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부대 '생체실험' 된 조선인 있었다

[독점공개] '세균전' 731부대의 '조선인 마루타' 최초 확인

등록 2002.08.28 11:35수정 2002.08.2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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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일본 도쿄 지방법원에서는 또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생체실험과 세균전으로 악명높았던 구 일본군의 '731부대'를 상대로 중국인 피해자, 유족 등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낸데 따른 것이다.

흔히 '마루타'로 불린 731부대의 인간 생체실험 대상자 가운데는 조선인도 끼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소위 '정신대') 피해자의 경우 국민적 관심을 모은 반면 조선인 마루타의 경우 손배 소송은 차치하고라도 아직 피해자 실태조차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관련 학계의 연구, 조사와 국민적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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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마루타' 심득룡의 결혼사진. 그는 중국과 소련 공산당의 정보요원을 지냈다.

"조선인 마루타 '심득룡'은 중국 공산당 정보요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관동군 731부대에 의한 '인간 생체실험' 대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흔히 '마루타'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루타로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 중에는 중국인 뿐만 아니라 조선족(재중동포)도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돼 충격을 던지고 있다.

이번에 처음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 마루타'는 1943년 당시 중국과 소련 공산당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던 심득룡(沈得龍) 씨. 그에 대해서는 그동안 중국 하얼빈에 있는 731부대 기념관 전시관에 있는 명패와 사진 한 장만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심 씨의 조선족 신원을 뒷받침하는 문건 2종이 최근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건은 당시 일본 헌병대가 심득룡 등 4명을 체포한 뒤 작성한 문서를 중국 대련 공안 당국이 발견하여 중국어로 번역해서 관리해 왔으며 현재 대련시 당안관에 보존돼 있다.

이 문건은 1943년 10월 16일 〈일제 대련헌병대 (정찰 체포 신문)에 관한 지하공작원 심득룡 외 3인의 보고〉 자료이다. 여기에는 심득룡 씨가 “소련 홍군 참모본부에서 무선전보 첩보로 활동해 온 소련 공산당원”이라고 적혀 있다.

그의 신원을 밝혀주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문건은 1988년 중앙 당안간에서 발견된 〈제731부대 특별수송 정황〉이다. 여기에도 심 씨의 이름과 주소, 조선족 출신이라는 것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또 731부대로 이송된 125명의 명단 가운데 조선인이 3명이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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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북경 중앙당안관에서 발견된 <731부대 '특별수송' 정황조사표>. 이 문서에는 731부대로 이송된 125명의 신상이 기록돼 있는데 노란색(95번) 부분이 '조선인 마루타' 심득룡에 관한 사항이다.

사진관, 문구점 차려 정보활동하다 체포

심득룡 씨는 1911년 5월 29일 중국 동안성(지금의 흑룡강성) 요하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9살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후 동생 심금룡과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1929년 4월, 18세가 되던 해 삼촌 심일성, 황 모 씨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중공)에 가입하고, 지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4년 그는 동북 항일인민혁명군 소대장 겸 청년단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같은 해 의지하며 살아 왔던 동생 심금룡(당시 15살) 씨가 일본 침략군 토벌대에 의해 체포, 살해되고 말았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그는 인민혁명군 정치부 이두문 추천에 의해 소련 공산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38년 소련 홍군 참모본부에서 공산대학 졸업생 중 일부 학생을 선발해서 실시한 무전에 관한 정보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후 1940년 3월 27일, 그는 중대한 사명감을 띠고 모스크바를 떠나 아라본토(지금의 카자흐스탄)와 신강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왔다. 란주 팔로군 사무소에서 수속을 밟은 다음 팔로군 군관 신분으로 서안(西安)으로 거쳐 연안에 도착한 후, 중공 중앙 사회부 상보진 부장과 소련 공산당 기관 진리보 책임자를 만났다. 그 후 현재 하북성 근처의 기중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중공 기중구 사회부 부장 상보진은 심득룡을 천진으로 데려가 왕요헌(王耀軒)이라는 사람에게 심득룡을 공장에 취업시켜 공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편의 제공을 부탁했다. 상보진은 주민등록증과 대련으로 갈 수 있는 여권을 마련해 합법적인 모든 수속을 거친 후 심득룡과 같이 하얼빈, 대련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 가서 공작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련에서 정보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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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득룡의 공작활동을 도운 중국인 왕요헌

왕요헌(王耀軒)이 모든 비용을 일체 부담하기로 하고 대련에 있는 흑석조에 흥아 사진관과 남산지구에 부흥 문구점을 차려 경영했다. 왕요헌의 친척인 이진성에 의해 사진기술도 배웠다. 여기서 그는 친척과 친구, 고향사람 등 약 20명을 소개해주어 정보활동을 할 수 있는 정보거점으로 발전시켰다.

이때 심덕룡은 크게 활약해 심양, 본시, 천진, 북경에도 정보거점을 넓혀 나갔다. 당시 그가 경영했던 가게들은 왕요헌(王耀軒)과 왕학년(王學年)의 이름으로 운영했다. 당시 심득룡은 진원, 이경춘, 이성화라는 별명으로 활동했으며 정보활동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영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중국과 소련의 정보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중공 중앙 사회부와 전 소련 홍군 참모본부의 공동 사업에 의한 결과였다. 중국과 소련은 일본 침략자와 투쟁하기 위해서 1941년 공동으로 대련에서 국제 정보거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공 지중구 사회부장 장국건은 “내가 중공 지중구 사회부 영도공작을 할 때 당 중앙 사회부 허건국 부장의 명령에 따라 당 중앙 사회부에서 파견한 진원(심덕룡) 동지를 적군이 많은 지역인 대련으로 보냈다.

그때 상급에서 지시하기를 진원(심득룡) 동지는 국제 형제당 당원이고, 우리 당 중앙 사회부 지하 정보공작을 책임진 영도간부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무 차질 없이 목적지에 보내라고 했다. 그때 당 중앙에서 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심득룡 체포해 731부대에 넘긴 일본 헌병 유타카

대련에서 무전공작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1943년 4월 어느날, 심득룡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장춘에 위치한 관동군 86부대 헌병대가 운영하는 무선통신 수색반이 흑석초(만주의 지명)에서 소련의 스파이가 무전으로 교신하고 있다는 정보를 감지했다. 흑석초 흥아 사진관에서 소련으로 무전을 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심득룡이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 중에서 소련 스파이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 헌병들은 심득룡을 조사한 결과 모스크바에서 무선 통신 교육을 받았고 중공 본부가 있던 연안을 거쳐 천진에서 대련으로 들어온 것을 알았다고 한다.

만주 86부대 소속인 과학 수사반은 신경(新京)에 있었다. 이 수사반의 임무는 수상한 전파를 탐지해 소련의 무전첩자(스파이)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밖에 독물반(毒物班) 지문반 사진반 등이 있었다. 헌병대는 6개월 동안 연합 정찰을 펼친 끝에 흥아 사진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1943년 10월 1일. 운명의 밤이 다가왔다. 86부대의 대련 헌병대와 정찰부대, 과학 수사반 70여명이 7개조로 나누어 흥아 사진관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전보 발신을 마치고 나오던 심득룡을 체포했다. 사진관에 있는 심득룡의 부인과 이진성 내외, 또 다른 직원 한 명이 같이 체포되었다.

이 날의 사건으로 당시 심양, 본시, 천진, 북경에 있던 나머지 무전 공작을 위한 위장 정보거점들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 대련 헌병대에 체포된 무전 공작원은 모두 7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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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요선의 조카 왕학년. 그는 심득룡가 함께 '대련사건'에 연루, 체포돼 731부대로 끌려갔다.

심득룡을 비롯한 왕요헌과 왕학련, 이진성, 이충선, 류만회, 양학례 등 조선인과 중국인들이었다. 이 중 심득룡, 왕요선, 왕학련, 이충선 등 4명은 이듬해인 1944년 대련 헌병대의 압송되어 731부대로 끌려간 후 심한 고문을 당한 채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당시 일본 제86부대의 헌병이었던 일본인 미오 유타카(三尾 豊, 1998년 7월 사망) 씨는 생존시, 대련사건으로 인한 과거사 문제로 심한 불면증에 시달려서 매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잠을 청하려고 약을 먹기도 하고 중국 한방 안정제를 먹을 정도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사죄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그는 1994년과 1995년 중국을 방문하여 피해자의 유족을 만나서 사죄하고 자신이 모은 재산의 일부를 유족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 귀환자 연락회 회원으로 가입해 전국으로 다니면서 과거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활동을 하다가 1998년 7월 숨졌다. 필자는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 그를 인터뷰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녹취 기록을 살펴보자.

"당시 일본의 헌병대는 2개로 분류돼 있었다. 내부담당 헌병과 외부담당 헌병이 있었는데 국내에 있는 헌병은 육군대신(국방부장관) 아래 있었다. 외부의 헌병은 침략국에 가면 군령 헌병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군사령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군인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도 관할했다.…

1938년 8월 26일전에는 특별취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 후에 있었는데, 특히 구 만주국을 침략했던 헌병들은 특별 이송취급도 관할했다. 관동부 헌병 사령부가 마루타를 취급하고 있는 헌병대로 통지서를 보내 소련에 대한 정보활동을 한 사람, 반만항일(反滿抗日)에 관련된 자, 군과 국가에 대한 반항죄에 해당하는 자는 체포하여 특별취급으로 규정해서 731부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중국인 마루타 희생자 유족은 보상재판 중,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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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득룡, 왕요현 등을 체포했던 당시 일본 헌병대원 미오 유타카(맨 왼쪽)가 1994년 중국을 방문해 왕요현의 유족들에게 사죄를 하고 있다.

미오 유타카 씨는 '대련사건'에서 심득룡을 비롯한 이충선, 왕요헌, 왕학년을 체포해 731부대로 보낸 과정도 설명했다. 대련사건 당시 체포했던 왕요헌에 대해서는 50세 가량 된 중국인 이며 방적공장 소장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또 왕학년에 대해서는 25세 가량의 중국 청년이라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원이 아닌 것 같았고 당의 조직을 알지도 못했으며 사령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아마도 헌병이 자기의 공적을 올리기 위해서 그를 공산당원으로 몰았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 두 사람을 체포한 것은 미오 유타카 자신이었고, 그 두 사람을 대련으로 데리고 가서 고문까지 해가며 조사했다고 한다. 그가 체포한 또 한 사람은 이충선이라는 조선 사람이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해서 심득룡 씨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1944년 4월경 그 4명은 하얼빈 감옥으로 특별 이송되었고, 그때까지 대련의 헌병대 유치장에 가두어 두면서 2개월간 심한 고문을 했지만,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도 주고, 대우도 잘 해주면서 공작을 했지만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결국 아무런 정보도 알아 내지 못한 채 731부대로 보냈다고 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인 왕요헌은 당시 ‘사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학년도 죄를 날조해 체포했을 가능성이 있어 법원으로 보내면 가벼운 형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731부대로 보내려면 사령관의 허가만 있으면 됐기 때문에 그들을 731부대로 보낸 것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 헌병들이 사람들을 731부대로 많이 보내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공적을 올리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소련 첩자를 검거한다는 것은 대단한 공적이었고, 진급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득룡 씨를 731부대로 보냈을 때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731부대로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한 희생자는 3천여명이 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희생자는 270여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득룡 씨를 비롯한 조선족이 공개된 것은 몇 사람에 불과하다. 세균전에 희생된 중국인 유가족 180여명은 몇 년 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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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도쿄 지방재판소가 731부대 희생자 유족들이 낸 손배소송에 대해 "일본정부는 책임없다"고 판결한 후 고껜 스찌야 유족측 변호사가 법정을 빠져나오고 있다. ⓒ YTN방송 촬영

하지만 ‘조선인 마루타’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아직까지 어떤 공식적인 보상문제나 사과도 언급한 적이 없다. 731부대에 의한 조선인 희생자 문제는 오늘날까지 잊혀진 채로 우리는 또다시 8·15 57년을 보냈다.

언제까지 이 문제를 방치할 것인가? 이 사안은 피해자인 우리 민족의 문제이자, 가해자인 일본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인 마루타' 문제에 대해 남과 북의 적극적인 공동 대처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월간 <민족21> 9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민족21> 9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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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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