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떴다! 정의당 당수, 코밑 팔자수염"

'카이저 수염' 진복기씨와 92·97년 8명의 마이너 리거들

등록 2002.07.19 00:53수정 2002.07.1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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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이색후보1] '카이저 수염' 진복기씨
"떴다 봐라! 정의당 당수, 코밑의 팔자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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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 수염' 진복기씨. ⓒ 경향포토

단 한 번의 선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정치인. 한때 박정희·김대중과 자웅을 겨뤄 아깝게 3등으로 석패했다고 말하는 사람. 이후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대통령선거에 나서지 않았지만, 매번 선거 때마다 언론에 이름이 오르락내리락거렸던 이색후보의 대명사. 별칭 '카이저 수염'(자칭 코리안 수염)으로 더욱 유명한 진복기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결국 박정희 그의 당선만을 위한 / 대통령선거로 너도 나도 뒤숭숭해지면 / 떴다 봐라 / 정의당 당수 / 코밑의 팔자수염 …… 무교동 1가 거리 걸어가노라면 / 지나가던 고교생들 / 지나가던 여고생들 / 낄낄낄 웃어대니 복되어라 / 진복기"

시인 고은의 <만인보>에 실린 '진복기'의 모습이다. 고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만년 대통령선거 후보였던 진복기씨를 생각하기만 하면 늘 웃음이 난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 시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처럼 고은의 <만인보>에서도 진복기씨는 70년대를 풍미했던 정치·사회·문화계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71년 대선 때 박정희·김대중에 이어 '동메달'

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는 3선개헌을 마무리하고 장기집권을 꾀했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52세·공화당)와, 그에 맞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던 김대중(44세·신민당) 간의 피말리는 한판 승부였다. 또한 이 선거는 영·호남의 지역 대결이 본격화된 시발점이었으며,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10월유신(72년)을 선포하게 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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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컬하게도 71년 대선은 정의당 총재인 진복기(52세)씨가 일약 '전국구 정치인'으로 급부상하게 된 선거이기도 했다. 당시 진씨는 1%(12만2914표)의 득표율로 박정희와 김대중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했고, 이때의 대선 성적표를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소설가이자 문화부장관을 지낸 김한길씨의 부친 김철(통일사회당)씨도 이 선거에 후보로 나섰으나 중도에 사퇴했다.

진복기씨는 만주북경대학을 졸업하고, 광복군 중앙조직위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이색후보가 그러하듯 그는 자금난 때문에 속칭 '빨랫골'로 불렸던 서울 수유리에 있는 자신의 연립주택이 중앙당이자 선거사무실이었다.

71년 대선 이후 줄곧 간접선거가 치러진 탓에 진씨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그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다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87년 제 13대 대선 때부터. 진씨는 이후 87·92·97년 대선 때마다 '출마'를 선언해 뉴스메이커로 떠올랐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87년(13대)에는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92년(14대)에는 김영삼(민자당) 후보가 같은 기독교 신자라는 '석연찮은' 이유를 대고 중도에 포기했다.

88년 목사 안수를 받고 92년 대선 때 기독성민당 총재로 출마를 선언했던 그는 '당원 수와 선거자금 규모'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적들이 알게 되면 선거에 차질을 빚게 된다"며 '두더지식 선거운동'을 전개해 신문 가십란을 장식하기도 했다.

대통령후보 등록 마감일인 92년 11월 25일 오후 진씨(당시 74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불법타락 선거운동이 판을 치는 정치풍토에 회의를 느껴 불출마 결심을 하게 됐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최근 건강진단을 받은 결과 의사로부터 12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앞으로 정치풍토가 쇄신되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진복기씨의 좌충우돌 갈지(之)자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14일 선거 막바지에 후보도 아닌 그의 이름이 또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김영삼 후보의 서울 상계동 유세에 민주산악회 표시 스티커를 붙이고 나타난 진씨는 "김 후보의 찬조연설을 하겠다"며 연단 앞으로 걸어나오다 경호원들에게 저지를 당하는 소동을 빚었던 것이다.

언론으로부터 '대통령 단골 후보자' '대선 상습 출마자'로 낙인(?) 찍힌 진복기씨는 그 명성에 걸맞게 97년에도 언론사를 직접 돌며 "이번엔 반드시 썩어빠진 정치권을 정화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출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미 대통령선거 출마와 관련해서는 '양치기 소년'이 돼 버린 진복기씨는 더 이상 이전처럼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오랜만에 등장한 진복기씨의 이름은 정치면이 아닌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단골 대통령후보로 유명한 '카이저 수염' 진복기 기독성민당 대표가 당사를 잃게 됐다. 서울지법 민사합의 14부는 26일 S사가 '당사 용도로 빌려준 건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 약정을 위반했다'며 기독성민당에 대해 낸 건물명도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건물을 양도하라'고 원고승소 판결했다. S사 대표 이모씨는 94년 6월 진씨가 만든 정명당에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서울 성북구 번동에 3층 건물을 지어주었으나, 이후 진씨가 당명을 마음대로 바꾸고 건물을 교회·미술학원 등에 임대해주자 소송을 냈다."(<한국일보> 2000년 4월 27일).

이란, 가수·인질범·행상 등 500명 후보 … 고르바초프 0.5% 득표

▲ 애칭이 '고르비'였던 고르바초프.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캐스팅 보트는 랠프 네이더가 쥐고 있었다. 네이더는 전국적으로 3%밖에 득표를 못했지만, 최대 격전지였던 플로리다주에서 97만표를 얻으며 민주당의 표를 잠식했다. 결국 박빙의 승부에서 네이더 때문에 조지 부시는 웃고, 앨 고어는 울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군소후보의 파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민주·공화당 양당 체계가 뿌리내린 미국에서도 군소정당과 군소후보의 역사는 깊다. 1882년 농민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민당에서부터 1968년 남부독립의 기치를 내세우며 탄생한 미국독립당까지. 2000년 대선의 캐스팅 보터였던 랠프 네이더도 8만여 명의 당원을 가진 녹색당 후보였다.

빌 클린턴이 당선됐던 1992년 미국 대선 때에도 20여 명이 넘는 후보가 출마했다. 사람들이 조지 부시와 클린턴, 로스 페로 등을 빼고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후보들이 수두룩했다. 당 이름도 가지각색으로 금주당, 풀뿌리당, 자연법당, 납세자당 등 다양했다. 심지어 정치무관심당도 있었다.

2001년 이란 대선에서는 후보등록자가 500명에 이르기도 했다. 후보자들의 면면도 대중가수, 인질범, 공무원, 군인, 거리행상 등 각양각색. 이 가운데에는 1979년 미국대사관 인질범도 있었고, 대중가수 모하마드 후세인 팔라반도 있었다. 물론 상당수 후보는 혁명수호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로 자격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도 17명이 후보자 등록을 마쳐, 1974년 12명의 후보 이래 최다 후보가 각축을 벌였다. 이들 가운데 전직 스트리퍼였던 쾌락당의 한 후보는 "교도소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사랑의 날'을 선포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한때는 세계적인 뉴스메이커였던 대통령이 군소후보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소 냉전을 종식시킨 장본인인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고작 0.5%를 득표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 정리·이한기 기자



[역대 이색후보2] 92·97년의 마이너리거들
남장여자 김옥선, '1노3김'과 맞선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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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여자로 대선에 출마했던 김옥선 전 의원. ⓒ 연합뉴스

92·97년 14∼15대 대통령선거는 외형적인 구도상 공통점이 많은 선거였다. 우선 '메이저리거' 3명과 '마이너리거' 4명이 출마해 끝까지 격돌을 벌였다. 메이저리거들도 엄밀히 따지면 2강1중의 구도였고, 1중이 여당 후보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92년에는 양김으로 불리는 김영삼(64세·민자당)과 김대중(67세·민주당)이 87년에 이어 대결을 벌이는 가운데 국민당 돌풍을 불러일으킨 '왕회장' 정주영(77세)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다. 97년에도 이회창(62세·한나라당)과 김대중(72세·국민회의)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이인제(49세·국민신당)가 마지막까지 당락을 좌우하는 구도였다. 정주영과 이인제는 당시 여당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이색·군소후보로 나서 중도사퇴 없이 돌진했던 4명의 마이너리거들, 그 가운데 1명은 진보진영의 대표주자였다는 점도 92·97년 선거의 닮은꼴이었다. 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이후 16년만에 '직선제'로 실시된 87년 대선에서도 4명의 마이너리거들이 나섰지만, 홍숙자(사민당)·김선정(일민당)·백기완(무소속) 후보가 중도사퇴해 신정일(49세·한국당) 후보만이 나홀로 '1노3김'에 맞섰다.

자천타천 출마 선언 20여 명에 달해

대선 때만 되면 이색·군소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20여 명이 자천타천으로 후보 출마를 선언하지만 정작 후보등록까지 가는 경우는 4∼5명 가량. 92·97년에도 '카이저 수염' 진복기(기독성민당)씨를 비롯해 정희원(대정치진보당)·김동주(하느님당)·권정수(친민당)·박홍래(우주생명천심당)·손정수(애국번영당)씨 등이 출마만 선언하고 본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이들이 내세우는 불출마 이유는 출마 이유만큼이나 제각각이다. "참신한 인물을 영입하려고 유명인사와 접촉하다 마감시한을 놓쳤다(유준하·대한민주당)", "불공정한 선거운동이 전개돼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진복기·기독성민당)", "개별적 선거운동을 치르러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이병호·민주국민연합)" 등의 논리다. 드물긴 하지만, 지지자들에 의해 후보등록이 됐다가 본인이 취소하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그러나 실제 이들이 출마 선언만 하고 후보등록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금난. 92년의 경우 후보 기탁금이 3억원, 97년에는 5억원에 이르러 결심만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탁금을 낼 능력은 있지만 후보등록에 따른 추천인·지구당 결성 등의 요식 절차를 다 끝마치지 못해 후보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가끔은 출마 선언을 통해 언론에 자기 주장을 편 뒤 나 몰라라 하며 꽁지를 빼는 언론플레이어도 있다.

후보등록 유무를 떠나 이색·군소 후보들은 대선이라는 공간을 개인 또는 조직의 메시지를 다중에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진영의 후보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현실적인 공약이 아닌 다소 계몽적이거나 '뜬 구름 잡는 식의' 자기 주장을 펴는 것도 이 때문.

92년 삿갓과 도포 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던 권정수(친민당)씨는 8년 동안 신명한문서숙이라는 서당을 운영했던 유생 출신. 그가 내건 기치도 '인의예지 효제충신'의 유교적 도덕정치 구현이었다. 97년 대선 때 "혼탁한 세상의 청소부가 되겠다"며 일찬스님이 출사표를 던졌고, 역술인 최전권(무소속)씨는 "138만표를 획득해 5위로 낙선한다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자신의 직업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92년 대선에 직접 나선 이병호 후보처럼 '도덕정치·법치주의·풍요로운 경제' 등의 거대 담론을 화두로 꺼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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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백기완 선생. ⓒ 오마이뉴스 이종호

출마에 그치지 않고 실제 대선후보로 나서는 경우에는 좀더 구체화된 공약을 내걸지만, 풍부한 상상력 탓인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다소 황당하거나 실현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허경영(49세·공화당) 후보. '박정희 정신 계승'과 '신세종대왕시대'를 기치로 내걸고 97년 대선에 출마한 허 후보는 △국회의원직 폐지 △주민세 등 직접세 폐지 △핵무기 보유 △대학명칭 폐지 등의 극우 색채가 짙은 '혁명공약'을 내세우는 동시에, 토·일 휴무제나 국회의원 50%를 여성에게 할애한다는 진보적인 정책도 제시해 유권자들을 다소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같은 이색·군소후보들이라도 가정환경이나 인생역정은 각기 달랐다. 97년 대선 때 함께 출마했던 허경영 후보와 신정일(59세·한국당) 후보는 대조적인 케이스. 고아 출신인 허 후보는 주경야독을 하며 노력한 끝에 사회사업가로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반면, 신 후보는 당시 80억원대의 재산이 말해주듯 유복한 가정에서 큰 어려움 없이 컸다.

두 후보의 학력도 서로의 인생사만큼이나 달랐다. 허 후보는 6·25 전쟁 때 부모를 잃고 네 차례나 양자로 옮겨 다니며 협성상업전수학교·동국대 대학원 등을 고학했다. 72년에는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이에 비해 신 후보는 서울고-경북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아메리칸타운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 정치연구소에서 수학하기도.

김옥선 후보도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인물. 그는 '남장여자' 국회의원이자 75년 유신체제 반대에 앞장서다 의원직을 잃은 '김옥선 파동'으로 이미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었다. 92년 대선에 홍일점 후보로 나선 그는 대선기간 동안 '무공약'을 공약으로 내세워 눈길을 끌었다.

유전출마 무전불출마, 선거 후 빚잔치로 이중고

대통령후보 등록일이었던 92년 11월 25일 오후 2시. 중앙선관위를 찾아온 박국제(45세·경남 창원시)씨는 "돈이 없어도 정치적 소신이 있는 인물은 누구나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며 자신의 생각을 담은 유인물을 나눠주다 경비원들에게 쫓겨났다. 당시 후보 기탁금이 3억원이었기에 박씨의 주장처럼 대선후보는 '유전출마 무전불출마'였다.

92년 민중후보로 나선 백기완씨가 등록 마감일 서울대생의 긴급모금에 힘입어 가까스로 후보등록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백씨는 기탁금 부족으로 이미 자신의 집을 팔겠다는 신문광고도 내놓고 있던 참이었다.

'유전∼ 무전∼' 법칙은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돼, 상대적으로 '실탄'이 부족한 이색·군소후보들은 '짠돌이 선거'를 치러야만 했다. 92년 대선 때 박찬종(53·신정당) 후보는 하루 400만원 가량 드는 선거자금을 마련하고 본인 홍보도 할겸 종이 달린 열쇠고리와 저서를 파는 한편, 방송연설도 국고지원이 되는 연설만으로 국한했다.

같은 해 선거를 치른 이병호(66·정의당) 후보도 대규모 유세보다는 소규모 집회나 강연에 집중하기 위해 봉고차 유세에 나섰다. '남장여자' 김옥선(58·무소속) 후보는 '구걸정치'를 않겠다며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유세차량도 없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거리유세에 나섰다.

이들에 비해 '조직'의 힘에 의해 출마한 된 백기완 후보는 적극적인 개척형. 그는 1인당 1만원씩을 내는 '만원 계조직'을 꾸려 대규모 유세 비용을 추렴했다. 그러고도 백 후보는 선거 후 방송연설 비용 때문에 3억여 원의 빚을 안았으니 '유전출마 무전불출마'라 아니할 수 없다. / 이한기 기자

덧붙이는 글 | 위의 기사에 적혀 있는 나이는 대통령선거에 나선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위의 기사에 적혀 있는 나이는 대통령선거에 나선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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