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은 변해도 마음만은 그대로 남았으면...

[서평] <나의 사직동>

등록 2004.09.13 17:16수정 2004.09.1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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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직동 ⓒ 보림

서른을 훌쩍 넘기고서야 내가 삼십대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처음 찾은 곳이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길이다. 넓은 운동장처럼 아이들을 품어 주었던 그 골목은 차 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멀게만 느껴졌던 그 길이 겨우 몇 분정도의 거리였다.

그렇게 한참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그 옛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변해버린 주변 환경이 나를 이방인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간직한 채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할 즈음 발견한 책이 <나의 사직동>이다. 개발로 변한 사직동이지만 마음에 담긴 사직동은 작가가 전하고 싶은 그 마음 그대로 내가 경험한 느낌이었다.

한성옥, 김서정님의 사직동 이야기는 내게 새로움을 전해주었다. 높은 빌딩과 북적이는 인파로 언제나 시끌벅적거리는 도심 한복판도 예전에는 나의 기억에 담긴 추억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에 놀랐다. 빌딩 숲을 둘러싸고 모인 옛집들 이제는 하나 둘 모두 사라져 가고 있다. 아직 남아 있는 한옥들을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생겼다.

담쟁이 잎으로 가린 일본식 집은 우리 역사를 담고 있고, 골목길마다 마주치는 이웃들은 서로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넓은 마당에 내다 널은 채소에서 나눔의 미덕을 배우고, 골목길에 앉아 동네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파마 아줌마와 골목길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스마일 아저씨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운다.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들은 마음속에 저마다 희망을 품고 있기에 힘겨워도 웃으며 일할 수 있었다.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그 희망은 웃음을 주었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변해가는 사직동은 그들의 희망을 빼앗아 갔다.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방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게 하고, 없어서 슬픈 사람을 잊게 만든다. 나눔을 배우고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던 골목은 점점 어두워져 함께 가위바위보 하며 놀이삼아 오르던 백개의 계단도 지워버렸다.

하나 둘씩 변해가는 동네 모습에 아이들은 저마다 놀이 공간을 잃고 다툼을 한다. 어른들의 모습과 아이들 모습이 똑같이 변하고 있다. 제일 먼저 들어선 부동산 사무실을 시작으로 이사는 시작되고 하나 둘 사직동을 떠났다. 습관처럼 찾아 든 옛 골목은 이제 공사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 웃음을 빼앗아 간 사직동 공사현장은 뒤에 깨끗하게 자리한 아파트에서도 한결같다. 모두 자기 일에 바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다. 예쁘게 꾸며진 공원에는 나무도 꽃도 분수도 있지만 아이들이 없다. 마음 속에 남겨진 사직동과 지금 사직동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뒤돌아 어둠 속에 갇힌 아파트 창문은 서로 같은 모습으로 서 있지만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몇 년전 한참을 헤매던 내 어릴 적 동네가 다시 이곳에 들어와 있다.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 동네 골목에 앉아 파마하는 아줌마을 이해할 수 있을는지, 말리기 위해 마당 한 켠에 널어 놓은 채소를 보고 벌레라고 놀라지는 않을는지 걱정이다.

공감할 수 없다면 잊혀진 옛 문화를 알려줄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사직동>은 또 다른 의미를 간직한다.

환경은 변하더라도 마음만은 그대로 남겨 놓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골목길은 사라졌지만 나눔과 더불어 삶이 있었던 골목길의 마음은 그대로 전해졌으면 한다.

나의 사직동

한성옥 그림, 김서정 글,
보림,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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