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두 해를 함께 살아준 아내에게

등록 2007.03.14 09:45수정 2007.03.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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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신혼여행 [경주에서] ⓒ 박철

명색이 시인이라고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이 10년 전 유럽여행을 갔을 때, 엽서를 보낸 이후로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질 보내자니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오.

올해는 우리 가정에 좋은 일이 있었구려. 큰 아들 아딧줄이 대학에 들어갔고, 부산에 이사 오면서 어머니를 시골에 두고 와 늘 마음이 걸렸었는데, 드디어 어머니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여 모셔오게 되었고, 은빈이와 넝쿨이도 건강하게 학교 잘 다니고 있으니 참 기쁘오.

오늘 결혼기념일을 맞아서 그동안 당신의 노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몇 남길까 하오. 언젠가 내가 활동하는 사진동호회에 당신 사진을 올리고 제목을 '우리 못난이'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댓글을 달기를,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투정부리는 거 아니냐고 합디다.

당신 못난 남편 만나서 22년 동안 고생이 많소. 교인들한테는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급한 성격에 그 걸 다 참고 소리 한 번 안 지르면서도 당신한테는 성질나는 대로 막 해대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싶소. 참으로 미안하오.

지나간 사진을 정리하면서 많은 걸 느끼게 되오. 필름을 스캔하면서 아이들의 순박한 웃음과 밝은 표정과 몸짓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오. 그리고 당신이 넝쿨이나 은빈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이나 안거나 업고 있는 장면을 보면 코끝이 찡합디다. 작은 체구에 애 셋을 낳아 젖을 먹여 키우고 지금도 짱짱하게 할 일 다 하고 사는 걸 보면 참 대단하오.

내가 아침산행을 하면서 '아내에게 잘하자, 성깔 좀 줄이자' 수백 번 곱씹으며 되 뇌여도 당신 앞에 서면 완전 자연인으로 돌아가니 아직도 수양이 덜 된 탓 아니겠소. 이제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니 나이 값하고 살도록 노력하겠소.

여보! 우리가 강원도 정선에 목회할 때가 제일 행복하지 않았나 싶소. 가난했지만 아무 욕심도 없이,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순수하게 작은 것에 감사하면서 살았던 때가 아니오. 그때를 생각하면 더욱 겸손하고 감사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오.

지금 우리 가족은 애들만 셋이고 넓은 집에서 교인들에게 대접받으며 호사하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무엇 있겠소. 내가 고약한 성질을 좀 줄이고 애들한테도 부드럽고 자애로운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되도록 노력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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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화개산에서. 우리 내외가 수백 번 올랐던 산이다. ⓒ 박철

시나브로 당신을 만나 결혼한 지 스물 두 해가 되었구려.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산처럼 쌓였소. 그동안 당신 고생 많았소. 은빈이가 오늘 아침, 내일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인데 "엄마한테 무슨 선물 할 거예요?" 하고 묻습디다. 은빈이 보기에 늘 고생만 하는 당신이 안쓰러웠나 보오.

그래 어떤 선물이 받고 싶소? 그러고 보니 지난 22년 동안 결혼기념일 선물을 한 번도 안 한 것 같소. 내가 너무 무심했소. 일단 내 마음부터 전하오. 사랑하오. 깊이 존경하오.

그리고 아래 시는 당신과 결혼 할 때 청첩장에, 장인어른이 가는 붓으로 써 준 것이오. 새삼 읽어보니 그때 마음이 절절해 지는 것 같소.

당신의 모습은
느낌으로 붙들 수밖에
삶은 당신이 꾸미는
나의 작은 나라입니다.
때로 절망하며
내 스스로 넘어질 때
당신의 힘을 빌려
어둡고 긴 날을 넘어 온 나
이제 당신은 내 핏속에 흐르고
나는 새날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가는 것입니다.

- 박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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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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