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하루만에 '조종사 착각' 규정
"인명은 재천, 모든 것 잊고 복귀하라"

[발굴탐사 ③] 제주 '봉황새 작전'의 비밀... 사건기록 단독 입수

등록 2007.03.16 11:39수정 2007.03.2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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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주>
[기사수정 : 17일 오후 1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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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준식 소령의 아내 최광선씨가 2차 장례가 치러진 뒤 남편의 묘역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자신을 경호하기 위한 이른바 '봉황새 작전'을 수행하다 53명의 군인들이 몰사한 '82년 C123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보고를 받은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인 첫 반응이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사건을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라고 규정했다.

<오마이뉴스>가 단독 입수한 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1982년 2월 7일 오후 2시 40분 제주 6해역사령부를 방문해 약 20여분간 구조작업관계 등을 보고받고 이같이 말했다. 사건발생 21시간 만의 일이다. 이 자료는 이번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25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당시 군 수색대는 82년 2월 6일 오후 5시경에야 처음으로 사고현장을 발견했다. 이들이 상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탐라계곡은 1100m 고지로 기상불량(진눈깨비)과 20㎝의 눈이 쌓여 조사활동이 불가능"했으며 "다음날(7일) 현지로 다시 출동해 조사를 벌일 예정"이었다.

시간을 역산하면 군 수색대가 사고현장에서 본격적인 수습을 시작한 지 7시간 만에 전 전 대통령이 '조종사 착각'으로 사고 원인을 못 박은 꼴이다.

사망자는 53명인데 찾아낸 주검은 총 90구?... 군 당국의 엉터리 조사

C123은 어떤 비행기?


한국공군이 운용한 기종은 C-123K(Provider)로 1973년 도입됐다.

총 22대가 공군의 주력 수송기로 부대이동 및 전개, 장비·물자 수송, 공중화물 투하 등에 활용됐으나 1994년 CN-235 중형수송기 도입 이후 완전 퇴역했다.

C123은 1949년 10월 14일 최초 비행했으며, 엔진은 P&W사 R-2800-99W 성형 피스톤 엔진×2기, 출력은 2300hp×2, 길이는 23.3m 폭은 33.5m 속도는 454km/h 항속거리는 4828㎞이다.

무게는 1만5800㎏이며 수송능력은 총 60명, 화물은 6800㎏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군 수색대는 82년 2월 7일 오전 8시부터 사고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사고는 이틀 전인 5일 오후 3시 15분경 발생했다.

이 수습 작업은 오후 5시까지 총 9시간동안 계속 됐다. 수색대원 104명이 작업에 동원됐고, 이들은 한라산 개미등 계곡 일대를 조사했다. 9시간의 수색 끝에 사고현장에서 총 37구의 사체를 찾았으며 이 가운데 20구는 신원이 확인됐으나 17구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이어 군 수색대는 이튿날인 8일 사망자 53명 가운데 찾지 못한 시신 16구를 모두 찾아냈다고 보고했다. 연이어 같은 날 오전 11시 55분에는 사고기체를 현장에서 2차례 폭파했으며, 오후 1시 5분에 사체 14구, 오후 3시 30분에 23구의 사체를 더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 의하면 82년 2월 7일과 8일 양일 사이 군 당국은 53구의 주검을 전원 찾아낸 것이 된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일단 계산이 안 맞는다. 사망자는 53명인데, 찾아낸 주검은 총 90구다. 숫자가 조작됐거나 사체의 일부분을 한 구로 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유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82년 5월 15일 '100일 위령제' 이후 한라산에서 찾아낸 '수습 안 된 주검'이 정부미 포대자루로 세 포대나 된다. 포대자루 속의 시신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군 당국은 유가족들이 찾아낸 이 시신더미를 제주 화장터에서 화장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뿌리는 등 2차 장례식을 올린 바 있다. 따라서 군이 작성한 이 문서에 거론된 '사망자 53명 전원 구조'는 거짓말일 공산이 크다. 군 당국이 정말 '전원 구조'했다면 82년 5월 시신더미는 그 자리에 없었어야 옳다.

실제 군 당국은 당시 시신 구조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군 당국은 "사고 장소 일대에 눈이 20㎝ 정도 쌓여있고 진눈깨비로 시계가 매우 불량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험준해 작업병력이 로프에 의지한 채 사체를 이동하고 있다"며 "완파된 기체 밑에 사체가 깔려 있어 구조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유족 이재수(58·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씨의 증언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이씨는 지난 13일 보도된 <오마이뉴스>의 "발굴탐사① 전두환 경호 가다 몰사 당한 53명…" 기사 인터뷰를 통해 "날씨가 춥고 기상도 안 좋은 상태에서 군인들도 힘드니까 사체를 제대로 수습하지 않고 대충 정부미 포대자루에 담아 땅에 묻고 끝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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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C123 공군 수송기 추락사고 이후 두번째로 진행된 장례식. 고 허창훈 상사의 아버지 허윤경씨가 유골함을 들고 장례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빨간 티셔츠의 여인은 고 천성목 상사의 아내 염영희씨. 염씨는 2004년 남편을 따라 세상을 등졌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전두환 "병사 사기진작 대책 강구, 모든 것 잊고 복귀하라"

당시 군 당국이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건에 대해 보고 받은 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라며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안타까워하시면서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고 말한 것으로 돼있다.

또한 전 전 대통령은 당시 박희도 특전사령관과 김두청 707대대장에게 "병사들의 사기진작 대책을 강구하고 대대장 책임 하에 15일간 6해역사의 협조로 제주도 취약지역 수색활동 등의 훈련을 실시한 후 모든 것을 잊고 복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전 전 대통령에게 "희생자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추서해 달라"고 건의한 것으로 돼 있다. 실제 봉황새 작전으로 희생된 53명의 장병 모두에게 정부는 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사고로 숨진 장병들이 속해있던 육군 쪽 인사들은 이 사고 이후에도 승승장구 했다는 사실이다.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까지 진급했고, 정만길 특전사령부 참모장도 국방대학원장(중장)을 지냈다. 또 사고를 당한 부대원들의 직속 지휘관이었던 김두청 707대대장도 대령으로 진급했다.

유가족들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희도·정만길·김두청 3인의 승진을 납득하기 어렵다. 무려 53명이나 되는 장병이 사망한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어야 옳았는데도 오히려 더 승승장구했다"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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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2·5유족친목회가 88년 12월 17일 이재형 국회의장 앞으로 보낸 국회 청원서. ⓒ 오마이뉴스 남소연

유족들 "진상규명 해달라" 청원... 눈감은 국회

82년 신군부의 위세 때문에 진실규명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던 유가족들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국회와 청와대를 찾아다니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88년 10월 14일 김운환 민주당 의원은 국회 건설위원회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사고 당시 당국은 군 작전 중 사고라고 발표했으나 사실은 대통령의 경호목적이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공군 수송기가 추락해 정예공수부대원들이 희생된 이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나섰으나, 그 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는 못했다.

김 의원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크지 않자 '특전사 2·5유족친목회(회장 고 이재훈)는 같은 해 12월 17일 당시 이재형 국회의장(민정당·7선 의원) 앞으로 청원서를 보냈다. 탄원 내용은 사체 유기와 진상규명 두 축으로 구성돼 있다. 청원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82년 2월 5일 전두환 대통령께서 제주도 년두 순시와 제주 국제공항 준공식 행사로 인해 특전사 요원 450명을 제주도에 투입하라는 명령과 이를 수송키 위해 군수송기를 이륙시키라는 명령이 청와대로부터 하명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눈도 많이 왔고 기후가 극히 악조건이었으므로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에서는 모든 비행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공수비행단에서도 C123 군 수송기로는 도저히 이륙할 수 없다는 의견을 두 번씩이나 보고했다.

그럼에도 청와대로부터 강력한 지시에 의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에 2월 5일 오후 3시에 이륙시켰으며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이러한 악조건을 알면서도 특전사 요원에게 락하산도 휴대시키지 않고 탑승시켜 전두환씨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죽게 만들었다."


유족들은 이 탄원서를 통해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군인은 죽어도 좋다는 '살인마 일당'을 철저히 규명해 처벌해 달라 ▲특수 목적으로 국가의 많은 재정을 투자해 양병한 군인을 대통령이라고 해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시켜 이 같은 비리사건이 단절되도록 조처해달라 ▲악조건의 기후임에도 자기의 출세를 위해 권력 앞에 충성을 아부해 위험 사실을 알고도 죽음의 길로 보낸 특전사령관 이하 책임자를 엄중 처벌해 달라고 주장했다.

사체 유기와 관련해서도 "82년 5월 15일 충혼비 제막식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원점비가 있는 사고현장에서 군복과 시계 등 많은 유물과 사체에 10여 마리의 까마귀와 쉬파리가 앉아 뜯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며 "구두를 신은 다리와 팔, 뼈와 살을 모아 장례를 한번 더 치렀어야 했다"고 고발했다.

이어 "2차 장례 뒤 비행기 잔해와 시체를 즉각 치워달라고 부탁했지만 높은 지대에 있다는 이유로 재폭파시켜 그 밑에 깔려 있던 유해는 산산조각이 났다"며 "머리가 터지고 골이 튀어 나온 것을 유족들이 손으로 파내 항공편으로 가져온 뒤 서울 공항동의 허윤경 유가족 집에서 염을 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또 "이 시신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려 했으나 국방부의 반대로 다시 제주도로 인도해 충혼비 뒤에 안치하고 3차 장례식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 부근에 마련된 특전사 C123기 추락사고 관련 충혼비 뒤편에는 시멘트로 마감된 흔적이 있다.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씨는 "겉에는 유물이 들어있다고 써있지만 실제로는 유골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검찰에 살인혐의로 전두환 고소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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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2·5유족친목회(회장 고 이재훈)가 89년 12월 서울지검에 제출한 고소장(왼쪽)과 비행기 사고 이후 유가족들이 시달린 피해현황 자료.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운환 의원의 폭로와 유족들의 청원에도 정부당국이 진상규명을 위한 절차에 돌입하지 않자, 유족회는 89년 12월 6일 서울지검에 전두환 대통령, 이희근 공군 참모총장, 주영복 국방장관, 박희도 특전사령관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와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허위작성공문서 행사 등을 죄목으로 고소했다.

고소장에서 이들은 "82년 2월 5일 새벽까지 눈이 내리고 2차 대전 때 사용하던 낡은 C123(최초 비행 1949년 10월 14일) 수송기가 이륙하기에는 너무나 악조건의 기후였다"며 "김포·김해·제주공항에서도 항공기가 이륙하지 못하는 상태여서 수원항공 통제국(제10전투비행단 운항관제대)에서도 통제가 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희도 특전사령관이 당시 부하들의 봉급에서 하사 7000원, 중사 이상 1만5000원, 장교 3만원씩 공제해 유가족과 상의하지 않고 충혼비와 원점비를 제작해 비문에 자신의 이름을 도용, 기재했다"며 "이것은 유가족과 영령들을 우롱한 행위이자 군인을 정치적 도구로 악용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유족회는 이 고소장의 마지막 부분에 "88년 11월부터 89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정부에 탄원했으나 아무도 일언반구 사과가 없었다"며 "법 앞에 호소하는 것은 온 국민 앞에 사실을 사실대로 파헤쳐서 민주주의 아래 인권과 생존권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독재정권 시절 빚어진 끔찍한 군 사고... 진상규명에 손놓은 정부

수사에 들어갔던 서울지검(담당검사 신광옥)은 수사에 3년이란 시간을 끈 끝에 92년 12월 26일자로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혐의 없음'을, 직권남용·허위공문서 작성·허위작성 공문서 행사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신광옥 검사(현 법무법인 다울 대표변호사)에게서 당시 검찰의 수사종결 결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자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유족들이 바랐던 이 끔찍한 비행기 사고의 진실규명은 결국 이뤄지지 않은 채 유족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89년 소송 당시 이들이 제출한 유가족 피해현황에 따르면, 박봉우(고 박진수 준위의 아버지)씨는 사고 당시 졸도해 척추장애로 7년간 병상에서 누워 있었다. 이밖에 다른 유족들도 고혈압이나 신경마비, 백혈병, 악성갑상선, 신경성위장병, 정신장애로 인한 빈혈증세, 좌골신경통, 정신이상, 신경통으로 인한 호흡장애와 속병, 신경쇠약, 뇌진탕 등을 호소했다.

사고가 발생한지 25년이 흐른 지금, 이미 많은 유가족들이 세상을 떠났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10년 전 만해도 어머니, 아버지들이 제주 사고현장을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원점비가 휑해질 만큼 인적이 드물다. 조릿대 등 잡풀을 정리하지 않아 원점비를 찾아가기조차 힘들다.

고 김영용 소령의 아내 김귀선(57)씨는 "잊혀진 사건이 다시 살아나 끔찍하지만 이제라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보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덧붙이는 글 | [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보도는 계속 됩니다.

덧붙이는 글 [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보도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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