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명장' 관우가 서울 종로 한복판에?

[주장] 동묘를 동북아의 역사 유적 관광지로 개발하자

등록 2007.03.12 11:15수정 2007.07.0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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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 정문에 걸려있는 현판. ⓒ 김성남

서울 종로구 숭인동, 지하철 6호선 동묘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오면 동묘공원이 있다. 오래된 벽돌 담 둘레 주변거리는 노점상과 행인들로 매우 번잡하지만, 공원 안은 할아버지들이 한가롭게 한담하며 소주도 한잔 씩 나누는 모습이다.

이 동묘공원은 중국 촉한의 명장인 관우(關羽)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임진왜란 과정 중에 남은 중국식 건축물로 이곳에 봉양 되어있는 관제(關帝)는 중국 도교와 민간신앙의 신선으로 추앙받고 있는 관우이다. 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동한(東漢) 말기에 유비, 장비와 함께 병사를 일으켜 촉나라 건국에 기여한 1등 공신이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관우'

@BRI@그러면 관우는 왜 중국의 신으로 추대되어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가?

사실, 송나라 이전까지의 관우는 특별한 명성이 없었다. 그러다가 송나라 때 북방에서 여진족인 금나라의 세력이 크게 일어나면서 국난에 처하게 된 송나라는 이를 극복할 방안으로 관우를 '현열왕(顯烈王)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으로 봉하여 신격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원나라 말기에 출현한 장편소설 <삼국연의>는 관우의 명성을 크게 드높였다. 몽골족이 지배했던 원나라 말기, 정통 한족(漢族)인 유비의 촉나라 건국 과정을 그린 소설 <삼국연의>의 출현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약 스타가 된 관우는 원나라 멸망 이후 건국된 명나라에서 '협천호국충의제(協天護國忠義帝)', '삼계복마대제(三界伏魔大帝)'에 봉해지고 도교의 존중을 받는 신으로 추앙되게 이른다.

관우는 무장으로 '왕'이 되며, 또한 '대제(大帝)'의 위치로 격상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관우는 중국인들의 기복신앙에서 최고의 능력을 갖춘 신이 되었다. 군신(軍神)으로 숭배되던 관우가 기복 신앙화 하면서 재물신으로 변화되어 나간 것이다. 천하무적의 장군이라는 관우의 이미지는 적토마를 타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재물을 가져다주는 영험 있는 신으로 변신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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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 입구에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 김성남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참전했던 명나라는 군대의 보호신이라는 관우의 묘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은 도교를 숭상하지 않았고 관우를 보호신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명나라에서 이를 강력히 요구하자 조선은 관제묘(關帝廟)를 건립하게 된다.

이 공사를 하는 동안 왜란으로 황폐해진 국가재정과 백성들의 노역이 가중되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선조는 많은 비판들 속에서도 동묘의 건립에 찬성을 하는데, 이는 명나라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들이 관제를 영험이 있는 군신(軍神)으로 숭배하는 것을 보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관우를 무신(武神)으로 인정하려 했던 측면도 있었다.

조선에서 제일 처음에 세워진 관우묘는 남관왕묘(南關王廟)인데, 남대문 밖의 도동(桃洞)에 위치했다. 이 묘가 완성되자 명은 선조의 직접 참배를 요구하게 된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없었던 일이라고 거절을 하였지만, 명의 원조를 받고 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계속 거절할 수가 없어 선조가 직접 관왕묘에 나아가 분향재배의 의식을 행하였다.

이어서 명은 관우의 영험함을 주장하면서 또 다른 관제묘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이 친필로 쓴 현판을 보내오자, 선조는 1599년 새로운 관왕묘를 동대문 밖에 세우라고 명령하게 되었다. 이것이 1601년 완성된 현재의 동묘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단층 정자형(丁字形)의 기와지붕 건물이다. 정면보다 측면이 길어 안으로 깊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건축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본전의 평면이 앞뒤로 길쭉한 직사각형을 이룬 것이라든지 측면과 후면의 벽체를 벽돌로 쌓아 호화롭게 장식한 것 등은 중국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본전 내부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오른쪽에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의 동자상이 있으며, 왼쪽에는 황충의 상이 있다. 벽 쪽의 감실에는 유비를 가운데 두고 왼편에는 관운장, 오른쪽에는 조자룡이 안치되어 있다. 6·25 때 폭격을 맞아 정전 기둥 하나가 손상되어 교체된 것 외에 크게 개축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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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상은 목각 위에 금물을 입힌 것이며 황색 도포를 입고 있다.(왼쪽) 관운장 앞에 동자 둘이 서있는데 왼쪽은 옥쇄를 들고 있고 오른 쪽은 책을 들고 있다. (오른쪽) ⓒ 김성남

동묘가 건립되고부터 조선에 왔던 명의 사신들이 관제묘를 방문하여 참배하는 것은 일종의 관례였다.

중국인의 관제 숭배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조선 연행사신들의 중국 방문 기록들에서도 자주 보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천하 어디를 가나 관제묘가 있구나, 궁핍한 변방과 몇 가구에 불과한 작은 마을에도 아름다운 관제묘가 세워져있다
(關帝廟遍布天下, 旣使很窮的邊疆, 只有幾戶人家的小村庄, 也有建築很好的關帝廟宇)"는 글이 있다.

동묘의 특별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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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청룡도(왼쪽 사진)와 관우를 보위하고 있는 동자상. ⓒ 김성남

중국에서는 요즘도 관우를 그린 그림들이 시중에서 많이 판매되는데, 정월 초하루 춘절이 되면 이 관우 그림을 사서 벽에 붙여놓고 절하며 예를 올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을 살 때는 절대로 '사다(買)'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되고 '청하다(請)'라는 표현을 써야만 된다고 한다. 실수로 모르고 얼마에 샀다든가, 그림 한 장 사오라는 말을 했다가는 주변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게 된다. 관우의 그림을 사는 것이 아니고, 청해서 집안으로 모셔온다는 뜻이다.

중국에는 수를 헤아릴 수없이 많은 관제묘가 세워졌으며, 해외에 화교들이 살고 있는 곳에도 관제묘들은 빠짐없이 설립되어있다. 그러나 중국에 많은 관제묘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변천 속에서 중국정부의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과 관리 소홀로 많은 유적들이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어왔다.

특히 문화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이러한 기복신앙의 상징물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베이징에도 현재 관제묘가 십여 곳에 이르지만, 모두 청나라 이후에 재건축 된 것들이어서, 명나라시기에 세워진 진정한 관제묘는 볼 수가 없다.

동묘는 가장 오래된 역사뿐만이 아니라 완전한 원형의 형태로 보존된 관제묘라고 할 수 있어 그 문화재적 가치는 상당히 귀중한 것이다. 즉 관우 숭배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동묘를 방문하여야만 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관광객들에게 동묘는 상당한 매력을 주는 역사유적지가 될 것이며, 세계 각처에 흩어져있는 화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역사탐방 여행이 될 것이다.

동묘는 한중교류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이곳은 조선 말 갑신정변 시기, 조선에 출정했던 청나라 웬스카이(袁世凱) 군대의 병영지로도 이용되었으며, 고종황제가 일본군대를 피해 잠시 피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갑신정변, 청일전쟁 등 한국을 사이에 둔 중국과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곳을 의리의 화신이라 불리는 관우가 지키고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들은 특별히 관우를 좋아한다. 한·중·일 세 나라 모두에서 관우만큼 오랜 세월 인기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관우의 사당, 이곳 동묘가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볼 수 있는 유적지로 새로 태어날 수는 없을까? 동묘를 동북아의 역사 유적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제안한다.
#동묘 #관우 #중국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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