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이나 전경에게 붙잡힐 뻔하다

[나의 6월 이야기] 당시 검정고시생이었던 나의 시위 체험담

등록 2007.03.22 09:27수정 2007.07.0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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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본인이 2006년 5월 18일부터 7월 18일까지 두 달간 안성시청 앞 로터리에서 안성신도시 개발로 인해 쫓겨날 소수의 현지인들의 생존보장을 요구하며 일인 삭발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 송상호

내 나이 19세(만 18세) 시절, 6월의 부산은 뜨거웠다. 고졸 검정고시를 마지막으로 패스하기 위해 한창 공부 중이었던 나에게 거리에서 들려왔던 함성소리는 젊은 피로서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고, 민주화 투쟁 교육을 따로 받은 적도 없는 나였지만, 직간접적으로 접한 정보와 굳센 심지로 판단했을 때 확실히 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5·18광주항쟁에서의 만행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처사라는 게 감지되었다.

그래서 거리로 나섰다. 최루탄이 무수히 날리던 부산의 서면, 중앙동, 남포동 등의 거리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목 놓아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이 밖에도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부르던 투쟁 가요들을 그때 많이 따라 불렀다. 마치 대학생이 된 것처럼 말이다. 돌을 들고 투석을 할 때도 같이 돌을 날리기도 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던 구호는 이랬다.

"독재타도, 독재타도, 독재타도."
"독재정권 몰아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


독재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두환 정권이 얼마만큼의 독재를 자행했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목이 터져라 외쳐 댔다. 하여튼 조그만 내 가슴에서도 그들의 불의는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수천 수만의 시위대가 여름 무더위를 잊지 못하고 아스팔트에 앉아 있을 때면 일반 시민들이 음료수랑 빵이랑 물을 사다 날랐다. 도달한 음식들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음식들이 오면 다함께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난리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한 번은 연산동에서 서면으로 넘어가는 넓은 고가도로(당시는 '오바 브리지'라고 표현 함)에서 봉변을 당할 뻔 했다. 시위대가 연산동에서 서면으로 진출하려고 열을 맞춰 뛰어가고 있을 때 정면과 뒤에서 전경 수백 명이 우리를 포위했다.

점점 더 포위망이 좁혀오는 바로 그때



시위대는 안 잡히려고 전경 사이를 뛰어 나갔다. 마치 그 꼴이 그물로 몰아가는 고기잡이들의 몰이를 피해 달아나는 물고기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의 형태였다. 앞뒤로 포위하니 재간이 없었다.

나도 그 틈에 있었으니 가히 위기 촉발의 상태였다고나 할까. 조금씩 포위망이 좁혀지고 시위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무더기로 막 잡혀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전경이 더 다가오면 나도 잡힐 것은 분명했다.

점점 더 포위망이 좁혀오는 바로 그때, 나에게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 아직 검정고시 학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지 않은 상태라 학생용 가방을 들고 있던 걸 이용했다. 시위 참가자가 아니라 막 공부를 끝내고 거리에 나온 시위구경꾼 학생인 것처럼 행동했다. 다행히도 내 주위엔 시위를 구경하러 나온 일반 시민들도 조금 있었기에 나의 위장(?)은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경에게 잡힐 뻔한 한 번의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며칠이 지난 날,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그날도 학원의 공부를 끝내고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젠 시위하는 인원이 훨씬 많아진 듯했다. 날이 갈수록 일반 시민들도 많이 참가 한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시위의 물결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얼마나 인파가 많은지 보려고 육교 위를 올라갔던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그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모인 인파가 그 끝이 안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타도'를 외쳐 댔으니 그 소리가 가히 장난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경찰 쪽에서도 비상이 걸린 듯했다. 우리 시위대가 이제 부산역 광장에 모여서 외쳐댈 즈음 전경의 '닭장차'가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버스의 숫자가 갈수록 점점 늘어만 갔다. 우리는 결의를 다지는 구호와 노래를 불러댔지만 점점 늘어가는 '닭장차'를 보며 불안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몇 개 중대가 투입되었는지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시위대의 숫자도 점점 줄기 시작했다. 일반 시민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열혈 청년들만 남았던 것이다.

그렇게 수천의 경찰들이 우리에게 다가오자 우리들은 부산역 대합실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구식 출입문들이기에 대합실로 대피한 시위대는 문을 꽁꽁 걸어 잠갔다.

그 와중에서도 결코 구호나 노래의 소리가 식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는 더 커지고 더 굳세어져갔다. 구식 문이라 허술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전경들과 우리는 대치하게 이른 것이다. 두껍지 않은 유리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신경전이 계속 되었다.

"문을 모두 꼭꼭 잠가요. 그리고 꼭 붙들어요."
"앗 여기다. 문이 열렸다."

그랬다. 전경이 힘으로 밀어붙여 유리문 한 쪽을 열었던 게다. 한 쪽 문이 열리니 모든 문이 순식간에 열렸다. 시위대는 우왕좌왕 하게 되고 전경들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시위대의 청년들을 잡아채기 시작했다.

열차 화장실에 숨다

이제 우리들이 살아나갈 길은 기차들이 주차해 있는 선로로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나도 주차해 있는 열차 칸으로 냅다 뛰었다. 열차 십 수 량이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칸에 뛰어 올랐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문을 열고 몸을 숨겼다.

겨우 숨을 고르고 보니 내가 택한 곳은 열차 화장실이었다. 차창 밖으로 살그머니 내다보니 시위대 청년들이 하나둘 연행되어 가고 있었고, 전경들이 열차 칸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나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차마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이거 큰 일 났구나. 이렇게 잡히면 어떡하지. 나는 대학교 학생증도 없는 학생인데. 신분이 뚜렷하지도 않은 학생이라 만일 잡히면 고문 받지 않을까. 고문 받다가 간첩으로 오인 받지는 않을까. 이걸 어쩌나.'

그 좁은 화장실에서 혼자 웅크리고 앉아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무렵 화장실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꼼짝없이 잡히는 꼴이 되었구나.'

나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볼 일을 한참 보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여기 화장실에서 똥 누고 있어요. 기다리세요."

참 웃기는 말이었지만, 그 당시엔 결코 웃을 수 없는 나의 위기 대처법이었다. 그런데 화장실 문 바깥 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상했다. 그렇다고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숨죽이고 있으려니 바깥에서 또 한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경들 다 갔으니 나와요"라는 말과 함께.

그 말에 대해 반신반의 했지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드디어 문을 열고 나왔다. 내 앞에 전경들이 서 있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웬 아저씨들이 서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우편 열차의 역무원들이었다. 내가 탄 열차가 바로 우편을 실어 나르는 열차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옥 같은 30여분을 보내고 땀이 흠뻑 젖은 채 밖으로 나오는 내 모습을 보는 아저씨들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겁이 나면서 뭐하려고 그런 짓을 하느냐고 질문까지 던져왔지만, 나는 제대로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그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하고 열차 칸을 빠져 나왔다. 부산역 대합실엔 아직 전경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차마 대합실 쪽으로는 가지 못하고 기차선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서 집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이렇게 경찰에게 연행될 두 번의 기회(?)를 놓쳤던 게다.

그러고도 며칠을 정신없이 따라 다니다보니 TV와 라디오 등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연설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환호를 했다. 각종 식당과 서비스 직종에선 그날 하루를 기뻐하며 공짜 퍼레이드를 벌였다. 사람들은 흡사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듯 기뻐하며 흥분의 도가니에 도시 전체가 휩싸여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일 그때 내가 경찰에게 잡혀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부질없는 질문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여튼 19세의 철부지 청소년에겐 대단한 경험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때 행적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나만의 인생 이력서에 뚜렷이 기록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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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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