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잘린 비운의 오벨리스크

[내가 만난 아프리카 18] 제국주의가 탐낸 태양신의 상징

등록 2007.03.02 12:41수정 2007.07.05 14:33
0
원고료로 응원
a

이탈리아가 약탈했다 돌려준 오벨리스크 ⓒ 김성호

@BRI@악숨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시온의 성 메리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오벨리스크 유적지였다. 오벨리스크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쪽에 나무 기둥에 파란색 철판 지붕을 한 간이 건물이 보였다. 간이 건물 안에는 돌비석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탈리아가 지난 1937년 약탈해 로마시내 중심가에 세워놓았던 오벨리스크였다.

이탈리아 무솔리니 파시스트가 약탈해갔던 오벨리스크는 에티오피아의 끈질긴 노력 끝에 68년만인 지난 2005년 4월 러시아제 대형 화물기에 실려 되돌아왔다. 높이 25m에 무게 180t으로 애초 이곳에 세워졌던 6개의 오벨리스크 중 두 번째로 큰 것이었다. 이렇게 크다 보니 이탈리아에서 옮길 때 몸체를 3등분으로 나눠야 했다.

로마 오벨리스크로 불리는 이 오벨리스크는 사실 비운의 문화재이다. 이탈리아가 약탈해가기전 이미 16세기 이슬람세력의 공격으로 세 토막이 난 채 나뒹굴고 있었고, 1960년 로마 올림픽 때는 자신의 조국에서 온 마라톤 선수 아베베 비킬라가 뛰는 모습을 이국땅에서 지켜보아야 했고, 조국으로 돌아와서도 아직까지 제자리에 우뚝 솟아 있지 못하고 철제 울타리 안에 누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제 조임새로 온 몸이 묶여 있는 오벨리스크는 말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으면 문화재도 덩달아 수난을 받는다는 것을….

로마 오벨리스크가 애초 세워졌던 장소 근처에서 지하무덤이 발견되었고, 지반이 안전하지 못해 아직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70대의 할아버지 안내자는 "언제 다시 세울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며 "1700여 년 전에는 이 무거운 돌기둥을 어떻게 세웠는지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허리가 3등분으로 꺾인 채 누워있는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한번 훼손된 문화재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서구제국주의가 오벨리스크를 약탈해간 이유

a

오벨리스크 유적지 입구. 가운데 큰 돌기둥이 에자나 왕의 오벨리스크 ⓒ 김성호

에티오피아뿐 만아니라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도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 영국 런던의 템스 강과 이탈리아의 성 베드로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바로 이집트에서 빼앗아 간 것. 오벨리스크가 서방세계의 약탈대상이 된 것은 이 돌기둥의 태양신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돌기둥인 오벨리스크만큼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기 좋은 상징물은 없다. 그러나 남의 유물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려는 것은 제국주의의 위선일 뿐.

하나의 화강암 돌기둥을 깎아서 만든 오벨리스크는 이미 5천 년 전부터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등 북동아프리카에서 지배자의 무덤비석 겸 기념비로 세워졌다. 사각형의 모양으로 위로 올라 갈수록 피라미드 꼴인 오벨리스크는 고대인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결과물이다. 바벨탑처럼 하늘을 향해 거대한 돌기둥을 세움으로써 태양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코끼리와 굴림대 등을 이용해 세운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세계적으로 서구 제국주의가 약탈해간 문화재가 어찌 오벨리스크뿐이랴. 영국은 지난 1868년 에티오피아 막달라 요새를 공격해 양가죽 성경과 금관, 금으로 만든 십자가 등을 약탈해 갔으나 일부만 돌려주고 아직까지 대부분 대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대영박물관에는 이집트의 로제타석 뿐 아니라 수많은 파라오시대 유물,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 석판 등이 마치 자신들의 유물인양 버젓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나라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과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005년 10월 북관대첩비가 일본으로부터 반환되었으나 아직도 조선전기의 대표적 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등 수 만 점의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 정부가 파시즘 청산의 상징적 조치로 에티오피아에 오벨리스크를 반환했듯이, 서방선진국들도 제국주의 청산의 상징적 조치로 약탈해간 문화재를 원래 소유국으로 돌려줘야 할 것이다. 가장 반문명적인 문화재 약탈행위를 사과하고 돌려주지 않고서 '전 세계가 한 가족'이라는 세계화 시대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뚝 솟은 에자나 왕의 오벨리스크

a

흐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에자나 왕의 오벨리스크(앞) ⓒ 김성호

a

여러 조각으로 잘려 쓰러져 있는 가장 큰 오벨리스크 ⓒ 김성호

허리가 잘려 누워있는 로마 오벨리스크를 뒤로하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자, 비가 온 뒤 약간 흐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24m의 돌기둥이 있다. 가장 유명한 에자나 왕의 오벨리스크이다. 애초 6개 중에서 세 번째로 큰 것이지만, 현재 세워져 있는 것으로는 가장 높다.

이 오벨리스크는 아랫부분에 문과 문고리, 그 위에 둥그런 원형 조각과 사각형의 작은 창문들이 잇따라 새겨져 돌기둥 자체가 하나의 고층건물 형태의 문양을 품고 있다. 당시 석공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에자나 왕의 오벨리스크보다 조금 위쪽에 있는 엔다 이예수스 교회 정원에서 발견된 비석에서도 원반모양의 조각과 초승달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원형 문양과 초승달은 태양신의 상징이기 때문에 이들 오벨리스크는 유일신인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된 333년 이전인 3세기나 4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에자나 왕의 오벨리스크로 불리는 돌기둥도 에자나 왕이 333년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기 전에 세워졌거나 아니면 그 이전의 다른 왕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에자나 왕의 오벨리스크 옆에는 여러 조각이 난 채 쓰러진 커다란 오벨리스크가 그대로 누워 있다. 쓰러지기 전의 높이는 무려 33m. 애초 이곳에 세워진 6개의 오벨리스크 중 가장 큰 돌기둥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애초 세워졌다가 무너졌다는 의견과 세우는 과정에서 무너졌다는 의견이 학자들 사이에서도 엇갈리고 있다고 한다.

4면에 모두 새겨진 창문 등의 문양은 그 정교함과 섬세함이 뛰어나다. 단순한 돌기둥이 아니라 그 안에 여러 개의 조각품이 합쳐진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커다란 돌기둥이 허리가 잘린 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공룡의 멸종을 보는 듯도 하고, 찬란했던 악숨 왕국의 몰락을 보는 듯 했다. 이곳에는 커다란 오벨리스크 이외에 크고 작은 돌비석들이 120여개가 넘는다.

결국 도굴을 막지 못한 무덤

a

가짜 문의 무덤. 아래쪽이 무덤입구, 위쪽에 가짜 문과 문고리 ⓒ 김성호

a

가짜 문의 무덤의 내부 모습 ⓒ 김성호

가장 큰 오벨리스크 옆에는 커다란 돌로 된 네파스 마우차의 무덤이 있고, 맨 왼쪽에는 지난 1972년 발굴된 ‘가짜문의 무덤’(Tomb of the False Door)이라는 곳이 있다. 가짜문의 무덤은 3세기 때 지배자였던 람하이 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진짜 통로가 아닌, 땅위의 엉뚱한 돌 판에 오벨리스크에 새긴 것과 같은 모양의 가짜 문과 문고리를 새겨놓아 입구를 속이려고 했다. 가짜문의 무덤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무덤 안에는 대기실의 곁방과 안방이 있는데, 여러 곳이 절단된 돌 관이 놓여 있었다. 물론 부장품들은 오래전 도굴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가짜 문을 만들어 도둑의 눈을 속이려 했으나 도굴꾼을 막지는 못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엄청난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든 경우도 그렇고, 페르시아 왕국의 다리우스 1세 왕처럼 수십 m 높이의 낭떠러지 절벽 중간에 무덤을 만들었어도 도굴을 막지는 못했다. 아예 무덤 자체가 어디인지 모르게 매장작업에 참여했던 모든 인부들을 죽였다는 몽골의 칭기즈칸 무덤만이 예외라고 할까. 물론 칭기즈칸 무덤도 발굴을 해봐야 벌써 도굴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겠지만.

권력과 돈을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가려는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관속에서 도굴꾼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하다니 얼마나 불행한가. 태어날 때 알몸으로 나왔듯이 죽어서는 최소한 맨몸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평온한 사후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가짜문의 무덤은 보여주고 있었다.

오벨리스크 유적지를 둘러본 뒤 우리가 간 곳은 에자나 왕의 정원.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이 정원에는 에자나 왕의 비석과 같은 기념비가 철판 지붕의 둥근 건물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정원에는 작은 오벨리스크도 있고, 그 주위에는 예쁜 분홍 꽃들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악숨은 아직 유적의 98%가 발굴되지 않았다고 하니 도시 전체가 발굴되지 않은 지하 보물창고인 셈이다.

지역 노인들을 안내자로 쓰는 악숨 관광의 지혜

a

에자나 왕의 정원에 있는 기념비석 보관 장소 ⓒ 김성호

a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악숨 시내의 모습 ⓒ 김성호

악숨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안내자들이었다. 젊은 안내자는 거의 없고 칼렙 왕의 무덤과 에자나 왕의 기념비, 오벨리스크 공원 등 모두가 70대 이상의 나이든 노인이었다는 점이다. 이곳에 오래 살아 누구보다도 지역의 역사와 유적지의 전설을 잘 아는 노인들을 관광안내자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가 약간 서툴기는 해도 한결같이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노인 안내자들의 모습이 좋았고, 그들의 설명에는 삶의 경륜에서 배어 나오는 신뢰감이 더해졌다.

악숨 유적지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오후 6시 30분. 숙소 직원이 내일 아디스아바바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이 바뀌었다고 알려준다. 애초 오전 10시 50분 출발시간이 오전 9시로 앞당겨졌다는 것. 내가 이 숙소에 머무는 것을 에티오피아 항공사가 어떻게 알아서 비행기 시간변경을 알려주는 것일까 궁금했다.

숙소 직원에게 물으니 "항공사에서 비행시간이 변경되면 악숨 시내 주요 호텔에 전화를 해서 비행탑승 예정명단을 확인한 뒤에 서비스 차원에서 알려주는 것이 관행"이라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국내여객기는 기후 등으로 가끔 출발시간이 변경되거나 취소되기 때문에 외국여행객들이 주로 묵는 숙소에는 자동으로 스케줄 변경을 통보해주고 있는 것이다.

저녁은 숙소 근처의 현지인 식당으로 가서 전통음식인 인제라와 양고기를 먹었다. 양고기가 쫄깃쫄깃하니 꽤 맛이 있었다. 악숨의 레드와인도 시켰는데, 유럽의 큰 포도주 병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소주병 크기에 포도주가 나왔다. 당연히 병마개도 코르크마개가 아니라 소주병 뚜껑처럼 돌려서 따는 것이었고, 맛도 덜 숙성이 되었는지 약간 떫은맛이 났다. 저녁을 먹고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밤길을 손전등으로 비치며 숙소로 돌아왔다.
#에티오피아 #악숨 #오벨리스크 #가짜문의 무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