해될 수 없는 사고이다."

강 옹은 "교원노조를 결성하기로 한 것에는 이익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정권의 시녀'였던 대한교련(현 한국노총)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교사들의 공감대가 더 크게 작용했다"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들의 교원노조에 대한 공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교원노조의 이목 사무국장(80, 대구 거주)도 "한국일보와 영남의 지역언론들은 교원노조에 대해 우호적이었는데, 동아일보가 가장 악랄하게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교원노조 결성을 준비하는 교사들의 항의에도 불구, 조선일보의 공격은 계속됐다. 그해 6월28일에는 당시 조선일보 회장이었던 홍종인 씨(작고)가 직접 선봉에 섰다.

홍 씨는 당일 1면에 실린 시론('교원노조란 무엇인가')을 통해 "학원의 혁신이나 민주화가 단순히 학생들에 의하여 더 좋은 교육시설에 의한 더 좋은 내용의 알뜰한 교육을 받기 위한 외침보다도 교사들이 학생들을 충동하여 폭력으로써 학교장이며 학교재단 책임자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대학교 교사들이 대학당국자나 경영당국에 대한 불만으로 학생들에 대한 교수를 거부하는 등 교사들이 일으킨 문제가 학원분규에 더 심각한 문제를 던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홍 씨는 또 "교사라는 직책의 국가적 사명으로 보나 또 그 봉사의 직무 관계로 보아...(중략)...공장의 직공과 같은 노동자와 그 성질을 많이 달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며 "일본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교원노동조합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파탄을 겪고 있다"고 양국을 비교했다.

이같은 조선, 동아의 공격에 대해 교원노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교원노조는 중앙위원회를 소집,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보수적 색채의 신문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강 옹은 "특별히 항의시위를 한다든가 하는 별도의 홍보를 한 것은 아니었다. 교원노조 소속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수언론이 왜곡보도로 혁명정신을 모독하고 있다'고 알리는 방법을 택했다"고 전했다.

당시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된 상황이었고, 학생들 역시 자신들이 혁명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사회의식이 강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교사들도 수업 시간에 시사적인 문제를 놓고 자연스럽게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신문을 봐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담임교사의 얘기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이 귀가 후 집에 가서 학부모들에게 학교에서 들은 얘기를 하면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독재도 이 같은 교사들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교사들을 부정선거에 동원했던 것이다"

당시 전체 교원 10만여 명 중 30∼40%가 교원노조에 가입해 있었고, 학급당 평균 학생 수가 60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교원들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교원노조의 '불매 캠페인'은 당시 최대 일간지였던 동아일보의 논조까지 바꿀 수는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약했던 조선일보의 구독망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조선일보의 논조 변화는 60년 6월 하순부터 감지됐다. 조선일보는 6월23일자 사설(교원노조에 대한 문교부의 부당한 해산명령, 사진)에서 "우리는 국가공무원법 제29조에 의거한 문교부의 교원노조 해산명령이 전적으로 그릇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라며 교원노조를 편들기 시작했다. 사설의 내용을 좀더 들여다보자.

"교원노조의 적법 위법의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우리는 문교당국이 어째서 교원노조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시선을 쓰며 백안시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중략)...문교부는 교원노조 해체명령이 학원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본 적이 잇는가를 묻고자 한다. 4월혁명으로 학원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고 확고부동한 민주학원을 건설하려는 교원들이 그들의 자주적인 단결운동을 어떻게 강제로 저지시킬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일보는 7월7일자 3면에서 한봉섭 당시 경상북도 문교사회국장이 6일 도 의사당에서 "교원노조는 흡사 빨갱이 단체 같은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교원들 노조는 빨갱이 같다고 경남 문사국장 망발'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교원노조에 대한 모욕적이며 사도(師道)에 벗어난 한 국장의 '빨갱이' 운운은 어느 정도의 증거가 있는 것인지 교육계에 큰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관계자들은 말하였다"고 덧붙였다.

'교원노조가 빨갱이 같다'는 정부 부처 관계자의 말을 '망발'이라고 비판한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는 "좌익계가 장악한 교원노조로 인해 일본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홍종인 회장의 칼럼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이어 8월18일자 사설('경북도내 1400여 교사의 집단사표 문제')에서 "우리는 교원노조의 합법성 여부가 논의되었을 때 수차에 걸쳐 교원노조가 우리의 현행법에 비추어 결코 불법이 아님을 말한 바 있었다...(중략)...따라서 우리는 이번 사태의 도화선이 된 조 지사의 부당한 인사발령에 대하여 그 이면사정을 좀더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강 옹은 "당시 대표였던 나에게까지 조선일보 쪽에서 접촉해온 것은 아니지만, 불매운동이 벌어진 지 얼마 안돼 조선일보가 노조 실무자들에게 '특별히 도와줄 일이 없겠느냐?'는 전화를 걸어왔다. 5.16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원노조와 정부의 홍보전도 대단했는데, 조선일보에서 우리가 낸 성명서를 무료로 게재해준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회고했다.

4.19 혁명 직후의 조선일보는 방일영 발행인, 홍종인 회장, 유봉영 주필, 송지영 편집국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중 송지영 씨가 1961년 1월 진보적인 일간지였던 <민족일보>로 옮겨가 최석채 씨가 후임 편집국장을 맡았다.

교원노조의 불매운동이 일어난 지 어언 42년. 그 사이 조선일보는 권력과의 유착 덕분에 급성장했고, 최근까지도 '전교조에 무릎 꿇은 교육부', '교사들의 집단 가투' 등의 사설을 통해 전교조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강 옹은 "조선일보가 전적으로 우리 주장에 동조한 것은 아니지만, 불매운동을 전후로 해서 논조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1989년 전교조가 출범할 때 '교사가 무슨 노동자냐'는 식의 조선일보의 악의적인 공격에 시달렸는데, 훨씬 이전에 교원노조 때도 똑같은 공격에 시달렸었다. 89년과 60년이 다른 점은 우리는 왜곡보도에 맞서 싸웠고, 일정한 성과를 거둬냈다는 점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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