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단 둘이 수업했습니다!

겨울방학 보충수업 1교시에 있었던 일.

등록 2004.12.30 20:04수정 2004.12.3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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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이다. 하지만 고2들은 예비 수험생으로서 방학의 의미를 그렇게 만끽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수준별 보충학습이나 자율학습, 그리고 여타 공부 때문에 힘들고 고된 방학이 될 것이다.

본교 2학년들은 방학이 시작 이틀 후에 바로 보충학습을 하도록 계획이 잡혀 있었다. 조그만 시골 고등학교지만 대한민국에서 고3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골 학교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학교에서 아이들의 대학 입시를 위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보충 학습과 자율 학습 계획표를 방학식에 내어 주면서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너희들 혹시 방학 중에 보충 학습이나 자율 학습 나오지 않으면 장학금 혜택이나 여러 가지 혜택에서 불이익을 줄 거니까 꼭 나와서 보충 수업과 자율 학습에 참가하도록 해.”

이렇게 방학식 하는 날에 엄포 아닌 엄포를 주었다. 한 반에 20명 가량 되는 아이들 중에 몇 명은 직업전문학교에 위탁생으로 가게 되어 있었고, 몇 명은 가정 사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일을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 때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실제 다 나와도 10명이 약간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교사로서 몇 몇 학생이 나오든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싶어 그렇게까지 엄포를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필자도 이번 방학 때는 여러 가지 못했던 교재 연구나 새로운 교수·학습 연수 등을 받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당장 내년에 3학년이 되는 관계로 학교에 부득이하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은 춥고 실제 학교의 냉난방 시설이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여름이면 기껏해야 지붕의 선풍기 몇 대가 고작이고, 겨울이면 속수무책으로 추위와 싸워가며 공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조그만 시골학교인지라 동문들의 도움도 받기 힘들 뿐더러 교육청 지원도 받기 힘들다. 그렇지만 처한 환경만을 탓할 수도 없다.

여하튼 방학이 되었고, 황금의 휴일을 보내고 아침 일찍 학교로 나섰다. 며칠 전부터 제법 춥게 느껴지더니 아침 공기가 주는 싸늘함이 두툼한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아이들의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물론 조금 일찍 나온 탓도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아이들이 오는지 싶어 밖을 내다보아도 아이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옆에 계시던 선생님도 “이러다가 1교시 공치는 것 아닌가”하고 걱정투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교시 수업을 하려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지 한 명만이 오들오들 떨면서 앉아 있는 것 아닌가.

“선생님 저 밖에 없는데요. 다들 겨울잠 자느라고 오지 않는가 봐요. 수업하실 건가요?”
“수업해야지. 네가 있는데 선생님이 수업하지 않는다면 선생님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잖니. 다른 아이들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하자.”

이렇게 한 시간을 그 아이와 마주 보면서 열심히 수업을 했다. 아이도 나의 열정에 놀랐는지 열심히 따라 주었다. 한참 후에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이 가정교사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마주 보고 둘이서 공부하니 어떠니?”
“선생님 부담스러워요. 괜히 죄 지은 느낌도 들고. 여하튼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과 일대일로 공부하니 이해도 빠르고 공부가 잘 되는 느낌도 들어요.”

1교시가 끝나갈 무렵에도 다른 아이들은 오지 않았고 1교시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몇 명 아이가 오는 것이었다. 방학이고 춥다는 핑계로 늦게 오는 아이들을 휴게실로 불러 따끔하게 꾸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오지 않는 아이들 집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고3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부모님들을 설득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하지만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3이라는 이유로 아이들과 학부형만을 닦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죄책감이 들었다.

여하튼 전화 몇 통과 잔소리를 곁들여 내일을 기약했다. 내일 또 안 나오면 당장이라도 집에 찾아가겠다는 엄포까지 놓았으니‘내일은 모두 나오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을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통의 전화로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추스르자 1교시 수업이 자꾸만 뇌리 속에 떠오른다.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교사인 나에게 정말로 한편의 비극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각박한 교육현실에서 한 명의 아이와 크나큰 교실에서 서로 마주보며 수업했다는 것 자체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방학이기에 가능한 일 아니던가. 아무리 예비 고3이라고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늦잠도 좀 자고, 그리고 잠시나마 공부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겨울 방학에도 학교에 나와 그것도 추운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 나오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갈수록 각박하고 피폐해져 가는 우리 교육 현실을 마치 비웃는 것은 아닌가 싶어 한편으로 통쾌한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여하튼 그날, 단지 한 명의 아이와 수업을 한 ‘1교시’는 여러모로 교사인 나에게 통쾌함과 우려를 동시에 안겨 준 사건으로 오래오래 기억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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