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와 수표는 가짜일 때만 알려진다

[인터뷰] 스페인어 전문 동시통역사 한원덕 교수

등록 2007.01.27 15:59수정 2007.07.0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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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카라과 정상회담에서 통역 중인 한 교수(왼쪽 뒤). ⓒ 청와대 브리핑 홈페이지

"물고기 이름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2002년 해양수산부 장관의 라틴아메리카 순방 당시 통역을 맡았던 스페인어 동시통역사 한원덕(42)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시통역대학원 한서과 교수의 말이다.

한원덕 교수는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부처 방한단 통역(1996),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국빈 방한 통역(1999), 비센테 폭스 케사다 멕시코 대통령 국빈 방한 통역(2001), 한·중미8개국 정상회담 동시통역, 최근에는 한·도미니카공화국 대통령 정상회담 통역(2005) 등 스페인어권 정상들의 방한 때마다 통역을 도맡았다. 이외에도 일일이 소개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외교회담과 국제회의 통역을 맡고 국가고시 출제위원도 지낸 스페인어 분야의 권위자다.

한국외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한 교수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국립마드리드대학에서 국비유학생으로 박사 학위를 마쳤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스페인어를 전혀 배워본 적이 없었다는 한 교수. 그러나 타고난 언어적 재능과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은 한 교수를 스페인어 통역사의 길로 인도했다.

"처음 정상회담 통역을 한 것은 1995년 카를로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였어요. 그때 너무 떨리고 긴장돼서 통역이 끝난 후 일주일 새에 5kg이 빠졌어요."

잘하지 못했던 부분이 자꾸 떠올랐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 교수는 잠시 아쉬움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통역사에게 필요한 능력, 달리기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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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방한한 구스타보 노보다 에콰도르 대통령과 함께. ⓒ 한원덕 교수 제공

통역은 긴장의 연속이다.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통역할 내용을 미리 준비해도,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나올 가능성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연사가 원고대로 읽지 않거나 발음이 부정확하다면 긴장의 강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통역을 30년 이상 한 통역사도 통역하기 전의 공포감이 예전보다 덜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 교수 역시 통역 전에는 늘 긴장한다고 한다.

"특히 동시통역의 경우 긴장감이 더 심해요. 들어보지 못한 발음이나 억양은 저를 매우 긴장하게 합니다. 또 미리 예상하는 내용 이외의 언급도 대처하기 어려운 점이죠."

그런 면에서 원고를 읽지 않고 웅변하기로 유명한 베네수엘라의 한 대통령은 한 교수의 진땀을 빼게 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저는 비서실에서 써 준 원고를 미리 받아서 읽어뒀는데, 이 분이 원고대로 읽지 않으시는 거예요. 거기다가 '프리드리히 니체'를 스페인어식으로 '페데리코'로 읽으셔서 진땀 뺐어요."

많은 청중 앞에서 곤혹스러워하며 통역했을 한 교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남미의 한 대통령께서 잠실체육관에서 연설할 일이 있었어요. 대통령의 차는 연설하는 단상 제일 가까운 곳에 서지요. 대통령이 순식간에 차에서 내려 연단으로 올라가는데, 제가 통역을 하는 부스는 한참 뒤에 있는 거예요. 연단에서 부스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어요. 5, 6천명이 들어가는 체육관이었으니까요. 차에서 내려서 부스로 뛰어가는데, 경비원들이 다 막아서면서 어디 가시냐고 물어서 일일이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나 빨리 통역하러 가야 된다'고 했죠."

이쯤 되면 통역사에게는 달리기 실력도 꼭 필요한 듯하다.

'통역사는 타야 할 차도 잘 잡아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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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 현 스페인 국왕과 악수하는 교수. 약간 굳은 표정에서 한 교수가 긴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한원덕 교수 제공

다음은 통역사 최정화씨가 쓴 <국제회의 통역사 되는 길>에 소개된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일화. 하루는 만찬이 끝나갈 무렵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헨리 키신저에게, 옆에 있던 여자 한 사람이 물었다.

"장관처럼 머리 좋으신 분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시나요?"

그러자 키신저가 대답했다.

"어떻게 하면 행렬을 놓치지 않고 제 자리가 배정된 차량에 재빨리 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외교회담이 끝나고 장소를 이동할 때 차를 잡아타는 일이 겉으로는 멋져보일지 몰라도 실제론 힘든 일임을 말해주는 일화다.

한원덕 교수 역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스페인 국왕께서 방한하셨을 때 신라호텔에서 나온 의전차량이 저를 태우지 않고 출발했어요.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는데 목적지는 국회였고, 차량 행렬이 지나가고 통제됐던 교통이 풀리면서 꽉 막힌 거리에서 앉아 있어야했죠. 택시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애 태웠는지 모릅니다."

한 교수가 부랴부랴 국회의사당에 도착했을 때, 행사는 다 끝났고 귀빈들은 행사장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국회 행사에서 한 교수가 맡은 순서가 없어서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한 교수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통역사의 요건으로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함을 전하는 일화다.

'통역사는 타야 할 차도 잘 잡아타야 한다'는 요건 말이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통역사는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서 통역해주거나 의자에 앉아있는 대통령 뒤에서 속삭이는 경우가 많다. 세계를 움직이는 정상들의 말을 가까이에서 전달하는 통역사 모습은 매우 멋져 보인다. 하지만 사람 일에 좋기만 한 건 없듯이, 힘든 점도 무척 많다.

"통역을 하게 되면 통역을 맡은 분과 그림자처럼 붙어있어야 돼요. 컨디션이 안 좋거나 생리적인 현상 때문에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도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면 난감해집니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초콜릿, 비스킷, 가그린, 기타 필요한 것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하고 현장에 도착하면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해 두기도 합니다."

초콜릿·비스킷 등 준비, 화장실 위치 파악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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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대통령과 노 대통령이 악수하는 자리 옆에 보이는 한 교수. ⓒ 청와대 브리핑 홈페이지

턱시도를 갖춰 입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화려해 보이는 만찬 통역. 하지만 일에 전념해야 하는 통역사는 식사도 제때에 하기 어렵다. 남들이 다 식사할 때 통역사는 통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 식사를 챙기는 것도 고객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식사를 챙겨먹지 못했어요. 하지만 배고픈 상태로 오래 있는 것도 집중을 필요로 하는 통역에 지장을 주더군요. 식사제공을 받더라도 못 먹을 정도로 식욕이 없어지기도 해서, 냄새가 적고 먹기 편하며 통역에 장애를 주지 않는 것으로 간단히 먹어요. 식사 제공이 되지 않는 자리에서는 사전에 좀 먹어두거나 샌드위치를 부탁해 이동 중에 먹기도 합니다."

또 통역사는 연사보다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국제회의에서 세계 정상들과 함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면 우쭐한 기분이 들 법도 하지만, 통역사가 나서는 건 금물이다. 통역사는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하고, 연사가 말을 할 때는 연사와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통역사는 통역을 맡은 인사와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의전에도 상당히 신경 써야 한다. 연사보다 말을 지나치게 크게 혹은 빨리 해도 연사의 품격에 손상이 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의상 또한 통역사가 신경 써야 할 부분. 드레스 코드가 있는지 물었다.

"튀지 않는 색을 입어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드레스 코드는 없어요. 저는 항상 남색 양복을 입어요. 저기 사진 보이시죠?"

한 교수는 연구실 한쪽에 있는,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과 악수하는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점잖고 무난한 양복을 입은 모습이다.

통역사는 통역을 맡은 인사의 사진 촬영에도 신경 써야 한다. VIP가 입을 여는 순간 통역사는 그 옆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통역하다 보면 그 외의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러다보면 VIP들만의 사진이 필요한 사진 기자들한테 "비켜주세요"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고 한다.

심지어는 "저 사람 뭐야"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단다. 한 교수는 "전문가라면 통역사가 나와서는 안 되는 자리, 예를 들어 두 분만의 사진이 필요한 장면을 구별해서 자리를 피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찬 등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때 통역사에게 개인적인 질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통역사들도 평소 만나보고 싶었던 인사들을 만나면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어질 법도 하다. "전 통역사입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할 뿐 그 이상의 사적인 관심이나 개인적인 대화는 절제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간혹 가족은 어떻게 되느냐, 어디서 그렇게 훌륭한 스페인어 실력을 쌓았느냐 등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주시면 기분도 아주 좋아지고 통역에 힘이 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통역사는 최고의 전문직이지만,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조연'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불만을 품은 일부 남자 통역사들은 '최고 대우를 받긴 하지만, 통역사를 그만큼 중요한 사람으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고객들도 있다'는 이유로 35세 전후에 전직을 많이 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우리나라는 상사와 부하직원이 있는 조직 사회 안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구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큰 게 사실"이라며 "통역이 개인적인 성격의 일이고 통역 업무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함을 요구해서인지 통역사가 거의 여성"이라고 말했다. "통역사로서 살아가는 데 여성보다 남성이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통역사와 수표는 가짜일 때만 세상에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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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의 코스타리카 국빈 방문 당시 한 교수의 통역을 듣고 있는 회의 참석자들. ⓒ 청와대 브리핑 홈페이지

'높은 분이 말씀하시는데 통역사가 너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결례다', '전문 통역사라면서 왜 자료를 미리 보여 달라고 하느냐, 자료 보면서 하면 아무나 다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지나치게 의전을 따지고 통역을 쉽게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연사가 자신이 발언한 후 통역이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리시버를 끼고 통역의 '품질'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고, 특히 회의를 준비하는 분들은 통역의 품질을 체크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고 "경험이 없을 때는 위축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답했다.

'통역사와 한 장의 수표는 가짜일 때만 세상에 알려진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통역사는 드러나지 않는 직업이다. 하지만 실은 드러나는 사람 못지않게 중요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또한 프로라는 자부심과 함께 통역을 잘 수행한 후 느끼는 보람도 크다.

3일 간의 방한 일정 동안 어느 곳에서도 연설문을 사용하지 않고 특유의 즉흥 연설로 한 교수를 애먹게 한 어떤 VIP는 한 교수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서울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산업시설을 둘러 본 후 그분과 김해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할 때였어요. 제가 서있는 사다리차가 전용기에서 떨어져 나올 때 '부엔 트라바호!'(Buen trabajo! 잘 해 줬어요!)라며 악수를 청해 오셔서 큰 보람을 느꼈어요."

전문통역사 한원덕 교수는 통역을 맡은 회의의 규모가 크든 작든 '최선의 대안'이 되기 위해 오늘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한원덕 #동시통역사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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