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실패한 미완의 개혁

9월 11일 아옌데 사망 30주년 맞는 칠레

등록 2003.08.31 08:13수정 2003.08.3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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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11일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쿠테타 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날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칠레의 자주와 개혁도 죽음을 당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1970년 11월 5일 민주적 선거에 의해 대통령 취임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의 출범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체 게바라는 그에게 “다른 방법을 통해 같은 결과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아옌데에게 동지애를 가진다”라고 말했다.

당시 칠레는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아옌덴는 칠레국민들에게 빵과 포도주로 가득 찬 풍요와 정의의 조국을 건설했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칠레가 처한 정치경제적 현실은 그가 신념에 차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칠레에는 미국의 30대 다국적 기업 24개가 칠레에 진출해 있었고, 은행을 제외하고는 규모 순으로 18위까지의 칠레 기업이 모두 미국의 자회사였다. 아옌데가 집권하던 1970년 당시 칠레는 세계에서 최대 규모로 초석과 구리를 생산하고 있었으나, 미국 등의 외국광산회사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어 이익의 대부분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내부적으로도 소수의 집권층들이 전체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땅을 가지지 못한 농민들은 빈곤을 이기지 못하여 도시로 몰려들러 광범위한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이들에 대한 호소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이라는 기적을 낫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독립한 중남미 국가들에서, 엘리트 가문의 자제들이 미국의 명문대학이나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들 나라의 실력자들은 미국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등장은 미국과 기득권세력 모두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아옌데는 그의 원대한 꿈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이룰 수 있는 개혁적 성과가 거의 없었다. 아옌데가 광산의 국유화를 시도하자, 미국과 칠레의 기득권층은 본격적으로 아옌데를 실각시키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보유하고 있던 구리의 비축 분을 국제시장에 다량으로 풀어놓기 시작해서, 구리의 가격을 15%나 떨어뜨려 아옌데 정권에 큰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또 아옌데가 친미인사들로 채워져 있던 군부를 개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한 육군참모총장 레네 슈네이데르(Rene Schneider)를 납치해서 암살했다. 군의 주요지휘관들은 아옌데의 지시를 거의 이행하지 않았다. 미국은 또 칠레에 대한 차관을 중지시켰고, 산업장비나 의약품 등의 주요한 물자들을 칠레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칠레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켰다. 그 결과 1973년 상반기에만 300%를 넘는 인플레가 발생했다.

또 칠레의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적 개혁으로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그 결과 자본가들에 의한 파업이 일어났다. 전 산업부문에 걸친 파업이 두 차례나 일어났던 것이다. 물가를 올리기 위해서 상업자본가는 상품을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야당이 된 기득권 세력은 사사건건 개혁정책을 저지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칠레국민들은 아옌데를 믿었고, 결국 1973년 3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국민의 지지에 힘을 얻은 아옌데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개혁을 수행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더 큰 추진력을 얻기 위해, 다시 한번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럼으로써 의회의 과반수 획득과 함께, 대외적으로 확고한 국민적 지지를 재확인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려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득권층과 미국의 초조감을 더하게 만들었다. 쿠데타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바로 그날 일어났다.

이미 쿠데타 전날인 9월 10일 밤에 칠레해군과 미국의 전함들은 공동작전을 위해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집결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의 육, 해, 공군과 경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군사혁명위원회(군사평의회)를 만들고 의장에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육군 최고사령관을 선출했다.

그날 아침 대통령 궁으로 출근한 아옌데는 쿠데타가 확실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였으나, 느낀 결론은 이미 모든 세력이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그때까지 쿠데타군에 의해 점거되지 않았던, 마지막 국영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설을 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으렵니다... 중략... 여러분이 보여준 충성심에 생명으로 보답하렵니다...(중략)...그들은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들에게 굴레를 씌울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역사는 우리들 편에 있으며 그것은 민중이 만드는 것입니다... (중략)... 어둡고 암울한 이 순간을 다른 사람들이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중략)... 이 말은 나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나의 희생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는 항복하고 해외로 망명하라는 쿠데타 군의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대통령 궁에 전투기로부터 폭격이 이루어졌고, 지상군이 대통령 궁으로 진입했다. 총소리가 들리고 아옌데는 죽었다. 칠레는 피노체트가 이끄는 기나긴 독재의 길로 들어갔다.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벌어진 직후의 일주일 동안 3만여 명의 칠레시민이 학살당했다. 이 중에는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의 피노체트 집권 기간동안 3천여 명이 공식적으로 사망했고, 끝내 시체를 찾을 수 없어 실종으로 처리된 사람이 1천여 명이 되었다. 고문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이 10만 명, 국외로 추방된 100만 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인권국가' 미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쿠바의 혁명이 성공했었고, 엘살바도로, 니카라과 등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평화적으로 개혁을 시도했고 성공했던 인물이 바로 아옌데였다. 그리고 니카라과 내전은 일시적으로나마 반군이 성공했었다. 그리고 칠레는 평화적 개혁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었기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아직까지도 남는 토론의 주제이다.

아옌데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간의 병보단 사회의 병을 고치려고 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또한 당시 이미 설립되어 있던 공산당을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사회민주당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한지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남미에서는 또 다시 선거에 의한 개혁이 벌어지고 있다. 또 남미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무장투쟁이 지속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올바른 방법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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