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13호헌조치, 중산층도 돌아서다

[87년 6월민주항쟁의 진실 ③] 4ㆍ13호헌조처는 '적반하장'

등록 2007.03.28 16:55수정 2007.03.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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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12일, '2․12 총선 1주년 기념식'에서 김영삼은 전격적으로 '1천만개헌서명운동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민주제 개헌운동에 불을 지폈다. 사회 각계각층과 재야 민주화세력도 동조하며 1986년 봄은 개헌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민당에 의해 점화된 개헌 서명운동은 부산을 시발로 광주, 대구를 거치며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북상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개헌 논의 허용과 '선 민주화 실천, 후 내각제 협상'이란 이른바 이민우 파동을 거치면서 신민당은 걷잡을 수 없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런 가운데 김영삼과 김대중은 분당을 결심했고, 1987년 4월 8일 오전 9시 서울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 분당선언과 함께 새로운 신당의 창당을 선언했다. 4월 13일 오전,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 5백여 명의 정치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강경한 야당의 출범에 따라 임기 중 내각제 합의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전두환은 이날 특별담화를 통해 '현행 헌법에 따른 정부이양'이라는 '중대결단'을 선언했다. '임기 내 개헌' 약속이 돌연 '개헌불가'로 뒤집힌 것이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체육관 선거로 다시 군사정권을 연장하겠다는 전두환의 선언에 국민들은 경악했고 또 절망했다. 마침 4월 14일 부활절을 맞아 발표된 김수환 추기경의 부활 메시지는 "태양이 구름을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진 않더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괼른 땅의 군사용 지하동굴에 새겨져 있던 시를 인용하면서 국민의 절망과 저항을 그려냈다.

4․13호헌조치에 대해 민주화운동 단체들도 즉각 대응하고 나섰다. 대학교수를 비롯하여 종교․문화․여성 등 사회단체 회원들의 성명도 뒤를 따랐다. 치안당국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각계의 시국성명 서명자는 6월 25일 현재 48개 대학의 교수 1510명, 34개 사회단체 회원 4136명으로 모두 5246명에 이르렀다. 사회단체의 구성은 전․현직 국회의원, 변호사, 목사, 영화․연극인, 가수, 미술인, 의사, 약사, 한의사, 음악인, 문인, 간호사, 초․중․고 교사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있었다.

4․13호헌조치 이후인 5월 중순 한국 중산층 1043명을 대상으로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조사, 발표한 의식조사 결과는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준다. '경제성장을 늦추더라도 인권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85.7%, '민주화가 잘 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은 불과 6%, '헌법에 저항권을 명시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무려 96%나 되었다. 이 조사결과는 한국의 중산층이 전두환 정권에 무척 화가 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는 전두환 정권에 방관자적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국민으로부터의 엄청난 역풍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돌멩이도 일어나 외칠 지경이었다. 누군가 불씨만 던지면 온 나라를 저항의 불길로 뒤덮어 버릴 사회적 폭발력이 커져만 갔다. 서슬 퍼런 시절의 한복판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이제 그 불씨를 던지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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