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아들들 뒷바라지 해주고 싶다"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사신 어머니

등록 2005.05.02 20:53수정 2005.05.0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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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40대 모습 ⓒ 은종복

이 글은 내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쓴 글이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을 내가 대신 쓴 글이다.

오늘은 아침 바람에 셋째가 왔다. 나는 아들만 넷을 낳았다. 내 나이는 지금 71살.

“엄마, 내가 오늘 엄마에게 온 것은 엄마가 살아온 삶을 내가 대신 써주려는 거야!”하며 얼마 전부터 찾아오겠다고 했던 셋째가 말했다.

나는 오늘이 토요일이라 아침에 병원에 가야 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아픈 곳이 늘어간다. 몸 이곳저곳에 나는 것이 많다. 얼마 전에 오른쪽 눈 위에 난 작은 종기를 째는 수술을 했다. 오늘은 그곳을 꿰맨 실밥을 푸는 날이다.

나는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아침 8시 40분에 집 앞에서 떠나는 장애인용 차를 타려고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장애인 차는 65세 넘은 사람들도 공짜로 탈 수 있었고 내가 가려고 하는 시립 동부 병원 앞까지 바로 갈 수 있었다.

“엄마 오늘은 내가 차를 가지고 왔으니 나랑 같이 가요?”
“뭐 하러 차는 가져 왔니?” 나는 기름 값이 든다는 생각해 한마디 했다. 그래도 아들이 집에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으니 계속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그래 그러면 오늘은 우리 셋째가 효자 노릇 한 번 할래”하며 셋째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나는 셋째가 먹을 밥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셋째는 지금 대학 앞에서 작은 책방을 하고 있다. 그 책방 한 지가 벌써 12년이 넘었다. 지금은 둘째도 그곳에 같이 있다. 아무튼 아래 위층 합해서 10평이 채 안 되는 책방에서 아들네 두 식구가 먹고살고 있으니 참 대단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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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책방에서 대학 교재를 비닐로 싸는 모습. 2004년 3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 최종규

하지만 나는 요즘 셋째가 마음에 안 든다. 셋째는 대학 다닐 때도 데모한다고 내 속을 그렇게 썩이더니 결혼해서 하나 낳은 아들을 대안 학교에 보냈다고 난리다. 멀쩡하게 생긴 손자를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있고 다달이 몇 십만원씩 내야 하는 학교에 보냈다니 생각할수록 못마땅하다.

지난 해 일이다. 손자가 다니는 학교설명회를 한다기에 갔더니 다 쓰러져 가는 양옥집에 운동장도 없이 아이들 열댓 명이 지내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꽉 막히면서 왜 내 손자가 뭐가 모자라서 이런 곳에 보내야 하는지. 그날 이후로 한 달 가까이 나는 셋째 아들 내외와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지금은 다 잊고 살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것이 어쩔 수 없다.

나는 수저를 들다가 셋째가 나물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셋째야 조금만 기다려라. 집 옥상에 엄마가 심은 봄나물이 그새 많이 자랐구나. 내 금방 가서 따서 씻어 줄게!”
“엄마, 저도 같이 가요”하며 셋째도 따라나선다.

옥상에 올라가니 수십 개의 화분에 온갖 나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고추, 상추, 치커리, 가지, 쑥갓, 미나리, 돈 나물, 비듬나물, 컴프리 등이 조금씩 제 모양대로 파랗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상추와 쑥갓을 조금씩 땄다.

“셋째야 이것은 완전히 무공해야! 음식물 찌꺼기로 거름을 하고 설거지 한 물을 모아 주었는데도 이렇게 잘 자란다.”
나는 햇빛만 받고도 잘 자라는 것이 마치 내 아들들이 그렇게 자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이렇게 봄나물을 상에 올리니 없는 반찬이지만 풍성해 보였다.

“엄마 아까 말했듯이 오늘 내가 온 것은 어머니가 살아온 삶을 내가 글로 쓰려고 해. 그러니 엄마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줘. 그리고 옛날 사진도 있으면 한 장 주시고.”

“얘야 내가 살아온 것을 쓸려면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란다. 어서 밥이나 먹어라. 그 된장을 넣어서 상추쌈을 싸서 먹어봐. 정말 맛있다.”

나는 내 앞에 아들이 앉아서 밥을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렀다. 나는 아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멍하니 숟가락만 들고 있었다. 너무 행복했다. 아들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글로 쓴다기에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한 많은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는 1937년에 태어났다. 경북 군위군 비안면 새기터. 하루종일 버스 한 대도 들어오지 않고 전기불도 없는 두메산골이었다. 내 아버지는 아주 한량이셨다. 우리 집은 논이고 밭이고 거의 없었다. 농사일에 별 관심이 없던 아버지는 오십을 조금 넘긴 나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 그 당시 여자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우리 집 형편에 여자 공부시키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내 위로 한 살 위인 언니가 있고 아래로 몇 살 터울로 남동생이 둘이 있다.

바로 아래 남동생은 평생을 술도 지내다가 10여년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친정어머니는 장남이 세상을 등지기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내게 친정 식구는 항상 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삶만을 물려준 부모님이 있었기에 내가 이런 힘든 세월을 살아갈 힘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다. 아주 가끔씩 사는 것이 너무 힘들 때 내가 좀 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리 금선이는 어디다 내나도 밥 굶지는 않을 거야. 암 그렇지. 요것이 눈썰미가 좋고 말귀가 빨라 잘살 거야”하고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칭찬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며 내 볼을 비비면서 하는 그 말이 좋았다. 나는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 힘이 되어 살아갈 용기가 되었다.

내 나이 20살에 시집을 갔다. 나는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50년을 살면서 싸움 한 번 하지 않았다. 내 남편은 내가 살던 곳에서 걸어서 2시간쯤 걸리는 곳에 살았다. 경북 군위군 소보면 위성리. 우리들의 결혼은 집안 어른들끼리 왔다 갔다 하더니 그냥 정해졌다.

나는 혼례를 치르는 날 얼굴에 면사포를 써서 남편을 볼 수가 없었다. 단지 면사포 밖으로 살짝 보니 키가 작지 않다는 것에 마음을 놓았을 뿐이다. 내 남편은 첫날밤을 치르기가 무섭게 군대에 갔다. 그때는 막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여서 군복무도 길었다. 나는 친정에서 1년이 지난 후 소보에 있는 시댁에서 말로만 듣던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시댁 식구는 열댓 명이 넘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했다. 나는 그렇게 신혼 생활을 남편 없이 보냈다. 남편이 제대를 하고 집에 오자 나는 더 이상 시골에 묻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울에 계신 외숙모님께서 우리 식구가 서울에 와서 택시 회사에서 밥을 지어주면 먹고살 수는 있다고 하여 나는 남편을 설득하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쌀 한 말만 달랑 들고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그때가 지금부터 45년 전이다.

그런데 택시 회사 사장은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안되겠어요. 아주머니가 너무 젊고 고와서. 여기는 모두 시커먼 남자들 뿐이니 무슨 일 날지도 몰라요”하며 취직을 시켜주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외숙모 말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절망만 하지 않았다. 내 아버지가 말했듯이 나는 어딜 내놔도 살아갈 힘이 있었다.

그때 외숙모님은 기름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나와 남편도 그곳에서 일하기로 했다. 나는 공장 사람들 밥을 해주고 남편은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곳도 거의가 남자들만 있었다. 새색시가 그런 곳에서 일을 하니 자꾸 눈길을 주곤 했지만 나는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고 내 일만 열심히 했다.

일을 끝나고 잠을 자려고 방에 들어가면 작은 방에 열댓 명이 같이 자는데 나는 잠잘 곳이 없어 무릎을 세우고 칼잠을 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자리도 화장실에 갔다오면 없어지곤 했다.

그럴수록 나는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낸 후 작은 판잣집에 월세를 얻어 들어갔다. 그리고 첫 아이가 태어났다. 5년 만에 얻은 큰 아이는 내게 더 없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자 도저히 산후 조리를 할 수 없어 시댁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시댁 생활은 역시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1년을 못 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남편은 종이 공장에 취직을 했고 나는 행상을 다녔다. 큰 애를 등에 업고 머리 위에 온갖 먹을거리를 이고 다니며 팔았다. 생선, 나물, 과일 등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팔았다. 다시 둘째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결혼해서 자식을 못 낳는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계속 아들을 낳으니 더없이 기뻤다.

나는 다음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반드시 아들로 태어나리라고 생각했기에 내 옆에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너무나 든든했다. 하지만 먹고살 일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우리는 한 겨울에도 연탄 한 장 피우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어렵게 장만한 판잣집 방 한 칸에 우리 네 식구가 서로 부둥켜안고 사니 한없이 즐거웠다. 그런데 셋째가 태어나자 집 주인이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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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집을 고치시는 모습 ⓒ 은종복

그때 주인집은 많은 빚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집을 팔라고 했다.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주인은 내게 집을 팔았다. 나는 평생 모은 돈으로 쓰러져 가는 판자 집이지만 평생 처음으로 내 집을 가졌다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무허가 집이기에 새로 집을 짓지 않으면 나가라는 통보가 왔다. 정말이지 하늘이 노랗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무슨 돈이 있어 집을 새로 진다는 말인가. 이렇게 낙심하고 있으니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주었다.

마을금고에서는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내가 적은 돈이지만 알뜰히 살면서 저축을 하는 것을 보고 신용으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마을 동장은 건축하는데 필요한 모든 서류를 만들어주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나는 돈 한 푼 없이 판자 집을 허물고 그곳에 작지만 튼튼한 벽돌집을 지었다.

그 이후로도 억척으로 돈을 모았다. 남편은 초등학교 앞에서 풀빵 장사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500원씩 나를 갖다 주었다. 나는 그 돈을 고스란히 은행에 넣었다. 살림 할 돈은 내가 길거리 장사를 하며 벌었다. 셋째를 업고 아이들 둘을 데리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어느 날은 내가 남편이 일하는 곳이 궁금해 가보았다. 배가 하도 고파 풀빵을 하나 먹었더니 돈을 내라는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그렇게 성실하게 장사하는 남편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돈을 벌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큰 병치레 없이 잘 컸다. 셋째가 태어나고 5년 후에 막내가 태어났다. 그런데 막내의 몸이 안 좋았다. 두 살이 되도록 걷지를 못했고 말하는 것은 더욱 늦었다. 뇌성마비가 살짝 지나갔다.

의사 말에 따르면 수술을 하면 나아질 수 있는 확률은 반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막내를 치료하면 위로 세 명의 형은 제대로 키울 수가 없다. 치료해서 낫는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막내에게 큰 돈이 들어가는 치료는 하지 않고 이름 있는 스님의 말을 들어서 보약 몇 첩을 먹이고 말았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막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막내 것이라고 온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말해서 다짐을 받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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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를 나르시는 모습 ⓒ 은종복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스 회사에서 차를 닦는 일을 해서 한 달에 90만원 가까이 벌었다. 집에서 쉴 때도 동네에서 버리는 종이를 모아 내다 팔아서 한 달에 10만원 이상 모았다. 이렇게 평생을 안 쓰고 안 입고 제대로 안 먹으면서 돈을 모아 아들 네 명 모두 장가보내고 집을 모두 사주었다.

지금 큰 아들은 포천에서 직원들 20여명을 두고 경영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막내가 같이 일하고 있다. 둘째 셋째는 대학 앞 책방에서 같이 일한다. 모두들 어디 크게 아프지 않고 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엄마, 멀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밥을 다 먹은 셋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밥 다 먹었으면 병원에 가자. 오랜만에 우리 셋째 차를 타고 가볼까?”
“근데 엄마 꼭 장애인차 타야 돼? 내가 버스 카드 드릴 때니까, 그냥 일반 버스 타고 다녀?”
“애야 엄마는 10원도 큰돈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에서 나이 든 사람들 위해서 공짜로 타게 해주는데 왜 일반 버스를 타냐? 엄마는 그렇게 모아서 다 너희들 공부시킨 거야”

셋째는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냥 듣고 있었다. 셋째가 차 시동을 걸며 물어보았다.
“엄마는 언제 제일 행복했어?”
“나는 항상 행복하다. 우리 아들들이 못 먹고 못 입혔는데 이토록 다 잘 컸으니 행복하지 않겠니?”

나는 사실 행복하다. 내 나이 71살. 내 남편이 아직도 살아있고 아들 넷이 다들 가정을 꾸리고 다 화목하게 살고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남들은 내가 너무 공부를 하지 못해 한이 있을 거라고도 하지만 그런 것도 없다. 내가 못 배워서 못 하는 것이 뭐가 있는가.
이토록 은씨 집안에 들어와 적지만 내 집 장만하고 살고 있고 내가 키운 아들들이 모두 사회에서 제 몫을 하며 사는데 그것이 큰 보람 아니겠는가.

“그럼 엄마 소원이 뭐야?”
“엄마 소원은 죽어서 지하에 가더라도 우리 아들들이 잘 사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아들들이 원한다면 엄마는 죽어서도 너희들 뒷바라지를 해줄 것이다.”
지금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셋째 나이가 41살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런 마음이다. 내 아들들을 위해서라면 죽어서라도 아들들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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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들과 즐거운 한 때 ⓒ 은종복

덧붙이는 글 | 2005년 5월 2일 맑은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날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덧붙이는 글 2005년 5월 2일 맑은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날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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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앞에서 작은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을 2019년 6월 11일까지 26년 동안 꾸렸어요. 그 자리는 젊은 분들에게 물려 주었어요. 제주시 구좌읍 세화에 2019년 7월 25일 '제주풀무질' 이름으로 작은 인문사회과학 책방을 새로 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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