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3120자의 성명서

[87년 6월민주항쟁의 진실 ④]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은 어떻게 알려졌나

등록 2007.03.30 17:58수정 2007.03.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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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해 1월 고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비롯했습니다. 당시 수배 상태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 사람은 문민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정남씨였습니다. 그가 지난 1월 펴낸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의 주요 내용을 발췌, 나눠 게재함으로써 6월항쟁의 의미를 다시 새겨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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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촉발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이 컸다. 사진은 6월항쟁 당시 부산교구의 시위 모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다.

1.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2.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해 짜여지고 또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3. 사건의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고문치사사건 직후 직위해제되었다가 4월 8일 버젓이 복직한 … 등이다.
4. 검찰은 위와 같은 사건조작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밝히지 않고 있다.
5. 이 사건 및 범인의 조작 책임은 현 정권 전체에 있다.
6.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치사사건은 처음부터 그 진상이 다시 규명되어야 하며, 진상조사 활동에 방해나 탄압이 없어야 한다.
7.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에 대한 재판은 공개되어야 하며, … 그 두 사람에 대한 신변의 위험과 보복이 없어야 한다.
8. 이 사건 조작에 개입한 모든 사람은 처벌되어야 한다.
9.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살인 행위의 범죄와 범인이 조작되어 어떠한 사람이 억울하게 천추의 한을 안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10. 박종철군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하며 그 진실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11. 이 사건 범인조작의 진실이 박종철군의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1987년 5월 18일 오후 6시 30분에 열린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의 강론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절절한 목소리로 1980년 광주의 아픔과 박종철군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어서 2부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조작되었다'는 3120자의 충격적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바로 이 성명이 세상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폭풍이었다.

1986년 수배 중이던 이부영을 숨겨주고 도피자금을 마련해 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나는 11월부터 수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7년 3월, 기적적으로 만난 전병용으로부터 이부영이 보낸 편지 3통을 한꺼번에 받았다. 당시 전병용 역시 수배를 받고 있던 상태였는데, 편지를 전달하고 이틀 뒤 체포되었다. 그 편지가 전달된 것은 천우신조였다.

1987년 1월 18일, 영등포교도소 격리사동에 갇혀 있던 이부영은 간밤에 들어 온 두 명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관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들 고문 경찰관은 이부영이 수감된 0.72평의 작은 방과 달리 4평이 넘는 큰 방에 따로따로 수감되었다.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 억울하다는 말을 했고, 이내 가족 면회가 금지되었다는 말이 들렸다. 곧이어 대공수사단 간부진들이 찾아와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는 얘기도 속속 들려왔다. 내용인 즉 이들 두 사람 말고도 고문 경찰관이 세 명이 더 있으며, 조직의 보호를 위해 두 사람만이 희생양이 되어 '고문살인 경관'이라는 오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이부영은 감옥 안에서 나름대로 취재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 조작의 상세한 전모를 몇 차례에 걸쳐 정리하여 교도관 한재동을 통하여 전병용에게, 다시 최종 수신자인 나에게 전달되게 했던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1월 14일 이후의 신문을 모조리 뒤져 모든 기사를 스크랩하고 정리했다. 이제 이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세상에, 국민 앞에 알리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야당의원의 입을 빌어 대정부 질의를 통해 공개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그 살벌한 시국 분위기에서 무리가 따랐다. 5․18이 다가오고 있었고, 유일하게 남은 길은 사제단을 통해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제단에게 전달된 문안을 어떻게든 발표만 해달라고 졸랐고, 미사 2부를 빌어 발표한 것이었다. 이후 사제단 성명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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