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족이 사카족이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⑨] 낙양 백마사에서 만난 금인(金人)

등록 2006.09.27 12:36수정 2006.10.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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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진 선생.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의 저자로 경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향토사학자다. 여행 출발 전 경주 유적을 안내하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셨다 ⓒ 오창학

"신라의 왕족은 만주와 중국을 지나 천산 너머에서 살던 사람들과 관련성이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알타이 지역과 천산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며, 천산의 동쪽과 알타이 지역은 유사이래 동서 인종의 충돌 지역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람과 문화가 넘어 오다가 기원후에는 동쪽의 사람과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 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라 왕족의 조상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산 동쪽으로 넘어온 유럽인종 중 일부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르도스를 지나 한동안 중국 동북 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최종적으로 평양과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온다." -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정형진 지음, 일빛, 2005)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천착하게 된 의문이었다.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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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비 ⓒ 오창학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조가 한(漢) 무제를 가장 측근에서 보필했던 '투후(秺侯)' 김일제(BC134~86)의 7세손 성한왕(星漢王)이라 적혀 있다. 김일제란 인물은 한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로 후에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았고 무제 사후에 '투후'라는 후작을 받은 이니 신라왕족이 흉노의 일파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기록은 모화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과 연관시키려한 공작이었을까? 아니면 진실을 기록해 놓은 것일까?

모화사상에 젖은 공작으로 보기엔 비의 주인공이 당나라와 대결하였던 문무왕이라는 점에서 납득이 안 되고 사실이라고 보기엔 내용이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천산 언저리의 흉노 일파가 동으로의 이주를 거듭해 결국 신라왕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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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박물관 마당의 서역 문양석. 경주 소재의 사찰에서 발견 ⓒ 오창학

그러나 신라 김씨 왕족이 집권했던 2~6세기 사이 신라가 채용한 적석목곽묘는 우리나라 삼국 중 유일한 양식으로 북방 스키타이와 관련이 있는 묘제라는 점. 이 시기 황금유물을 비롯한 북방초원문화의 상품들도 다량 유입되었고 서역의 문물들이 대거 발굴된다는 점이 문무왕비 내용을 무시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는다.

이외에도 고깔모자, 무덤에서 발굴되는 늑대 관식, 사슴뿔 모양의 왕관, 계림 김알지 설화를 반영하는 것 같은 페르시아의 구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주변문화를 차용한 것인지 주민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인지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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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괘릉. 그 앞을 지키는 서역 무인상의 존재가 흥미롭다 ⓒ 오창학

중국의 풍수지리가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왕릉도 평지에 조성했다.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괘릉은 연못을 메워 조성했기에 무덤방에 물이 차, 관을 천정에 매달았다고 해서 괘릉이다. 중국의 장묘문화와 비교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괘릉에 무인 석상은 왜 서역인일까? 단순히 신라에 들어와 있던 용감무쌍한 서역 용병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뿐인가?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깨지니 위 학설은 말이 안 된다고?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에서 온 아리안족 여인이니 김해 김씨와 허씨는 아리안족인가?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지장스님이 중국 유학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 왕인데 이미 불기(記: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인데 바로 이들이 한 무제에게 패한 휴도왕의 '흉노'족이다.

여기서 '사카족'이란 석가모니의 세속 인연 종족인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것. 이 사카족이 남하하여 인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천산을 넘어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종족이 바로 이들 천산 진출 사카족이라는 것. 그런데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많으니 이에 따르면 신라 이사금 이후 마립간 대부터의 신라왕족은 이들의 후예가 된다는 것. 이것이 위 책 저자의 주장이다.

기록에 의하면 휴도왕(休屠王)은 '금인제천(金人祭天)'을 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금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금인이 불상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렇게 해석하면 휴도왕이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었기에 '금인(金人)'이라 불린 불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데(<한서> 김일제전에도 휴도황이 금인제천하는 까닭에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찾은 백마사는 이 금인(金人)과 관련이 있는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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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사 전경. 송 대에 만들어진 두 마리 백마상이 서 있다 ⓒ 오창학

백마사(白馬寺: 바이마스)는 낙양의 동북쪽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후한의 명제(明帝)가 목덜미에 일륜(日輪)을 걸고 있는 금인(金人)을 꿈속에서 보고 난 뒤, 여러 신하들에게 그 꿈에 대해서 묻고 천축국에 사신을 보내 불법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Kasyapa Matainga), 축법란(竺法蘭:Dharmaratna) 등이 명제의 사신 채음(蔡愔)의 간청으로 불상·경전을 흰 말에 싣고 낙양에 들어왔으므로 후대에 절 이름을 백마사라 한 것. 이를 상징하듯 절 입구 양쪽에 송(宋)나라 때 만들어진 두 마리의 백마상이 서 있다.

AD 67년,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최초의 사찰이니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지만 현재의 건물은 명·청대에 중수된 것이고 그나마 관광지화 된 80년대 이후의 느낌이 많아 가람 자체에서 느끼는 고아한 맛이 덜하다. 어쩌면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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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사 승려들. 무언가 재미난 담소에 골몰해 있다 ⓒ 오창학

더구나 떼거지로 몰려서 벽에 등 기대고 검표하는 승려들(적어도 외양상으론 승려가 맞다)의 풀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찰에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과는 더욱 멀어진다.
중국이 '해방'된 49년부터 종교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한 80년대까지 근 30여 년 동안 종교가 없었던 나라인데 사찰이라는 건축물에 갑자기 신실한 종교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다.

여기 유적이 대개 청대의 건축물이라 해설하는 낙양 현지 가이드에게, 그럼 이곳이 문화혁명의 위기를 어찌 넘겼느냐 물으니 건물이 회의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란다. 참 짙게 드리운 문혁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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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대국답게 규모부터가 우리네와 다르다 ⓒ 오창학

대국기질이라 해야 하나 황제기질이라 해야 하나. 향의 격이 다르다. 두께 3Cm의 몽둥이만한 향이 아니면 일반 향 10여 개 이상의 모둠 향이다. 그러니 연기가 연막탄처럼 자욱하고 절집을 압도한다. 향로의 규모도 다르다. 말구유만한 철제함에 재가 그득할 때까지 태운다.

과거 자금성을 지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위압하고자 했던 그 황제기질이 상하이 푸동거리와 베이징 장안대가에 지어진 필요 이상의 고층건물들로 발현되고 있다고 할 때, 이 향로의 규모도 그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겠다. 중국 고사에 '중국인 개개인은 모두 순민이지만, 또한 모두가 황제다(中國人個個都是順民, 亦個個都是皇帝)'라 이르는 말이 빈소리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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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을 손으로 문질러 환부에 대면 그 부위가 낫는다 한다. 배앓이를 하던 자포님은 아예 몸을 맡긴다 ⓒ 오창학

향로 앞에 복숭아 모양의 돌상이 서 있는데 꼭지가 반들반들하다. 꼭지 부위를 손으로 만진 후 신체의 아픈 부위에 대면 병이 낫는다지. 이 설명을 듣고는 벌써 며칠째 배앓이를 하던 자포님이 아예 기둥을 껴안아 버린다. 믿고 기댈 대상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믿고 싶은 열망이 저 돌기둥을 존재하게 했으리라.

기복(祈福)에 관한한 한국인은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확실히 중국은 한 수 위다. 절집 곳곳에 복을 줄 수 있는 여러 장치를 안배하고 직접 현금을 모을 수단도 고려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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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人入夢白馬䭾經. 기둥에 한 명제 때의 창건배경을 새겨 놓았다 ⓒ 오창학

'금인이 꿈에 나타나 백마에 경전을 싣고 오다(金人入夢白馬䭾經)'를 옮겨 놓은 기둥이 보인다. 여기서 일륜을 걸고 있는 금인이란 바로 불상을 일컬음이다. 휴도왕의 '금인제천'을 불교의식으로 이해하는 바가 무리가 아님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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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에 닿았다. 적어도 오늘은 살아남았다 ⓒ 오창학

오후 6시 넘어 뤄양(洛陽)을 떠나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시안(西安)에 닿았다. 다시 한 번 도심의 어이없는 도로 상황에 절망한다. 사람과 자전거와 차량이 뒤엉키는 아비규환. 이를 카오스라 정의할 수 있을까.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 상황이 과연 이러할까. 아니, 아수라지옥이라 이르자. 피가 튀고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의 정경이 이러하리라.
끝없는 무단횡단과 끼어들기의 물결. 경적, 경적, 경적.

쿵. 기어이 택시 하나가 소형트럭의 꽁무니를 들이 박는다. 다행히 사람이 다칠 정도는 아니다.

낙양 벗어나며 작동되기 시작한 네비게이션 덕에 숙소 인근까지는 잘 왔는데 입력이 안 되어 있는 호텔인지라 택시를 앞세워 찾아냈다(도심에선 유용한 길 찾기 방법이다).

밤 11시 10분. 숙소 앞에 차를 대고 나니 몸이 후르르 무너진다. 야간 고속도로 주행의 위험과 도심 교통의 혼잡함 때문에 신체의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날을 세운 탓이다. 아… 오늘도 살아남았다.

중국 고속도로 야간 주행이 위험한 5가지 이유

1.고속도로에 가로등이 없다
오로지 차량의 전조등에 의지해야 하는데 상향등을 켜도 반사체가 드물어 가시거리가 짧다. 고속으로 주행하다보면 후미등을 켜지 않은 화물차의 등판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달랑 표지 하나로 차선 감소를 알리는 길에 접어든다.

2.노면상태가 불규칙하다
대개 2개의 차로가 있는데 갓길엔 화물차가 다니다보니 과적으로 인해 도로가 마구 울었다. 운전대가 휘둘릴 정도로 노면 상태가 좋지 않다.

3.고속도로에도 무단 횡단자가 있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발견치 못하면 무척 위험하다. 특히 야간에 중앙분리대쪽 화단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목격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심정 이해 못한다.

4.반대편 차량들이 상향등을 켜고 다닌다
중앙분리대가 빛을 가려주지 못해 이쪽 운전자의 시력을 일시적으로 뺏어간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무척 위험하다.

5.화물차들이 졸면서 운전한다
중국 고속도로에서 소형 화물차 구경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모두가 트레일러 크기에 짐을 몇 m씩 쌓아 움직이는데 보통 2000~3000km씩 움직이다보니 피로가 누적된 상태여서 졸음운전이 흔하다. 1차선으로 주행하고 있는데 2차선의 화물차가 졸음으로 1차선을 덮칠 땐 등골이 서늘하다. 고속도로 대형사고의 대부분은 화물차 졸음운전 때문이다. / 오창학

덧붙이는 글 | 2006년 7.14~8.21까지 중국 내 실크로드 구간 1만4000km를 국산 사륜구동 2대로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2 년여 가까이 계속해 오던 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의 연재마저 보류한 채 많은 시간을 이 여행의 준비에 매달렸고 결국은 실행에 옮겨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국 내에서 외국차가 운행하기까지 공안국이나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등 여러 부처의 승인을 얻고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경비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작년에 한중 간 자동차 여행 자유화를 위해 산동성 일부구간 시범 운행이 있었고, 향후 적용 지역을 전국 단위로 확대할 방침이라 하니 이 연재가 끝날 때쯤이면 자동차 여행이 훨씬 수월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모험과 역사, 그리고 대자연을 동경하여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자동차여행 포털사이트 ‘알브이라이프(http://www.rvlife.co.kr)’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2006년 7.14~8.21까지 중국 내 실크로드 구간 1만4000km를 국산 사륜구동 2대로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2 년여 가까이 계속해 오던 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의 연재마저 보류한 채 많은 시간을 이 여행의 준비에 매달렸고 결국은 실행에 옮겨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국 내에서 외국차가 운행하기까지 공안국이나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등 여러 부처의 승인을 얻고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경비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작년에 한중 간 자동차 여행 자유화를 위해 산동성 일부구간 시범 운행이 있었고, 향후 적용 지역을 전국 단위로 확대할 방침이라 하니 이 연재가 끝날 때쯤이면 자동차 여행이 훨씬 수월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모험과 역사, 그리고 대자연을 동경하여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자동차여행 포털사이트 ‘알브이라이프(http://www.rvlife.co.kr)’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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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이 기자의 최신기사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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