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 그 청년은 '억'하고 죽었다

[87년 6월민주항쟁의 진실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록 2007.03.26 15:43수정 2007.03.2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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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 도중 사망한 509호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7년 1월 15일 오전 <중앙일보> 검찰청 출입기자 신성호는 늘 그랬듯이 검찰 간부들의 방을 순회하고 있었다. 어느 간부 방을 지나던 중 우연히 "경찰 참 큰일났어!"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때부터 숨가쁜 취재와 피말리는 신경전이 이어졌고, 끝내 신문에는 2단짜리 기사 하나가 실렸다.

"14일 상오 11시 20분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수사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박종철군(21세, 언어학과 3년)이 조사도중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발표했으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보도지침'이 엄존하던 전두환 정권의 한가운데 기사 하나 쓰고 싣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던 시절, 박종철의 이름과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던 순간이었다. 보도가 나가자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16일 오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월 14일 오전…(중략)…10시 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음."

이 중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세간에 비웃음과 분노를 자아내는 유행어가 되었고, 아직도 사건을 상징적으로 전해주는 상징적 구절로 남아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이보다 앞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은 간호사와 함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불려갔다. 동행한 수사관은 "꼭 살려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5층 9호 조사실. 욕조와 세면대, 양변기와 침대까지 있었던 조사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7~8명 되는 수사관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대고, 어떤 이는 누워있는 한 청년에게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숨져 있었다.

조사관들은 "살려낼 길이 없겠느냐"며 계속 허둥댔다. 기관지에 튜브를 넣고 인공호흡을 시킨 데 이어 캠플 주사를 놓고 30분 동안이나 심장 마사지를 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청년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수사관들의 요청으로 그 청년을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응급실로 후송했지만 '죽은 사람은 받을 수 없다'는 병원의 규정에 따라 시신은 경찰병원 영안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17일자 <동아일보>에는 "대공분실 조사실에 들어갔을 때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고,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는 오연상의 증언이 실렸다. "복부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는 내용도 있었다.

오연상은 사실만을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물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다만 경찰만이 애써 이 사실을 숨기려 할 뿐이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경찰은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얼이 빠져 있는 아버지를 회유·협박하여 박종철 군의 시신을 화장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검찰의 지휘로 15일 저녁 9시에 한양대병원에서 시신부검이 이루어졌다.

부검에는 부검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학과장 황적준 박사 외에 안상수 검사, 한양대병원의 박동호 교수, 그리고 가족으로 삼촌 박월길씨가 입회했다.

황 박사와 박 교수의 의견과 뒷날의 증언이 이 사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데,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경찰 측은 부검 감정서에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협박과 회유를 서슴지 않았다.

박동호 교수와 박월길씨는 자신이 듣고 본 것을 언론에 증언했다. <동아일보> 1월 16일자는 이를 인용해 "숨진 박군은 머리에 피하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십 군데 멍자국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각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고문의혹을 제기했다.

박종철군의 시신은 16일 오전에 벽제로 옮겨져 9시 10분에 화장되었다. 임진강 지류에서 잿빛 유골을 샛강 위로 뿌리면서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하고 허공에 외쳤다는 아버지 박정기씨의 말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당국으로서도 더 이상 고문사실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진상규명, 그리고 경찰관 '연행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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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오후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는 '박종철 열사 49재 20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박 열사의 극락왕생을 바라며 천도재와 살풀이 공연 등이 열렸다. ⓒ 오마이뉴스 이민정

전두환 정권의 고위 관계자들이 1월 17일 이른바 '관계기관 대책회의'라는 것을 열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된 것은 '경찰로 하여금 자체조사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사건 조작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결정이었지만, 아직도 당시 대책회의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참석자들의 반성과 사과·양심고백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18일, 경찰은 자체조사에 들어갔고, 요식적인 절차를 거쳐 '희생양으로 준비된' 두 명의 수사관이 물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조사를 마무리지었다. 재조사 요원들은 이미 상부로부터 "조한경 경위 등 2명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경찰 상층부가 이미 조작은폐 사실을 알고 그렇게 지시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조작에 깊숙이 개입했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이다.

19일, 치안본부장은 "이번 사건은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의욕 때문에 빚어졌다"는 말과 함께 자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날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은 해임되었고, 두 경찰관은 연행되었다.

그 날 저녁 9시 40분경 경찰관을 연행하기 위해 나타난 두 대의 미니버스 안에는 경찰 20여 명이 똑같은 점퍼를 입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얼굴을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쇼'였다. 그러나 이 기상천외의 호송작전으로 국민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고,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우리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20일 낮 1시 40분,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는 박종철 군의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방학 중인데도 1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조속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언어학과 학생들의 추도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가 낭독될 때는 누구도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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