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에 생각나는 닭 이야기

아버지의 귀향 <13> 아버지가 계란 열개를 짚으로 엮는 모습은 이제 추억속에 묻히고

등록 2005.01.01 00:38수정 2005.01.0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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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한 줄과 계란 프라이

닭의 해가 왔다. 12년마다 되풀이 되는 닭의 해이지만 올해는 닭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닭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다양하다. 닭을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그만큼 다양하다. 닭은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하고, 화려하고 고고한 성격을 의미한다. 나에게 있어서 닭은 아주 낭만적이면서 가난의 아픔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나에게 닭 하면 '영위계구 무위우후(寧爲鷄口 無爲牛後),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라는 한자성어가 떠오른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을 소진(蘇秦)이 인용한 말로 <사기> 소진열전에 나와 있다. 나는 이 속담을 중학교 때부터 좌우명으로 여기며 살아오고 있다. 물론 내 삶이 반드시 그런 삶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지만 내 생활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시골 출신이라서 소나 닭이라는 말만 나와도 고향이 생각나는 나의 심리 상태가 이 한자성어를 지금도 좋아하도록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소띠라서 소를 더 좋아한다. 아니 닭에 대한 안타까운 추억 때문이 아닐까 한다.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농촌에서 닭은 살림의 중요한 하나의 축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암탉은 매우 중요한 재산 목록이었다. 백년 손님인 사위가 오면 장모는 씨암탉 잡아준다는 속담은 사위를 그만큼 대단히 중요하게 대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게 중요할수록 같은 식솔에게 닭은 그림의 떡이 될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씨암탉을 몇 마리나 키우느냐에 따라 그 가정의 경제적인 상태를 가름해 볼 수도 있었다.

이런 경제적인 측면도 있지만 여러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먹이를 찾아 주고 있는 암탉의 모습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다. 이런 한가한 모습은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여유와 삶의 낭만적인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닭에 대한 나의 추억은 두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우선은 가난이라는 어려움이 준 이미지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은 아니고, 농촌에서 동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집에서는 닭을 많이 키웠다. 지금처럼 양계장에서 부화시킨 닭이 아니라 토종닭으로 집에서 닭이 직접 부화시킨 것들이다.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마령 장날에 시장에 가셨다. 농사철이 바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암탉이 여러 마리였기 때문에 5일장에 내다 팔 계란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계란을 애지중지하셨다. 닭이 하루에 한개씩 알을 낳으면 부엌 찬장에 있는 짚으로 만든 바구니에 계란을 모으셨다. 그리고 장날 아침에는 짚으로 계란이 깨지지 않도록 계란 집을 만들어 열개씩 포장을 했다.

열개씩 포장한 계란 집은 정말 예술적으로 아름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계란보다 열개씩 포장하는 아버지의 정성과 완성된 계란 집 모습이 경제적 가치가 더 높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열개씩 짚으로 포장한 계란을 옆구리에 끼고 장에 가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드문 것이 아니었다. 특히, 학교 선생님에게 촌지(?)를 드릴 때 자주 이 열개로 포장된 계란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계란을 포장하실 때마다 우리 7남매는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때는 아버지가 계란을 포장하는 모습이 아름답거나 존경스럽지 않았었다. 형이나 누나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에 안타까움이 그득했다. 찐 계란이나 계란 프라이에 대한 갈망이 말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입장에서는 계란 10개는 작은 돈이 아니었다. 지금과는 달리 60년대 말에는 국민학교에도 육성회비를 내야했다. 그런데 육성회비 300원(내 기억에)이 시골에서 작은 돈이 아니었다. 특히, 우리 집처럼 중학교 한명과 국민학교 네명이 다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솔직히 드물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중학교 때까지 나의 소원 중의 하나는 바로 계란 프라이였다. 넓은 도시락에 쌀밥은 아니라도 밥 위에 계란 프라이가 얹어 있는 도시락을 먹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싸온 도시락을 먹을 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어머니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다면 어머니는 분명 해 주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끝내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아들에게 끼니때마다 내가 직접 계란 프라이를 해주고 있지만 말이다.

보통 귀한 손님이 오면 닭을 잡거나 명절 때 대개 닭을 잡는다. 닭 잡는 날이면 우리집이 바쁘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신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닭똥집(모래주머니) 때문이다. 닭똥집을 잉걸불에 구워 소금을 찍어 먹는 맛은 정말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르는 맛이었다.

닭에 대한 슬픈 기억도 많다. 지금은 닭장이 튼튼하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닭장에 난 틈으로 족제비나 살쾡이가 자주 닭을 죽이거나 물어갔다. 이런 날이면 온 집안이 완전히 초상집처럼 우울한 기분에 휩싸인다. 특히, 알을 품고 있는 닭을 개나 다른 짐승이 물어 죽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암탉이 20여일 정도 품으면 병아리가 부화하는데 부화할 즈음에 암탉이 죽으면 그 계란은 애저(哀猪)처럼 그냥 삶아서 먹기도 한다. 사실 맛은 별로고 건강에 좋다는 말에 먹었던 기억이 난다.

닭에 대한 이런 이미지와는 달리, 마당이나 텃밭에서 닭이 먹이 찾아 떼를 지어 다니는 모습은 참 한가롭고 정겹다. 여러 마리의 암탉을 키우다 보면 각기 다른 때에 병아리가 부화하여 다양한 크기의 병아리가 이리저리 몰려다는 모습은 보기에 참 좋다. 보리나 흙이 묻은 곡식을 마당에 던져 주면 우루루 달려와 열심히 먹이를 쫒는 모습은 시골 풍경으로는 아마도 으뜸일 것이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참 좋으셨다. 가마니를 엮으시든지 덕석을 엮으시든지 아니면 꼴망태를 엮으시든지 아버지가 만들면 동네에서 제일 훌륭한 예술품이 되었다. 아버지는 지게에 얹는 바작도 참 예쁘게 만드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려 놓으신 지게와 바작을 보면 지게를 메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부화한 닭이 들어가는 닭 우리를 잘 만드셨다. 마치 이글루처럼 반구 모양을 하고 있는데 대개 산죽(山竹)으로 만든다. 밤에는 암탉과 병아리는 이 닭 우리 속에서 지낸다. 닭 우리를 보면 균형이 반구처럼 정확하고 틈새가 일정했다. 지금 같으면 아마 장식품이나 수예품(手藝品)으로 많은 인기를 끌기에 충분하다.

닭은 겁이 많고 은밀한 짐승이다. 그래서 닭이 알을 낳는 장소는 일정하다. 처음에 닭이 알을 낳았을 때 그 장소를 찾지 못하면 의외의 사건이 일어난다. 닭이 알을 낳았을 때는 반드시 꼬꼬댁 꼭꼭 꼬꼬댁 꼭꼭하고 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우는가를 보고 행랑채 허청과 더그매를 샅샅이 뒤져서 알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계란은 밤새 쥐나 도둑고양이의 먹이가 된다.

한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암탉이 알을 낳았는데 거의 보름이 넘도록 계란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암탉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나서서 암탉을 찾아 나섰으나 찾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여일 정도 지난 후에 암탉이 10여마리의 노란 병아리와 함께 우리집 마당을 여유롭게 거닐고 있지 않은가. 우리 가족은 어리둥절했다. 그 사이에 암탉이 알을 품어 부화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귀향을 하신 후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다. 옛날처럼 닭을 한 번 키웠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다. 옛날의 토종닭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닭을 자유롭게 놓아 먹일 수가 없단다. 농작물 피해가 크고 요즈음은 사람들이 농약을 많이 해서 자유롭게 놓아기를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옛날보다 경제적 풍요는 많아졌지만 마음의 여유는 적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계유년 새해에는 손재주가 좋으신 아버지에게 산죽으로 닭 우리 하나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졸라서 토종닭 몇 마리 키워야겠다. 닭의 해에 닭과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사라진 과거를 다시 살려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덧붙이는 글 | 노태영기자는 남성고 교사이고 이 글은 http://family1004.netian.com에도 연재합니다.

덧붙이는 글 노태영기자는 남성고 교사이고 이 글은 http://family1004.netian.com에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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