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아!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87년 6월민주항쟁의 진실②] 범국민적 규탄과 저항의 불길

등록 2007.03.27 11:47수정 2007.03.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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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연이은 언론의 의혹 보도와 국민의 분노가 높아가고 있던 즈음인 22일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사건이 터졌다. 11명의 일가족이 청진호를 타고 북한을 탈출, 엔진고장으로 표류하다가 일본에 도착했고, '따뜻한 남쪽나라'인 한국행을 희망했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신속한 개입으로 오키나와와 대만을 거쳐 2월 8일 오후 10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언론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전두환 정권도 은근히 그런 방향으로 나가기를 바라며 그런 분위기를 조성했다. 김만철 사건으로 박종철 사건이 언론에서 한때 묻히자 항간에는 "종철이가 종을 치니 만철이가 그만치라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박종철 군의 죽음은 결코 묻히거나 잊혀지지 않고 계속 불타오르고 있었다.

박종철의 죽음 앞에 맨 먼저 분노한 사람들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어머니들이었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던 16일 오후 어머니들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사건현장 앞으로 몰려가 통곡하며 외쳤다. "우리의 아들 박종철을 살려내라!" "살인수사 사주하는 군사독재 몰아내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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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각층에서 박종철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과 집회 등이 잇달았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동안 일체 정치, 사회적 현안에 침묵을 지키던 대한변호사협회도 19일, 강력한 성명을 채택, 발표했다. 같은 날, 개신교의 원로격인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도 정권당국을 질타하면서 "국민 여러분 밖에 이 나라를 바로 잡을 힘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요, 그것을 바로 쓰는 데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고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고 나섰다.

이러한 호소에 호응한다는 듯이 함석헌, 홍남순, 김영삼, 김대중 등 전국 각계대표 9782명으로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준비위원회 측은 2월 7일 범국민추도회를 갖기로 했다. 이와 함께 각계각층에서 성명과 호소가 뒤따르고, 기도회가 연이어 열렸다. 1월 26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 근절을 위한 인권회복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강론을 통해 박종철 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전두환 정권을 통렬하게 질타했다.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니 "탁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 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하고 잡아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2월 3일 한신대학교 교수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고, 서울대 교수 1백여 명은 2월 5일 밤 박종철 군에 대한 추도의사의 표시로 밤 9시까지 퇴근하지 않고 각자 연구실에 있다가 귀가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학, 재야,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일반 시민들까지 규탄과 저항의 길로 모여 들었다.

2월 7일 오후 2시 정각 명동성당에서 박종철의 나이와 같은 21번의 종이 울렸다. 범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의 행동지침에 따라 수백 대의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고, 수많은 시민들이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같이 불렀다. 이날은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부산, 대전, 광주, 마산, 전주 등에서도 추도시위가 벌어졌고, 전국에서 연행된 사람만 768명이나 되었다. 이제 범국민적 규탄과 저항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으리만치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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