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서리 이야기

우리의 젊음은 그렇게 지났다

등록 2005.01.01 00:42수정 2005.01.0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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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회지의 고등학생이 된 내가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온 지도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여느 날처럼 다시 동네 이모 집 사랑채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과자와 술내기 육백(화투)을 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촌에서 농촌 일을 하는 친구들은 술이 꽤 센 편입니다. 우리들은 됫병 소주를 거의 반이나 비웠습니다.

“친구야! 올개도(올해도) 마지막 날인데, 마(그냥) 우리 화끈하게 놀아보자.”
“우째, 놀 낀데(어떻게 놀려고 하는데?”
“마,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아, 그라고 또 머 재미있능기 없나? ”

우리는 서로 빤히 쳐다봅니다.
“닭서리, 우떻노(어떻게 생각하니)?”
종아는 우리를 둘러봅니다.
“마, 좋다, 너거는(너희는) 우떻노?”
나는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합니다. 모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제 닭서리를 할 행동대원을 뽑는 육백을 다시 칩니다. 그런데 그만, 나와 종아와 동네 동생 하나가 덜렁 행동대원에 뽑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앞산에 있는 정 사장집 양계장으로 향합니다.

종아는 앞장을 서고, 나는 더듬거리며 뒤를 따릅니다. 심장이 고장이 났는지 쿵쿵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고 나는 자꾸 발을 헛디딥니다.

“니, 뭐하노? 서리 한두 번 하나?”

종아는 내 손을 잡아끕니다.

하기야 우리가 서리한 것이 한두 번은 아닙니다. 초가을이면 소에게 풀을 먹이러 가서는 뿔에 쇠줄을 대충 감아다가 산에다 쫓아 올려놓고서는 가까운 밭에서 콩을 한 아름 꺾어옵니다.

그리고 풀섶(풀숲) 속에서 마른 잎들을 주워 모으고, 소나무의 마른가지인 삭정이를 분질러 모아 콩을 올려놓습니다. 이제 검은 연기 속에서 콩깍지가 새까맣게 탑니다.

우리는 잔가지로 채 꺼지지 않는 재를 헤치고, 콩꼬투리를 손으로 싹싹 비벼서는 잘 익은 콩들을 입안에다 털어 넣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얼굴에 가로 세로 그을린 검은 선을 바라보면서 자지러지게 웃어대다가, 한순간에 뒤엉겨서 서로 얼굴에 숯검정을 묻혀댑니다.

또 유난히 덥고 모기가 많던 여름밤, 친구 몇 명이 작당을 하여 소죽 가마솥 바닥에서 시커먼 숯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조심조심 수박밭에 들어서서 수박에다 귀를 대고 톡톡 두드려 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컹, 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허겁지겁 겨우 수박 한 덩이만 서리해 와서는 적어서 오히려 더 맛있게 수박을 먹었습니다.

이제 양계장이 보입니다. 그 많던 개들도 모두 잠들었는지 사방은 고요합니다. 우리는 살며시 가장 외진 양계장으로 들어섭니다. 닭들이 놀라 푸득거립니다. 나는 살며시 닭을 틀어쥡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닭의 잔등을 두들겨 팹니다.

두어 번 치자 닭이 축 늘어집니다. 우리는 세 마리 닭을 안고 다시 논길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돌아옵니다. 모두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대기조들은 이미 가마솥에다 물을 끓여 놓았습니다. 그제야 가슴 한켠을 쓸어내리며, 우리의 무용담에 대해 너스레를 떱니다. 닭이 익어가고 우리의 치기어린 우정도 영글어갑니다.

우리는 2홉들이 소주를 병나발 불면서, 닭 뒷다리를 뜯으며, 차가운 고향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토해 놓았습니다. 30년 전 그 때 그렇게 우리의 젊은 한 해는 저물어 갔지만 우리의 우정은 더 크게 다가왔지요.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께서 조용히 저를 부릅니다.
“성수야! 니 혹시 정 사장집에 닭 잡아먹으러 가지 않았제?”
나는 가슴이 철렁 합니다.

“동네 젊은아들이 정 사장집 닭에 손을 대었능거 갑더라.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업으로 하는 집에 손을 대면 되겄나? 차라리 집 닭을 서리하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립니다.

친구들은 정 사장에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내 학교에 다니는 이 못난 친구이름은 얘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친구야! 그 때 고마웠다. 니도 올해 닭 해에는 복 많이 받아라! 그라고, 건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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