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원동 고려인 강제이주와 홍범도 장군

<레닌의 긔치>(1938-1990) 신문에 실린 광고, 기사, 문학 작품에 나타난 홍범도 장군의 자취

등록 2004.03.14 14:43수정 2004.03.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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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하여 소련 원동에 살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 이들 고려인들은 1938년 5월 15일자로 카작스탄(카작어 표기)의 첫 수도였던 크즐오르다시에서 민족신문 <레닌의 긔치>(후에 명칭이 <레닌기치>로 바뀜)를 창간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주 시 옮겨온 “원동고려사범대학”과 “고려극장”(나중에 명칭이 조선극장으로 바뀜)과 함께 <레닌의 긔치>는 이주 고려인들의 교육과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홍범도 장군도 여느 고려인들처럼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으며 장군의 여생에 대한 자취가 <레닌의 긔치> 신문에 남아 있다. <레닌의 긔치> 지면에 실린 원동 빨찌산 대장 홍범도에 관한 기사는 모두 세 개이다. 둘은 홍범도 장군이 직접 게재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설가 김기철의 글이다. 인용한 내용은 띄어쓰기만 고치고 낱말은 그대로 표기한다.

첫 번째 것은 1938년 <레닌의 긔치> 지면에 실린 것이다.
<레닌의 긔치> 신문사는 창간 후 몇 해 동안 강제이주 때 헤어진 친척을 찾는 유료 광고를 내어 주었다. 크즐오르다시 크라스늬이 소구역 60번지에 사는 빨찌산 대장 홍범도 장군도 <레닌의 긔치> 1938년 륙월 10일자에 낸 사위를 찾는 광고를 실었다. 전문을 소개한다.

송용준을 찻소
나의 사위 송용준이 아랄쓰크 모레루 갓다는데 그의 거처를 아시는 동무는 g. Kzyl-Orda, Krasnyi gorodok, No. 60 홍범도에게 전하여 주시오.


여기에서 말하는 사위란 아마도 이인복 사이에 태어난 딸의 남편인 것 같다. 홍범도 장군은 강제이주 전까지 원동에서 딸과 사위와 함께 생활하였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두 번째 것은 1941년 <레닌의 긔치> 지면에 실린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1940년 후반기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시작되었다. 카작스탄의 고려인 학교, 고려극장, 고려인 꼴호즈와 쏩호즈에서도 대대적으로 모금을 하여 국방 공채를 매입하고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에게 공급할 필수품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빨찌산 대장 홍범도 장군은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조국을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도록 고무하는 글을 <레닌의 긔치> 신문에 게재하였다. <레닌의 긔치> 1941년 11월 7일자에 실린, 이전 빠르찌산(홍범도 장군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음) 홍범도의 글 “원쑤를 갚다”를 소개한다.

1919년 십월 초생, 어슬-어슬한 저녁이엇다. 넓은 벌판에 힌눈이 나려 덮이엇다. 찬바람은 살을 어이는듯이 몹시 매찻다. 무릅마듸까지 올라오는 새 눈을 해가르며 로씨야 사람 여슷명이 C촌으로 들어왓다. 손에는 베르단과 무철대를 쥐고 좌우 억개에와 옆구리에는 둥글-둥글한 폭탄들을 찻다. 가지각색 털모자를 쓴 그들의 의복은 나무아지에 몹시 찢기엇다. C촌 농민들은 그들의 행색을 보고 빠르찌산들인 것을 그 직석에서 알앗다.

그들은 딱근-딱근한 온돌에서 등을 굽으며 H시가를 지나다가 슬그먼히 잃어진 세 동무에게 대하여 근심하엿다. 이 로씨야 사람들은 수청 빠르찌산들이다.

이들은 C촌에서 밤을 류하고 아츰에 빠르찌산대를 찿어갈 목적이엇다. 십월의 밤은 몹시 쩔럿고 초생의 하늘은 수검액이같이 어둡엇다.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받히고 산페로 돌아 다니며 먹을 것을 못 먹고 닙을 것을 못 닙은 그 꼴의 몸덩이는 얼엇고 창자는 주리엇다. 그러나 굳건한 결심과 뜨겁은 희망들은 그냥 끓고 있엇다!

일즉한 새벽이다. 힌눈이 쪽깔린 벌판으로, 조국의 진정한 아들 – 여슷 빠르찌산들을 붓잡기 위하여 이십여명의 백파들이 말잔등이에 붙어 쏜쌀 같이 들어오앗다. 격렬한 싸홈이 시작되엇다. 빠르찌산들은 사격에 사격으로, 죽엄에 죽엄으로 용감히 대항하엿다. 결과에 백파 긔병 일곱놈이 말안장에서 떨어지고 빨찌산 세 동무가 힌눈을 붉은 피로 물드리면서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받히엇다.

이 때에 마츰 고려 빠르찌산들이 통지를 받고 사홈텀에 당진하엿다. 원쑤들은 자긔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쫓겨가삳. 해는 동쪽에서 붉은 빛을 떠이고 째듯이 솟아 올랏다. 쓸쓸히 불어오는 찬바람은 조국을 위하여 눈 우에 쓸어진 세 빠르찌산들을 추도하엿다. 그러나 살아 있는 세 동무는 서로 손을 굳게잡고 그들의 원쑤를 갚을 것을 다시 결심하엿다.

그런데, 빠르찌산들이 여긔 온 것을 백파들이 어대에서 알앗을가? 보기 좋게 숨숨 얽은 와씰리 찌모페예위츠와 이완 꼰쓰딴찌노브는 의아하엿다. 고려 농민들이 꾀앗을가? 아니다 그들은 갈 사이가 없엇다. 추후에 알아본 즉 자취없이 떠러진 세 놈이 자긔 동무를 팔아 먹엇다. 변질자들이 우리 사이에 있엇으며 또는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냉정한 탕환은 외부의 원쑤와 내부의 원쑤를 함께 없이하여야 한다.

로씨야 빠르찌산 세 동무는 고려인 빠르찌산들과 함께 단니며 용감하게 원쑤들을 뭇찔럿다. 바루 십월 중순이다. 빠르찌산들은 백파들과 K령 밑에서 큰 전쟁을 하엿다. 그들은 거긔에서 본때 있게 동지들의 원쑤를 갚앗다. 원쑤를 질시하는 투사들의 탄환은 하나도 공으로 허비되지 않고 280명의 적군의 뢰수를 마삿다.

나는 지금 늙엇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쓰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으니들! 모도 무긔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


세 번째 것은 1989년 <레닌의 긔치> 지면에 실린 것이다. 김기철이 쓴 <레닌기치> 1989년 4월 11일자에 실린 “홍범도 장군의 전투경로와 쏘련에서의 만년 생활”이란 글이다. 소설가 김기철은, 강제이주 후 고려극장을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희곡 “홍범도”를 창작한 극작가 태장춘과 함께 크즐오르다에서 홍범도 장군과 가깝게 지냈다.

홍범도 장군이 크슬오르다로 온 것은 1937년 가을이였다. 때는 바로 원동 조선인들을 중아시아와 카사흐쓰딴으로 강제 이주시키던 그 해여서 장군도 역시 조선사람으로 실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이 년금생활을 하며 살던 “씬두히네츠” 꼴호스는 크슬꿈 대사막 저편 호레슴주 구를렌 구역에 배치를 받았다. 아직 기력이 정정하시지만은 가을이 깊어가는 때 강바람, 모래바람을 무릅쓰고 500여 낄로메뜨르의 들길을 간다는 것은 자못 위험한 일이였다. 꼴호스 지도자들은 이주민 접수부에 교섭하여 장군을 명단에서 빼고 크슬오르다에 남겨 두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홍범도 장군께서 파쟁에 참가하지 않고 얼마나 공평정당하게 행동하였든지 그 가혹한 쓰딸린 폭정시기에도 감히 그를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홍 장군은 그 당시 검거망에 걸리지 않은 거의나 유일한 빠르찌산 로병이다.

이 때 카사흐쓰딴의 이전 수도이던 크슬오르다는 조선사람의 서울이라고 불리웠다. <선봉> 신문사를 비롯하여, 원동조선사범대학, 조선극장, 조선라지오방송국, 하바롭쓰크출판사 조선부 등 조선문화기관들이 다 여기로 옮겨왔기 때문이였다. 이 때 크슬오르다는 조선사람들에게 거주권이 허여된 유일한 도시였다. 여기에 떨어진 것은 장군의 만년생활에 큰 편익을 주었다.

장군에게 처음 방조의 손길을 내민 것은 조선극장이였다. 극장은 장군을 수위장으로 임명하고 매월 50루불리를 지출하여 이에 군부에서 받는 년금 80루불리를 합하면 월 평균수입이 130루불리, 생계를 유족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극장의 일원이 된 장군의 생활은 심심치 않게 흘렀다. 번번이 초만원을 이루는 (이 때 크슬오르다에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극장 구경을 처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관객들을 앞에 앉히고 멀찌감치 뒤줄에 앉아서 “춘향전”, “심청전” 등 극들을 보며 때때로 남녀배우들 속에 끼여 동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흥겨웁기도 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늦게 크슬오르다로 왔기 때문에 1938년 봄에야 장군을 뵈올 기회를 가졌었다. 1919년 여름 장군 부대의 박창훈 소대장이 와서 석 달동안 묵으면서 장총 70병을 사가지고 간 마산재퇴거우 고개 밑 첫집 아들로서 간도 류학 때 로투거우, 청산리, 봉오골 등 장군의 전적지들을 답사한 일이 있고 1933년에 만주 유격전선에서 왔기 때문에 첫 상봉에 대뜸 장군과 친숙해 졌다.

가끔 장군은 귀속말로 “조심해, 걸리지 말아라”하시고 타일러 주시군 하였다. 수만리 먼곳에 와서 갈밭 속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치는 동포들의 운명에 대해서 장군은 큰 관심을 돌리였다. 한번은 지방 출장을 갔다 돌아오니 장군은 걱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농사가 되기는 되겠더나? 농사가 잘 돼야 살지.”

1939년 4월 초에 나는 장군에게 고별인사를 올리려고 갔댔다.
- 장군님, 구를렌으로 갑니다.
- 그래 조선출판부도 닫기고 말았느냐? 조선사범대학이 없어지고 조선라지오가 닫기고 신문과 극장만… 장군은 목이 메여 말을 잊지 못하다가 물었다. – 그래 뭘 하러 가느냐?
- 그 곳에도 조선극장이 있는데 그 극장 예술지도원으로…
- 너도 극장…? 가라, 가라, 가서 목이 터지게 두드리며 평양수심가, 아니, 양산도곡을 불러라, 불러라!

나는 무릎을 굽혀 장군 앞에 절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이것이 장군을 영별하는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 뒤는 희곡작가 태장춘 동무가 장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1940년 12월 15일 희곡 “홍범도”를 완성하고 1941년 1월 16일에 크슬오르다시에서 그의 초연이 있었다. “연극이 맘에 드십니까?” 연극이 끝나자 묻는 말에 장군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무 추네, 추어… 하나 연극을 아무리 잘 놀아도 백두산 포수의 백발백중인 총 재간이야 뵈여주지 못하지”하고 너털웃음을 웃으시였다.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오시여 공동 가족사진을 찍은 일도 있습니다”하고 태장춘의 미망인 카사흐공화국 인민배우 리함덕은 회상하고 있다.

1941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였다. 조선극장 집단도 전 쏘련인민들과 함께 “모두 다 전선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받들고 일어났다. 장군은 한 알의 곡식도, 한 치의 천도, 한 푼의 돈도 아끼여 전선을 돕자는 것을 담화 주제로 삼았다. 1942년 4월 조선극장이 우스또베로 옮겨간 것은 장군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였다. 그러나 장군은 이웃로인들을 모여놓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전선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조국전쟁 승리의 날, 조선해방의 날이 올 때 이태도 채 남지 못한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 장군은 75세를 일기로 다시 못올 그 길을 떠나고 말았다.
오늘도 카사흐스딴 크슬오르다시 신분등록소에는 아래와 같은 장군의 사망증서가 보존되여 있다.

사망증서 사본
공민 – 홍범도
사망년월일 – 1943년 10월 25일
년령 – 75세
사망원인 – 로쇠
사망지대 – 크슬오르다시
1989년 1월 27일 내줌. 소장 서명.
1-GX No 332577

조국전쟁이 끝난 뒤 집 근처에 있던 장군의 산소를 중앙공동묘지에 면례하였으며 장군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크슬오르다시 쏘베트의 결정에 의하여 장군이 사시던 쓰쩨쁘나야, 쁘롤레다리 거리들의 이웃의 한 거리를 홍범도거리라고 이름지었다. 1985년에 중앙공동묘지 입구에 독자리를 잡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신 후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현재는 공동묘지 입구에 있던 것을 측면으로 옮겨 묘역을 넓혔다.


홍범도 장군의 만년 생활과 희곡 “홍범도”가 창작되고 초연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홍범도 장군이 만년에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의 수위 노릇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과 희곡 “홍범도”가 1941년에 초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기철이 “홍범도”가 1941년에 초연되었다고 하나 조선극장 배우였던 리길수의 글 “전선을 돕기 위하여”(<레닌기치> 1989년 5월 9일자)에 따르면 1942년에 “홍범도”가 초연되었다고 한다. 조선극장의 연출가이자 배우였던 김 이오씨프의 저서 “조선극장”(1982)에도 희곡 “홍범도”가 1942년에 공연된 것으로 되어 있다. 김기철의 기억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리길수의 글 가운데 희곡 “홍범도”와 관계된 부분을 인용한다.

우스또베로 이사해 오자 조선극장은 1942년 6월 14일에 “풍파”라는 연극을 처음으로 상연하였다. 이 연극은 크슬오르다에 있을 때부터 련습을 하여온 연극이여서 인차 수습하여 성과적으로 상연할 수 있었다. 다음엔 태장춘이 집필하고 있던 희곡 “의병들”(홍범도)을 빨리 끝내게 하여 그 해 5월 20일에 초연을 주었다.

<레닌기치> 1945년 10월 3일자 지면에 실린 태장춘의 희곡 “홍범도”는 한국연극협회에서 <한국연극> 1989년 4월호에 게재하고 이것을 각색한 창극 “홍범도”를 1989년 12월 2일과 3일 이틀 동안 공연한 바 있다.

작가 김세일은 1965년부터 소설 “홍범도”를 창작하여 <레닌기치> 지면에 연재하였다. 1989년에 서울에 있는 “제3문학사”에서 기획하여 이를 전 5권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은 <한겨레신문> 1989년 11월 30일자에 실린 “화제의 책”과 <한국일보> 1989년 12월 2일 “홍범도 장군 전기소설 완결키로”란 기사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시인들이 홍범도 장군을 시로 형상화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레닌기치> 지면에 실린 리상희의 시 “홍범도 거리에서”(1979)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언제나 이 거리를 걸을 때마다
그 어떤 감정에 휩싸이더니
오늘따라 달빛마저 어스름하여
넘치는 생각을 걷잡을 수 없어라
그 어떤 고적지를 찾아온 듯이
두리번두리번 살피기만 하니
지나간 오랜 일이 눈 앞에 떠오르는 듯
머나 먼 옛날의 전투하던 고장은
수천 리 먼 곳에 떨어져 있건만
장군의 이름 가진 거리가 있어
장군의 위훈은 여기에도 빛나더라

밤은 깊어 조용하건만
기적소리 이따금 들려오누나
장군의 구령소리인가
깊은 밤의 정적을 깨뜨리여라
구척의 키를 바라보려고
높이 천공을 치받아보니
뭉게뭉게 남쪽으로 날아가는 구름 떼
구레나룻 수염이 바람에 나붓기는 듯
장군의 면모가 눈 앞에 떠오른다

신출귀몰하는 기묘한 방법으로
번개 같이 날고 뛰는 비상한 술책으로
삼수갑산의 우거진 밀림에서도
세찬 바람 부는 만주벌에서도
쏘베트 원동의 혁명투쟁에서도
원쑤들의 간담을 써늘케 한
의병장군의 빛나는 그 위훈
만민은 우러르고 력사는 기억한다
전적지마다에 전설이 있고
이 도시에도
장군의 이름 지닌 거리 있으니
이 거리를 거닐 때마다
그 이름 생각케 된다

“홍범도 거리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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