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사령관, 작전명 바꾸라 명령
25년째 비문에도 '대침투 작전'으로

[발굴탐사④] 1982년 제주 '봉황새 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등록 2007.03.21 08:48수정 2007.03.2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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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제주로 먼저 떠난 53명의 군인들이 모두 사망한 이 사고는 역사 속에 묻혔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주>


"너무 답답했어요. 1982년 2월 7일 7787부대 휴게실에 있는데 무조건 기다리라고만 하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 설명도 안 해주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지요. 뭐라도 좀 알려면 어쩔 수 있나요?"

큰애는 세 살, 작은애는 갓 돌이었다. 1982년 2월 5일 저녁, 아이들 밥을 주고 있는데 TV뉴스에서 'C123 제주도 인근서 추락'이라는 단신이 자막으로 처리됐다. 남편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1982년 1월 15일부터 2월 1일까지 17일 동안 지속된 스키훈련 직후 남편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또 전두환 대통령을 경호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했다. 하지만 군인의 아내로서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쉼 없는 훈련의 연장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남편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 뒤로 남편은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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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에서 추락한 C-123 공군 수송기 잔해. ⓒ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 1] 1982년 2월 6일 서울 거여동 특전사령부

6일 아침부터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 위병소에서 군 당국의 구체적인 상황보고가 진행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유가족들이 의자를 걷어차며 울분을 터트리는 아비규환 속에서 애들 엄마로서 할 일은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 군 내부 서류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전두환 독재체제가 끝나면 최소한의 진실규명을 할 수 있는 '거리'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결심했다.

팔뚝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줄도 몰랐다.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까만 철로 묶인 상황일지를 들고 나올 때까지. 지난 14일 밤 서울 강남에서 만난 이영숙(가명)씨는 당시 부대에서 들고 나온 상황일지를 보는 순간, 참담함에 젖었다고 했다.

군대가 이 비행기사고의 원인규명과 현장조사에 앞장서기는커녕 도리어 작전명을 바꾸고 이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고 한 점이 소름끼쳤다. 군인 가족으로서 평생 군대와 함께 살기로 작정했는데, 철저하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군인들이 무려 53명이나 목숨을 잃었는데도 오로지 전두환의 안위만 걱정하는 군대에 치가 떨렸다. 이씨는 25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주스 컵을 잡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멧세지
발신 사령관 제1호
수신 707대대장
참조
제목 훈련명칭변경
내용 1.
금번 훈련은 동계특별훈련으로 호칭을 하니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기 바람
송 수신시각 08 : 45
1982년 2월 6일
확인자 계급 중사 성명 김○○ 인


1982년 2월 6일 아침 8시 45분,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이 김두청 707대대장 앞으로 보낸 '당일 첫 번째 메시지'다. 박 사령관은 이 메시지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의 경호를 위한 '봉황새작전'을 동계특별훈련으로 바꿔치기하고, 변경된 작전명을 전 장병들에게 주지시키라고 하달했다. 사고발생 직후, 박 사령관이 작전명을 바꾸라고 하명한 까닭은 뭘까.

그 전날(5일) 오후 1시 30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한 군수송기 C123이 실종된 지 17시간째.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머리를 박고 추락한 이 사고기체를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박 사령관은 작전명부터 바꾸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시라도 전원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진다면 전두환 대통령에게 누가 될지 모르는 '봉황새작전'은 아예 없었던 일로 처리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박 사령관은 1982년 2월 6일자로 사고기에 탑승했던 특전대원 가족들에게 긴급편지를 보내 위급한 상황을 전달하면서 '대침투작전 훈련 중 추락사고'를 당했다고 못 박았다.

봉황새작전이 군 내부는 물론 유족들에게까지 완벽하게 삭제된 상태로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25년 동안 제주 봉황새작전은 한국사회에서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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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 특전사령관은 1982년 2월 6일 오전 8시 45분 김두청 707대대장에게 훈련 명칭 변경 메시지를 보내,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침투작전'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박희도 "아드님의 거룩한 희생은 육군사에 길이 빛날 것"

박 사령관은 2월 6일자로 유족들에게 첫 번째 안내문을 보냈다. 박 사령관은 이 글에서 "우리는 귀댁 아드님과 함께 멸공 최일선에서 피땀 흘려 노력하여 국가와 민족보위의 숭고한 사명을 수행해왔다"며 "지난 2월 5일 불행하게도 대침투작전 훈련 출동 중 기상 불량으로 이상기류에 휘말려 제주도 지역에서 불의의 추락 사고를 당했다"고 밝혔다.

이어 "사고소식을 접한 즉시 수색구출대를 편성하여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생사를 알 길이 없다"며 "훌륭한 아드님의 평소 숭고하고도 거룩한 뜻에 따라 놀라움과 고통을 참으시고 일단 기다려주시면 추후 자세한 소식을 알려드리겠다"고 전했다.

또한 박 사령관은 1982년 2월 27일 특전사 유가족들에게 공문을 보내 "아드님과 남편께서 당하신 희생은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룩한 희생으로 그 높은 뜻과 함께 육군사에 길이 빛날 것"이라며 "뜨거운 조국애와 불타는 충성심으로 승화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활화산의 원동력이 될 것을 확신한다"고 추앙했다.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한 작전이었다는 말은 쏙 빼놓고, 대간첩침투작전이라고 훈련명칭까지 거짓말로 변경해놓은 박 사령관은 53명의 억울한 죽음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었다고 추켜세웠다.

심지어 제주도 한라산 사고현장에 세워진 원점비 비문에도 '대침투작전 훈련 중 이상기류로 군수송기가 추락, 장병 53명이 순직하였다'고 기록했고, 영령들을 기리는 충혼비 비문에도 마찬가지로 '대침투작전 훈련'이라는 거짓말을 음각해 넣었다. 군 당국은 25년째 '대침투작전'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제주 2·5 C123 추락사고'의 실체적 진실을 철저히 감춰왔다.

무엇보다 '제주 2·5 C123 공군수송기 추락사고'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유가족들은 25년째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사고조사보고를 전달받지 못하고 살았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은 가슴을 치며 의혹이 많은 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982년 2월 9일 군 당국이 마련한 장례식을 올릴 때까지 사고원인이 뭔지, 어떻게 하다 발생한 사고인지, 주검 수습은 제대로 됐는지, 사고현장은 정확히 어딘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군 당국은 무조건 유족들을 감시하기 바빴죠. 당시 장례식 사진을 꼼꼼히 보세요. 유족 1명당 군인 서넛이 달라붙어 꼼짝도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유골함도 만지지 못했어요. 먼발치에서 맥없이 바라볼 뿐이었죠.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겁니까."

"군대는 시신 세 포대와 함께 유족을 호텔에 감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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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5월 15일, C-123 공군수송기 추락 사고 현장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어지러이 널린 비행기 잔해 속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영숙씨는 25년 전 군 당국이 사고발생부터 현장수습, 사체처리 등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을 '대강' 처리했다고 비판했다. 군이 단 한 번도 사고원인규명, 현장수습, 사체처리 등 3대 사안에서 설득력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대가 우릴 바보 취급했습니다. 100일 위령제 직후 한라산에서 본 사고현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군대는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정부미 포대자루로 3포대의 시신더미를 찾은 유족들을 제주공항 근처 호텔에 1주일 동안 감금했습니다."

이씨의 증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1982년 5월 15일 100일 위령제 이후 한라산 사고현장에서 발견한 사체더미가 정부미 포대자루 1개가 아니라 3개였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온 것. 이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찾은 시신더미 세 포대자루를 유족들과 함께 끌고 내려와 서울로 올라올 생각이었으나, 당시 군인들의 방해공작으로 신제주의 한 호텔에서 시신더미와 한 방에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고 털어놓았다.

"비닐로 이중삼중 겹겹이 싸도 시신이 썩어가는 냄새는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유족들은 그 시신들과 함께 한 방에서 생활했죠. 몇몇 유족이 군인들과 합의해 제주 화장터에서 화장한 뒤에야 서울로 유해를 모셔올 수 있었지만, 그때 나는 이 시신더미를 앞세우고 서울 시내를 행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두환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분이 풀리지 않았고, 이 억눌린 분노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이씨는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해서야 맨발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디서 신발을 잃어버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세 꾸러미의 시신더미를 혹여 군인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그것만 목숨 걸고 지키느라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씨는 이 사고 후 5년 동안 '냄새 병'에 시달렸다. 우울증도 심각했고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흙이 핏덩어리와 뭉쳐져 있고, 사람의 살에도 고기와 똑같이 결이 있었으며, 유골은 사람들이 고기를 발라먹고 남은 모습과 똑같았다. 머리는 속이 빈 채로 가죽만 남아있는 형상이었다. 마치 17~18세기 북아메리카에서 유럽 이주민과 인디언이 벌인 전쟁에서 사상자의 머리가죽을 벗겨낸 것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사람이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참혹한 그 장면을 목격한 후 이씨는 한참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 못했다.

끔찍한 광경을 본 이씨는 남은 인생을 악으로 살았다고 했다. 청와대와 국회, 법원을 찾아다니면서 이 엄청난 사고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애원했지만 들어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차가운 사회적 외면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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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에서 3.7.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C-123 공군 수송기 사고 원점비 비문에는 당시 사고가 '대침투 작전' 중 벌어진 일이라고 쓰여 있다. ⓒ 오마이뉴스 김도균


25년째 연결되지 않은 등산로와 원점비... 조릿대만 무성

무엇보다 이씨는 군 당국이 약속한 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데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5월, 100일 위령제 이후 유가족들이 사체유기 등을 문제 삼으면서 현장정리를 요구하자 군 당국은 안내문을 보내 제대로 처리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은 육군 7787부대가 유족들에게 보낸 안내문의 일부다.

현장 최종 정리

"유족들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유족 전체를 대표하시는 1분과 저희 부대원 10명이 오는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제주도 현장에 내려가 최종정리 작업을 하고 추가 유해 발견 시 이를 현지에서 화장하여 이미 화장해 국립묘지에 봉안된 유해와 합동으로 충혼비에 안장해 안장식을 하는 한편 등산로와 원점비 사이의 통로를 개설함으로써 정리 작업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 약속도 결국은 거짓말이 됐다.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이재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군 당국은 1년 넘게 사고현장에 비행기를 방치해놨다고 했다. C123 군 수송기 추락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은 1982년 여름 제주 사고현장에 가서 기막힌 표정으로 잔해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기념촬영까지 했다. 군 당국은 폭발물이 터지면 위험하다고 현장접근을 막았지만 아내들은 차라리 죽는 게 영광이라며 제 발로 폭발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군 당국이 등산로와 원점비 사이의 통로를 개설하겠다는 것도 여전히 거짓말인 채로 남아있다.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지난 3월초에 찾아간 한라산 관음사 코스의 원점비는 여전히 길이 아닌 길로 한참 들어가 헤매야 찾을 수 있다.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통로는 개설돼 있지 않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씨가 원하는 바는 단 한 가지, 진실규명이다. 대간첩침투작전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한 '봉황새작전'으로 사건의 진실을 '원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비문도 당연히 교정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고현장에서 주검도 제대로 수습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진행된 1982년 2월 9일 '1차 장례식'이 가짜였다는 점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가짜 장례식에서 유족 사이사이에 군인들이 끼어 꼼짝할 수 없게 만들고 유골함조차 만지지 못하게 했던 점도 군대는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군대, 유족에게 사과해야...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도"

"1차 장례식이 열리던 1982년 2월 9일 오전 10시. 저는 영전 앞에 꽃 한 송이 못 올려놨습니다. 군인들이 양쪽에 딱 달라붙어서 우발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국립묘지 유골함이 빈 항아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시신을 묻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씨는 이제라도 전두환 정권 당시 벌어진 'C123 공군수송기 추락사고'의 비밀을 국가가 나서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정말 억울합니다. 전두환씨 한 명을 호위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정부 차원의 사과나 손해배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끔찍한 독재의 희생양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유족을 가두고 감금한 인권유린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서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이영숙씨는 남편의 죽음 이후 부대에서 인편으로 임관반지를 전달받았다. 남편의 동료들이 사고현장에서 찾아다준 반지는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숯검정이 돼버린 임관반지지만 여전히 블루 사파이어는 빛나고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씨는 남편의 임관반지를 탄 채로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시커먼 숯검정이 됐지만 블루 사파이어 반지는 이씨와 남편을 잇는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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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제주 2·5 유족회 회원들이 19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평화의 집'에 25년 만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25년이 지난 사건이지만 진상규명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 2] 2007년 3월 19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특전사 제주 2·5 유족회' 회원들이 25년 만에 다시 모였다. 경북 영천, 강원도 강릉·철원, 경기도 수원, 충남 대천 등 전국에서 '봉황새작전'으로 아들을 잃은 부모들이 다시 한 번 진상규명을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서울로 옮긴 것이다.

19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평화의 집'에 모인 유족들은 "우리는 이 비행기사고의 진실규명을 원한다"면서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경북 영천에서 새벽에 서울로 출발했다는 황상술(고 황용운 상사의 아버지)씨는 "25년 전부터 정부는 유족회가 보상금 몇 푼 더 받기 위해 청원을 내는 것이라고 비꼬았다"면서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 사고의 정확한 진실규명과 전두환 대통령, 박희도 특전사령관 등 사고 책임자 처벌과 진정한 사과"라고 강조했다.

신숙자(고 김영주 상사의 어머니)씨는 "나 죽으면 이제 정말 몇 집 안 남는다"면서 "부모 살았을 때 정부가 마지막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주름진 얼굴을 활짝 폈다.

1982년 2월 5일 제주 비행기 사고 당시 2살이던 고 천성목 상사의 딸 천옥경씨도 "아버지가 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제는 알고 싶다"며 "2004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진실을 알 길이 없었는데 정부당국이 진실규명에 나서준다면 유자녀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이 들 것 같다"고 당부했다.

국방부는 <오마이뉴스>에서 지난 15일 보낸 공식문서를 포함, 몇 차례 이 사고와 관련된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공식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한편 '특전사 제주 2·5 유족회'는 26일 오후 2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이 사고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직권조사를 요청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기사는 총 4부로 마감합니다. 이영숙씨의 개인사정으로 실명을 밝히지 않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총 4부에 걸친 긴 기획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기사는 총 4부로 마감합니다. 이영숙씨의 개인사정으로 실명을 밝히지 않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총 4부에 걸친 긴 기획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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